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0 중국어학연수

중국어학연수6(베이징)

코렐리 2010. 8. 6. 13:39

2010.6.28(월)

놀러 갔다 와서도 수업만큼은 칼같이 참석했다. 수업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 가오지에(高杰)는 동양계 미국인이었다. 강의실에서의 이름은 국적을 불문하고 한자 이름으로 통했다. 나야 한자 이름이있으니 중국식으로 발음하기만 하면 된다. 서양인들은 이름과 비슷하지도 않은 한자를 어떻게 정해 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곳에선 본국에서의 이름은 굳이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동료들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며 몰려 들어갔다. 날도 더운데 나가기도 귀찮아 따라 들어가 보았다. 값은 만만치 않은데 맛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주문한 것은 최악이었다.

점심 식사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차편과 항공편 예약이었다. 다음 주말에 놀러갈 청더 왕복편과 그 다음주 수요일 단기과정 종료 후 시안으로 가는 루안워( 

1. 다음 주말에 놀러갈 청더(承德) 왕복편 --- 2010.7.2(금) 14:30 베이징-->청더, 2010.7.4(일) 17:00 청더-->베이징 왕복 122위엔

2. 그 담 주 수욜 단기과정 종료 후 시안행 ---  2010.7.7(수) 21:18 루안워(軟臥: 안락침대칸) 베이징 서역-->시안 편도 152위엔

3. 일요일에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항공편 --- 2010.7.11(일) 10:45 시안--> 베이징 편도 880위엔

2와 3은 뜀도령과 찬바람 두사람을 포함해 구입하니 워낙 큰 액수여서 카드로 계산했다. 젠장 게다가 카드 수수료 5%는 또 따로 받넹?

 

표와 영수증을 받아 놓고 골아픈 숙제를 마친 것처럼 한시름 놓으며 숙소를 향해 돌아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인샹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 중국식 이름을 알고 이를 기억하고 부르는 사람은 서울에서 나를 가르친 12명의 강사선생님 말고는 없는디? 처음엔 잘 못 들은 줄알 았다. 두 번째 가서야 주변을 둘러 보았다. 뒤돌아 보니 북경 온지 이틀째 되던 날 분반을 위해 나를 구두 테스트 했던 강사선생이었다. 귀여운 인상에 웃는 모습의 그녀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는 며칠간의 안부를 물었다. 짜게 평가해서 하품나오는 반에 배정할 땐 언제고... 하는 감정 섞인 느낌 보다는 그 많은 학생중에 기억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이 날도 날은 무척 더웠다. 이박 삼일간 혹독한 더위에 놀러다니느라 몸이 지쳤던 모양이다. 이 날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방안에서 쉬기로 작심했다. 점심식사 후 한거라곤 내의와 양말을 빨아 널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식사를 겸해 맥주 한잔 사주려고 우리 학교 학생인 세미 녀석보구 여기서 사귄 친한 친구들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전부 울학교 학생들만 델꼬 나왔다. 상문, 인정, 지혜, 세미, 모두가 중국어는 처음으로 공부하는 초급자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데리고 성도미식으로 갔다. 생선요리와 닭요리 그리고 칭다오 생맥주. 요리는 상당히 매운 편이었지만 먹을만 했다. 자리는 2차로 이어져 도착 첫날 들렀던 우다오커우(五道口)역 근처 야시장으로 이어졌다. 내 스타일대로 가는사람 안잡고 오는사람 안막고... 네 명 모두 2차에 따라 나섰다. 내 스타일대로 먹고싶은 만큼만 마시기. 과하게 먹고 여기저기 꾸엑꾸엑 하거나 남을 억지로 마시게 하거나 음주 전후 모양새가 많이 다른 사람들은 사절. 쿨하게 마시고 쿨하게 종료했지만 북경의 날씨는 전혀 쿨하지 않았다. 

