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가 돌아 주저없이 달려 갈만한 공연이 그동안 얼마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즘이다.
공연예술에 관한 정보는 음악잡지에서 얻었지만 굳이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10년간 음악잡지를 계속 보다 보니 나중엔 그 내용이 그 내용이고, 볼게 없어 그 후 10년 정도 잡지도 접었다. 잡지를 봤어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트스트들 절대다수가 땅 속에서 자고 있으니 내한공연 소식도 눈에 띠는 것이 없었다.
나도 나름으로는 공연장을 찾는 기준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첫 째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 하지만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클래식의 경우 50~6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지금은 생존자가 별로 없고 활동자는 더더욱 적다. 레오니드 코간, 푸르트벵글러, 요한나 마르치, 마이클 래빈, 클라라 하스킬 같은 인물들이 무덤에서 나와 공연을 할 리는 만무하고 선택은 좁아진다.
둘째는 음향상태가 좋은 공연장.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나 LG아트센터 같은 곳이라면 더 볼 것도 없이 좋다. 70년대 후반 공연문화예술 촉진을 위해 세워졌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은 당시 지도자들의 무지를 과시라도 하듯이 허우대에만 신경을 썼는지 음향설계가 형편없기로 악명이 높다. 더욱 끔찍한 것은 상암구장이나 잠실펜싱경기장 같은 곳에 마이크를 설치한 공연이다. 이런 곳에서의 공연은 생존시에 다녀 갔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공연 조차도 안갔다.
세 번째는 티켓값이다. 한국에서의 공연티켓 값은 일본이나 유럽의 애호가들도 놀랄 정도로 비싸다. 초청공연을 하고자 하는 공연기획사들이 경쟁하듯 출연료를 올리고 나면 웬만한 기획사들은 떨어져 나간다. 최후까지 남아 경쟁을 하는 이들이 바로 한국의 공연기획사들이란다. 한국인들끼리 출연료를 더 주고 데려 가려고 드잡이를 하는 셈이다. 한국의 음악애호가들이 보면 기가 찰 노릇이고 그 경비는 고스란히 티켓을 구입하는 우리들이 부담해야 한다. 지인의 말을 빌면 심지어는 공연기획권만 획득한 브로커들이 이걸 다시 다른 공연기획사에 팔아 이득만 보고 빠진다나...
어쨌든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 주면 그제서 공연장 로열시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재빨리 확보해서 즐겼다. 오케스트라 공연은 무대 중앙 열번째 좌석(오케스트라 음향 집중점), 실내악이나 리사이틀의 경우 무대 중앙 5~7번째 좌석에서 봤다. 정경화, 이다 헨델, 샤를르 뒤트와,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하겐 사중주단, 정명훈, 보로딘 사중주단 등의 내한공연이 그랬다. 내한한 뒤 두어 달 지나 작고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공연을 놓쳤던 것은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된다. 조금 덜 선호하는 연주자의 경우 가장 싼 좌석을 구입해 봤다.
서울스프링실내악 축제가 금년에도 열리고 그 공연의 하나로 막심 벤게로프의 리사이틀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 뒤 표를 구입했다. 좋아서 미치고 환장하는 아티스트는 일단 아니다. 심지어 그의 음반 한 장도 가진게 없다. 하지만 현역으로 활동하는 연주자 중 가장 훌륭한 연주자 중 하나이니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이 번 연주회에 가면 그의 연주는 생전 처음 듣는 셈이다. 이러면서 잘난척하고 공연장을 찾겠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이 공연은 어제(2012.05.01)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다. 레퍼토리도 아주 좋았다. 헨델의 소나타 4번, 베토벤의 소나타 9번"크로이처",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이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는 최고라 할만했다.
공연장에 도착하고 보니 연주 순서가 뒤바뀌어 바흐의 파르티타 2번이 가장 먼저 연주된다는 내용이 모니터에 떠 있었다. 피아노 반주자가 늦는 모양이군. ㅡ,.ㅡ;
예술의전당에 와 본 것이 몇년 만인지 아득하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길 건너편 백년옥에서 순두부 백반을 먹곤 했는데 이 집에 들르는 일도 공연이 있을 때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찾는 공연장에 대한 설렘도 좋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백년옥 순두부도 최고였다. 시간이 되어 좌석을 찾았다. 이 날 예약한 좌석은 무대 좌우 및 뒤편에 설치된 합창대석 중 우측 날개 바깥쪽 끝부분이다. 이 곳에선 연주자의 옆모습을 10미터 정도 안팎에서 볼 수 있다. 소리의 전달도 거의 왜곡이 없는 위치다. 이 자리가 3마넌. 신한카드로 결재하니 30% 빼준다. 구입수수료 포함 22,000원이다. 저렴해서 좋다. 예정된 20:00가 되자 무대만 남기고 조명이 모두 꺼졌다.
