음악여행/공연전시후기

이다 헨델 공연(2005. 5. 13)

코렐리 2007. 5. 9. 16:30
퇴근 후 여유있게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공연 보기 전 항상 들르던 백년옥에 들러 오늘따라 고프지도 않은 배를 채우기 위해 두부백반을 먹었다.
공연중 배가 고파 집중력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바로 옆자리에선 신구씨를 비롯한 3명의 원로 탤런트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식사 후 예술의 전당에 가니 금실언니가 혼자 공연을 보러 왔는지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는 여고생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다.
오늘 내가 본 저명인사는 그들뿐이 아니었다.
엘피러브닷컴 사장님과 클림트의 사장님이 특유의 면도하지 않은 얼굴과 꽁지머릴 하고 공연을 보러 왔다.
나는 앞에서 네 번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원래 앞에서 열번째 자리를 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막상 앉아보고는 최상의 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경우 음향의 집중점이 중앙의 10번째 자리지만 기악 연주는 내가 앉은 자리가 직통으로 와닿는 곳이란 걸 곧 깨달앗다.
서론이 넘 길었다.

이시대 마지막 비르투오조를 만난다는 설렘에 나는 계속 그녀가 나올 곳만 쳐다 보았다.
그녀인지 아닌지 몰라도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무대 위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아담한 키에 평범한 외모는 우리네 이웃 할머니에게서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이 있었다. 반주자인 월터 델라헌트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나도 소박했다.
자주색 드레스는 마가 조금 섞었는지 약간 구김이 있었고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일흔을 훌쩍 뛰어넘은 모습이라고 보기엔 당당함이 잇었다.
당근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잠깐의 조율을 마치고 첫 곡인 코렐리의 라 폴리아가 연주되었다.
활이 현을 문지르기 시작하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샘에 미열이 남을 느꼈다.
처음 접하는 곡인데도 이렇게 짜릿할 수가...
그녀의 운궁과 운지는 너무나도 여유가 있었다. 보는 사람이 편안할 정도로... 다시말하면 완벽한 연주에 대한 그녀의 강박관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70년 연주인생의 경륜인데 오죽하랴.
선굵은 연주였다.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그녀의 연주를 듣고 보고 있노라니 그녀의 숨결조차 느껴진다.
웃기지 말라고? 사실이다.
연주도중에 거칠게 쉬는 숨소리를 이 귀로 끊임없이 직접 들었다.
글렌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녹음에 연주자의 흥얼거림에 열광하듯 나도 여기에 흥분했다.

두 번째로 이어지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8번.
오늘 레퍼토리 중 가장 익은 곡이다.
이 곡 연주할때였나보다.
누군가 참던 기침을 메마르게 두세 번 내뱉었다.
그녀의 눈이 이내 소리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나는 여기에 놀랐다.
다른 공연에서는 흔히 있는 기침소리 정도야...
그러나 이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잡음이었다.
비르투오조에 대한 관객의 경의감은 이미 모두의 숨을 죽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 사소한 잡음에 그녀의 집중을 순간이나마 분산시켰을까.

세 번째 곡으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중 샤콘느였다.
자칫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곡이라 생각된다.
도입부엔 거칠다싶을 정도로 활을 그어대며 시작된 연주였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100% 의 집중력을 강조했던가.
연주도중 감정에 치우치면 구성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녀는 감정이 이입이 억제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감정몰입으로 인한 인상의 찌그러짐이나 몸의 동요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과장없이 절제된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 열광하듯 그녀의 연주에는 힘과 절제가 있었고 나 나름대로 대단한 감격을 느꼈다.

10분간의 휴게시간 후
쇼송의 시곡으로 시작된 2부에는 바르토크의 루마니아 민속무곡과 비에냐프스키의 화려한 폴로네이즈 같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곡들을 연주했다.

한 두명의 휴대폰 울림 등으로 공연장 분위기를 깨는 일도 없었다.
모두가 철저하게 매너를 지켰고 황혼에 접은 마에스트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네 공연문화가 잠깐 사이에 이렇게 성숙되다니...

앵콜을 연주하기 위해 반주자와 함께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저음이었다.
히어링에 약한 내가 듣기론 진작부터 한국 관객을 만나고싶었다고 한 것 같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헝가리 무곡 연주는 정말 멋있었다.

쑥스러워서 어지간하면 기립박수를 보내지 않던 우리네 사람들...
나는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몇 몇 젊은이들이 함께 기립했고 어떤 젊은이는 그녀에게 키스를 날려 보냈고 그녀는 목례로 화답했다. 거장다운 여유였다.

홀이 따나갈 갈채가 계속되자 두 번째 앵콜곡을 들고 나왔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xxx를 대편성곡이지만 바이올린 솔로로 준비했다는 멘트와 함께 마지막 연주를 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황혼의 대가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콘서트 홀에서 이런 열광은 처음 보았다(외국엔선 흔한 일이겠지만...)
모든 면에서 나무랄데 없는 공연이었다.
7만원 주고 본 공연이었지만 나는 700만원어치 보고 나왔다.

그녀의 사인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화장실에 들러 느리적거리고 나와 500명정도가 길게 줄을 늘어선 것을 보고서였다.
서둘러 맨뒤에 가서 섰다.
아! 나까지 사인을 수 있을까...
즉시 이다 헨델의 바로크 음반(코렐리, 나르디니, 타르티니, 비탈리)을 구입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2/3정도의 사람들이 사인을 받았을 무렵 앞쪽에서 탄식과 함께 웅성거리며 오합지졸이 되어감에 사인회가 종료되었음을 알았다.
모두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났지만 나와 몇 몇 고집불통들(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멀찍이서 계속 따라다니다 결국은 기회를 포착했다.
뭐라고 썼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악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나보고 돌았다고들 할까...
웃기는 것은 이 음반이 내겐 이다 헨델의 첫 음반이란 것이다.
CD 사긴 싫고 LP는 왠만큼 비싸야 엄두를 내지...
그래서 오늘 처음 샀다.
그녀의 연주를 면전에서 다시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꼭 다시 한 번 보고싶다.
이제껏 본 공연 중 최고의 감동을 얻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