 

 

2010.6.29(화)

내가 수업을 듣는 반의 학생들 중 나와 같은 한국인은 한 사람 뿐이었다. 생긴걸 보고 한국인임을 알 수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다. 우짜다 보니 내 뒤쪽에 태국여학생이 앉아 있었고 그 뒤에 한국인으로 의심이 가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말을 붙여 보니 역시 한국인이었다. 내 옆자리에는 태국인 남학생이 앉았다. 양다청(楊達誠)이라는 이름의 대학생이었는데 그 뒤로 이 친구는 내키면 수업에 들어오고 안내키면 자취를 감췄다. 한 번은 수업에서는 모지 못한 그가 자전거 체인을 풀며 어디론가 가려는 그를 향해 " 수업은 안들어 오더니 어디 가냐?" 했더니 "약속이 있어서..." 수업료 내고 놀러 다니는걸 보니 부친이 부자인 모양이다. 어쨌든 수업에서 처음 만난 그는 내게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한국 여자애들 정말 예쁘더라." 나는 접대성 발언으로 "태국여자들도 예쁘지 뭐." 했지만 속으로는 "공부나 하셈"이 나의 대답이었다. ㅡ,.ㅡ;

수업 종료후 짐을 놓아두고 골동품 시장으로 유명한 판지아위엔(番家圓)으로 가기 위해 일단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직장 선배가 점심 사줄테니 함께 가잔다. 오늘 일정을 물으니 아무데도 안가신다고... 어쨌든 밖으로 나가 아래의 식당에 들렀다. 약간은 꺼주구리한 간판이지만 안은 규모가 크고 깔끔한 비교적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칭다오 맥주가 없어 대안으로 주문한 옌징맥주. 고급 식당으로 갈수록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칭다오 맥주가 없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먹는 칭다오 맥주와 본토에 와서 먹는 칭다오 맥주는 맛이 달랐다. 한국에서 마시던 칭다오 맥주는 깔끔한 뒷맛에 특유의 향이 살짝 깔려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에서 마시는 칭다오 맥주는 왠지 모르게 밋밋하고 탄산가스도 약하게 느껴졌다. 가장 좋은 맥주는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은 있다. 칭다오에 본사와 공장을 갖고 있는 칭다오맥주가  돈을 벌어들임에 따라 타지역의 맥주공장을 사들이고 여기서 나오는 맥주에 칭다오 레이블을 붙여 판다는 말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사실이라면 중국에선 칭다오 지역이 아니고선 오리지널 칭다오를 맛보기 힘들다는 대충의 지레 짐작도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추엔쥐더(全取德)같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갈수록 칭다오 맥주는 없고 옌징맥주가 대세였다. 어쨌든 여기서 마신 맥주도 옌징맥주였다.

 

이름은 모두 잊어버렸다. 고기완자 요리, 고추와 돼지고기를 간장양념으로 볶은 요리, 야채요리(이거 디게 맛있다) 한접시를 주문했다. 고기완자는 강한 향신료가 들어갔지만 단단한 표피와 달리 속이 부드러워 표면에 졸아 붙은 소스와 잘 어울렸다. 숨이 살아있는 풋고추와 간장 양념이 짙게 밴 돼지고기채 볶음은 간장향이 두 재료의 화합을 감미롭게 이끌어낸다. 아래 사진의 맨 아래 요리는 볶은게 아니고 찐 야채요리같다. 소스향이 좋고 숨이 살짝 죽은 야채는(이게 무슨 야채지?)는 입안에서 우적거리며 녹색야채의 상큼함과 소스의 향긋함, 적당한 당도가 완벽하게 코끝과 입안의 미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나의 만류에도 물구하고 선배가 고집으로 주문한 아래의 두부요리는 완전 NG였다. 두부와 아주 작은 경단, 맛살 등이 들어간 아래의 요리는 달고 껄쩍지근해서 밥반찬으로는 물론이고 그냥 먹기에도 손색이 엄청 많았다. 달지만 안았으면 이 것도 맛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엔지가 났던 말았던 이 많은걸 셋이서 먹느라고 우리가 한 짓은 입은 호강시키되 배는 어지간히도 혹사를 시키는 무식한 짓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두 선배들은 숙소로 돌아가 쉬겠다고 했다. 나는 혼자 쭐레쭐레 우다오커우 역으로 걸었다. 뒤통수를 향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제꼈다. 뒤돌아 보니 방금 밥을 사 준 선배. 더위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막상 돌아가면 할 일이 없어 괴로울 것 같더라는 말은 안하시고

"너 혼자 가면 심심할까봐 내가 함께 가주려고 왔어." ㅡ,.ㅡ; 나의 심술이 발동했다.

"선배님하고 같이 가기 싫은데 제가 대신 숙소로 돌아가 쉬죠 뭐." 이번엔 상대편에서 ㅡ,.ㅡ;

이렇게 쨉과 어퍼컷을 교대로 날리며 지하철 표를 끊었다. 이 때까지 나와 취향이 달라 택시만 타고 다니셨던 이양반 지하철 티켓 끊는 방법도 몰라 내가 도와야 했다. 택시만 타고 다니면 내가 간 곳이 지도상 어디쯤 위치하는지 모를테고 안다 해도 머릿속에선 금방 지워진다. 이러면 재미없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취향에 따른 생각을  해봤다.