문이 열리고 내 시야에 벤게로프가 들어오기도 전에 앞좌석에서 이미 그를 본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장이 떠나갈까 걱정됐다. 열화와 같다는 소리가 바로 이런 경우라 할만 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가슴과 등이 발달한 약간은 묘한 실루엣에 전형적인 슬라브인의 인상이었다. 청중에 단정하게 인사한 뒤 곧 현에 활을 얹고 긁어 내리기 시작했다.
연주곡은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이었다. 처음 듣는 그의 연주였다. 비교적 부드럽고 따스한 음색이었다. 약간은 선이 굵은 듯하다. 레가토 주법을 적지 않게 쓰는 것 같았다. 명상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하이페츠가 살아 생전 자신이 쓰던 활을 남기며 그의 뒤를 이을만한 연주자가 나오면 주라고 유언했단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단 야그네? 벤게로프가 프로코피에프 협주곡을 녹음(1995)한 직후 그에게 주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 있고 그걸 기억하고 있다 보니 그가 지금 쓰고 있는 활이 바로 그 활일까 궁금했다. 음악을 들으며 쓸데없이 떠오른 생각이고 보면 제보다 젯밥인가...?
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헨델의 소나타 4번. 회색 머리를 한 갱년기의 남성 피아니스트가 반주자로 동반해 등장했다. 1악장에서 노래하는 듯 벤게로프의 연주를 받쳐 주는 그의 반주가 인상적이다. 2악장에서는 주고 받는듯 약간은 격렬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피아노 반주자 옆에서 악보 넘기기를 거들던 처자가 잠깐 명상을 했었나 보다. 보던 페이지의 악보가 끝나 가는데 넘겨줄 준비를 하는 기미가 안보였던지 반주자는 건반에서 눈을 떼고 처자를 휙 본 뒤 턱과 머리로 악보를 급히 가리켰다. 처자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악보를 넘겨 사고는 나지 않았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이야기 꺼리가 되지. ㅎㅎ 나 넘 못됐나? 갑자기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80분 가까이 되는 긴 곡 전체를 통틀어 심벌은 4악장 클라이맥스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심벌 주자가 심심해서 졸았다가는 혼비백산 진행중인 악보 위치를 찾게 되는 탓에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곡이다. 어쨌든 각설하고.
10여분의 휴게시간 후 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베토벤 소나타 9번 "크로이처". 그냥 마음껏 즐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베토벤 특유의 열정과 극적인 긴장감. 듣는 기분은 무척 들뜨고 감정이 고양된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주고 받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예정된 곡이 모두 끝나고 나면 당연히 앵콜 요청이 있게 마련이고 연주자는 버티다 못이기는 척 앵콜 한 곡 연주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를 어느 연주자가 피해서 갈까. 나는 이때 은근히 기대하던 곡이 있었다. 비탈리의 샤콘느 또는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벤게로프가 악기를 들고 반주자를 대동한 채 다시 무대에 올랐다.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1번이었다. 관현악곡의 느낌을 바이올린에 모두 담으려니 그랬을까 아님 편곡 자체가 그리 되었을까. 과도한 비브라토를 쓰는 등의 과장된 연주가 눈에 띤다. 좋다 어쨌든 좋아. 재차 이어지는 열화와 같은 앵콜 요청에 마지못해 바흐 무반주 일부를 다시 연주했다. 앵콜곡 두 곡이 연주되는 일도 사실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그 공짜 공연(?)을 모두 즐기고 나올 수 있었다. 공연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11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익일 새벽같이 일어나자면 빨리 씻고 자야했다. 앵콜곡으로 기대했던 곡에 미련이 남았다. 해서는 안될 짓이었는데...
비탈리의 샤콘느는 처절한 연주가 일품인 프란체스카티의 연주로 함 듣고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은 카랑카랑하면서도 깔끔한 마이클 래빈의 연주로 함 듣고 잘 참이었다. 비탈리의 샤콘느를 턴테이블에 올려 바늘을 얹고 곡이 끝날 때까진 너무나 좋았다. 이따금 술마시고 하는 실수를 맨정신에 저지르고 말았다. 턴테이블에서 음반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떨어뜨렸다. 으헥! 흠집 하나 없던 음반에 생긴 스크래치. 아 미쳐~~~! 아 미쳐~~~! 난 몰라 몰라 몰라 으아아아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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