10호선으로 갈아탄 뒤 중국에선 보기 드문 미모의 처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바로 옆자리가 비자 선배에게 자리를 권했다. 선배는 옆에 앉은 두 처자에게 엉성한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나이 쉰이 넘은 이 선배 도대체 무슨 용빼는 재주인지 시원찮은 중국어로 쉬지 않고 두 처자를 까르르 웃게 만들었다. 7cm의 빈공간을 쑤시고 앉은 반대편 아줌마가 일어나자 두 처자는  자리를 더 넓히며 내게 앉기를 말없이 권했지만 14cm정도 되는 간격에 된장독을 쑤셔 넣고 앉을만큼 숙기가 있는(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뻔뻔한...) 나도 아니니 사양했다. 그들은 진송역에서 내린 뒤에도 우리와 가는 방향이 같아 판지아위엔의 입구 근처까지 함께 수소문해가며 가 주었다. 차나 한잔 하고 헤어지자는 말에 한 사람은 지금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다 하고 한 사람은 내일에나 시간이 있다고 했다. 내가 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선배 다시 보였다. 대학 다닐땐 대단하셨겠는걸...? 어쨌든 그들과는 더이상 가는 길이 달라 헤어지고 우리는 입구를 찾아냈다. 입구는 고전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고 좌우에는 거창하게 사자상까지 세웠다.

 

아래의 초신판 베이징 전도는 방금 헤어진 처자들이 판지아위엔 가는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사준 것이다. 

 

가장 먼저 들러 본 곳은 도장 파는 가게. 각종 예쁜 도장들이 진열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 놓은 글자들은 그다지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둘러 보니 전에는 보지 못한 세라믹 인형들이 보인다. 모주석 인형도 보이고 홍위병 혁명을 재현한 것인지 섬뜩한 디오라마의 인형도 보인다. 늘여세워 놓으니 왠지 선동적인 분위기도 물씬 나고...

 

이 곳엔 어디에서 수집해 온 것인지 몰라도 대단히 많은 석상들이 진열되어 있고 주인으로 부이는 사람은 등받이 없는 자그마한 의자에서 세상 모르고 졸고 있다. 

 

서화 중심으로 시장이 구성된 코너. 이 곳은 그다지 재미있는 곳은 아니지만 가운데 앉은 노인의 말꼬리 헤어스타일의 포스가 대단하다.

 

 

이것이 중국 어린이들의 전통적인 헤어스타일인지 아님 최근 들어 유행한 것인지 아님 엄마 아빠의 개인적 취향이 아이의 머리에 반영된 것인지는 몰로도 특이한 것만은 틀림없다. 아이의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고 찍으려 헤어스타일이 특별하다고 했더니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박장대소한다.

 

이 곳 벼룩시장에는 눈에 띠게 옥으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많았다. 값은 천차만별이어서 정확한 가격을 알 수는 없지만 사정없이 후려쳐 깎아도 남을 거라는 인상만 강하게 남는다.

 

이 곳에는 멀쩡한 물건에도 오래된 흔적처럼 만들기 위해 각종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때를 입혀 파는 물건이 많다. 어딜 가면 똑같은 물건이 새 것처럼 진열되어 있고 어떤 것은 있는대로 세월의 찌든 때를 한껏 담고 있어 돈을 벌기 위한 열정과 노력이 흠씬 읽혀지는 곳이기도 하다.

 

다섯시가 되자 한 사람 두사람 좌판을 거두어 철수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상당수 어떤 상인들은 이미 철수한 빈자리에 깨짐 방지를 위해 물건을 포장하는데 썼던 구겨진 신문쪼가리들만 어지럽게 남았다. 처음 들렀던 장소 보다는 나중 들른 구역이 훨씬 재미가 있는 곳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함이 아쉽다. 한 시간만 일찍 돡하면 충분히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돌아가던 중 노상 리어커에 담아 파는 참외가 수박이 아닐까 의심이 들정도로 크고 먹음직해 보였다. 3개에 5위엔이었던 것 같다. 이걸 봉지에 담아 드니 묵직한게 나중엔 작지 않은 짐이었다. 숙소로 가서 먹어본 결과 ㅡ,.ㅡ; 늙은 오이 깎아 먹는게 낫겠군.

 

지하철에서 내려 이 번에는 오늘 낮에 갔던 음식점 바로 옆 집으로 가봤다. 일단 옆집 보단 실내 분위기가 꼬질거리지만 사람 수로 봐서는 옆집에 크게 밀리지 않을것 같았다. 날도 덥고 식욕도 그닥 크게 돌지 않아 한국에서 먹던 중국식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냉면이 있는지 물었더니 있단다. 가지볶음 요리와 함께 시켜 보았다. 중국의 가지요리는 워낙 맛이 좋으니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이놈의 웬수같은 냉면. 한국에 평양냉면(물냉면)과 함흥냉면(비빔냉면)이 있듯이 물냉면과 물없는 냉면이 있나보다. 나온걸 보니 생김새가 기대치를 철저하게 배신했다. 국물 없는것도 NG였지만 복덕방 아저씨 머리 기름 바르듯이 기름을 정성스레 발라 놓은 면발도 그렇지만 그외 양념은 개미 눈물모냥 살짝뿌린 간장소스의 앙얄함이 서운하다. 못먹을 음식은 아니었지만 절대 즐겨먹을 맛은 아니었다.  이 집도 식당 내 손님 수로 봐서는 옆집에 밀리지 않았지만 맛 대비 가격 면에서는 현저하게 열세인듯하다. 그나마 칭다오 맥주가 있어 위로가 된다. 못먹을걸 씹는듯한 선배의 표정에는 괜히 나를 따라 주문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40도를 넘은 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보통은 38~40도 사이여서 체감으로 느끼는 더위는 심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돌아다니는 재미와 현지여건을 활요하겠다는 의지는 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어쨌든 숙도로 돌아가면 찬물에 샤워하고 크지 않은 방에 가동되는 에어콘은 저녁마다 느끼는 편안함을 더욱 편안하게 한다.

 

2010.6.30(수)

아침 7시면 어김 없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늦잠으로 이부자리를 뭉개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란 쉽지도 않다. 수업을 빼먹고 게우름을 피운 뒤 느즈막이 일어났을때 느끼는 것이 만족감보다는 자괴감이라는 생각을 하면 싫어도 일어나는 것이 현명했다. 이 날 수업 첫시간은 회화였다. 옆에 앉은 친구는 이탈리아인으로 파올로 보르지알로(Paolo Borgiallo)라는 친구였다. 이 날은 옆사람과 회화연습을 하라는 미션을 자꾸 준다. 왠지 조금은 귀찮고 짜증나는 방식이었다.

하나의 상황 설정을 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두 사람이 해보라는 것이다.

미션을 주고 나면 지명으로 구 사람이 모의 대화를 하는데 두 사람이 두 세마디씩 하고 종료를 하니 강사는 좀더 깊이 있게 대화를 해서 좀 더 긴 시간을 토론하라는 주문을 했다.

누굴 시킬지 모르니 나는 새로운 미션이 나올 때마다 즉석에서 대충 짠 시나리오를 파올로에게 이야기해 주고 이를 토대로 대화해 봤다.

상황들 중 하나가 "여행에서 갗 돌아온 두 친구 중 하나가 카메라를 잊어버렸고 어느 곳에 두고 왔는지 모르는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이 미션은 우리가 지명되었다. 대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차, 내 카메라! 카메라가 안보이는걸."

"어디에 두었는데? 가방 안에 없어?"

"글쎄, 없는걸. 이거 어찌된 영문인지 도대체 모르겠어."

"가장 나중에 사용한게 언제야?"

"오늘 아침부터 한 번도 안썼어."

"호텔에선 가지고 나왔어?"

"몰라, 호텔에 두고 왔는지 아니면 기차에 두고 내렸는지 도대체 기억을 못하겠어."

"그럼 일단 호텔에 전화해 봐."

"좋은 방법이지만 호텔 전화번호를 몰라."

"내가 명함을 챙겨왔어. 자 받어"

"우와, 너 참 세심하다. 그럼 호텔에 없으면 기차역에 전화해 봐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어떻게 확인하지?"

"너두 참, 인터넷을 사용하면 금방 되잖아."

"아, 그걸 생각못했네. 고맙다. 넌 참 좋은 친구야."

 

급조한 시나리오에 따라 연출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대화만으로도 수강생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지니 싫지는 않으면서도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수업이 종료된 뒤 선배와 후배가 식사하러 가자며 나를 잡아 끌었다. 전날 선배가 봐 두었던 집에서 곱창전골을 먹잔다. 그 나라에선 그 나라의 음식을, 그 지방에선 그 지방의 향토음식을 먹는 것이 철칙인 나도 다수의 의견에 밀려 결국 5명이 몰려 나갔고 나도 끌려 나갔다. 외국에서 하는 한국음식점에서 제 맛을 내는 경우는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참이슬도 있고 김치같은 밑반찬도 있지만 맛은 그냥 저냥 먹을만은 했지만 서울에서 먹는다면 욕나올 솜씨였다. 식사후 세 사람은 숙소로 돌아가고 전날 나와 함께 판지아위엔에 갔던 선배와 후배 한 명이 남아 나와 함께 다종쓰(大宗寺)로 가기로 했다. 아니, 나 혼자 갈 참이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지하철이 우리네 거미줄처럼 사팔방으로 뻗은 지하철 노선과 달리 단촐한 노선밖엔 없지만 웬만한 유적지와 주요 공원 및 목적지 대부분은 거의 지하철로 해결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도 지하철을 이용했다. 게다가 지하철에는 에어컨이 쾌적하기때문이기도 했다. 택시를 좋아하는 선배도 이 때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다종쓰(大宗寺)까지 가는데 여중생들의 도움이 컸다. 역에서 내려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물으니 자신들이 가는 길과 같으니 따라 오라고 한다. 내렸던 전철역이 무슨 역이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다종쓰 입구에 도착하니 주변에는 간이 벼룩시장이 선다는 말에 기대를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구매욕을 자극하는 물건은 없었다. 선배와 후배는 학생증을 안가져왔다. 나는 혹시 몰라 갖고 다니기는 했지만 어디엔가 내밀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입장료 10위엔. 얼레? 학생증을 제시하니 4위엔이넹? 허... 그거 괜찮네. 이후 학생증을 들이밀면 어디서는 대충 보고 처리해 주지만 단기 유학생은 안된다는 곳도 있고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인다.

 

입구 좌우 담벼락에는 선세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좌우에는 새끼를 어루만지는(?) 사자상이 서 있다.

 

다종쓰(大宗寺)는 1733년인 청나라 옹정 11년에 황제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창건한 사원이라고 한다. 명나라 영락제 때 주조된 큰 종 용르어다종(永樂大種)이 보관되어 있어 다종쓰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줴셩쓰(覺生寺)라고 한다.

 

지금은 승려나 불공을 위한 공간이나 시설도 전혀 없었고 오로지 크고 작은 종들만이 전시되어 있어 종박물관이라 칭하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 같다.

 

사실 이 곳에 오면서 사찰일줄 알았던 나는 약간 실망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종교가 되었든 종교문화엔 나름 관심을 가진 나의 취향 때문이었다.

 

1986년에는 이 곳이 고종박물관(古鐘博物館)으로 지정되어 원시시대 흙으로 만든 종부터 현대의 종까지 700여개의 종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 주류를 이루는 것이 1600~1800년대에 주조된 종들이다.

 

거의 민무늬에 가까운 종으로부터 종에 새겨진 화려한 부조가 눈을 사로잡는 종까지 무척 다양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래의 사진은 종이라기 보다는 풍경이라고 해야 옳을듯하다.

 

 

 

 

 

이 곳이 영락대종이 보관되어 있는 종각인데 안에 들어가면 그 종의 크기에 놀라게 된다.

 

 

영락대종은 높이 6.75미터, 지름 3.3미터, 무게 46.5톤이며 종에는 100개가 넘는 경문이 새겨져 있으며 글자 수로는 3만여자라고 하니 당시 이들의 불심을 엿보게 한다.

 

우와~~~~!

 

사실 이 종은 종각 을 거의온전히 채우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큰 종의 외곽 선의 안정감과 유려함만 보아도 만 보아도 그 예술성을 인정할만 하다.

 

밖으로 나와도 종은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다.

 

누굴까... 복장이 황제와 거리가 멀어 보이니 영락제는 아닐거고... 모름. 통과! 

 

 

대종사를 나온 우리는 선배의 제의에 따라 택시를 타고 뭐라더라... 북한이 운영한다는 호텔 근처의 한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가서 보니 파리 날린다. 맛도 한국에서 먹던 것을 생각하면 머시기 하다. 우리가 나올 때쯤 되자 이 식당은 제법 많은 현지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래를 잘 못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방까지 들러 놀다 돌아온 시간은 대략 11시쯤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