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8(토) 계속
국립박물관에 실망했으면서도 볼건 그래도 끝까지 다 봤다. 한 나라의 국립박물관이니만큼 봤단 소리 할려면 볼게 없어도 끝까지 봐야 한다는 사명감. 뭐 그런 것 때문이었을거다.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파슈파티나트 사원으로 가기 위해 눈에 띠는 택시를 잡고 요금을 협상해 보았다. 400인가 얼마 하는 요금을 부른다. 싸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했더니 따라온다. 쳐다도 안봤다. 다른 차를 수배하려고 해도 이 곳은 다니는 사람도 차량도 모두 뜸했다. 명색이 국립박물관인데 으째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건지 이해도 안간다. 우리는 다시 스와얌부나트 사원 입구로 되돌아와 그 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아마도 200루피 준 것 같은데? 카트만두 시내 웬만한덴 전부 다 200루피면 되는 것 같다. 도착한 파슈파티나트 사원 입구 매표소. 안내판에 쓰여 있는 입장료에 놀라 자빠지는줄 알았다. 자그마치 500루피. 자기는 안보고 여기서 기다릴테니 둘이 들어갔다 나오라는 찬바람을 꼬셔 1,500루피를 내고 들어가 봤다. 카트만두에서도 가장 볼만한 사원인 이 곳을 안보고 돌아간다면 말이 안되지 않겠느냐며 꼬셨더니 찬바람도 이내 생각을 바꾸고 함께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가트. 이 가트는 화장터로 사용되는데 이들도 갠지스강을 성지로 알고 있을테지만 그리로 가자면 적잖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만큼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이 곳 파슈파티나트 사원의 개천에 시신을 화장하는 모양이다.
이제 막 화장이 시작된 시신
화장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다리를 통해 개천을 건너가서 화장터중인 가트를 넘겨다 보았다. 여기저기 장작을 쌓아놓고 시신을 화장하던 인도 갠지스강의 마니까르니까 가트가 오버랩되었다. 당시 내가 본 화장시신 중에는 시신을 둘둘 감은 흰천 사이로 손과 발이 삐죽 나온채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숙연했던 기억이 있다. 생명을 다하면 어차피 저렇게 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짧은 인생에 뭐가 그리도 서로가 미워 아웅다웅하는지 회의감이 들었었다. 이후에는 욕심 부리지 말고 남을 이해하며 살겠다고 다짐해 놓고 그자리를 뜨자마자 곧 잊어버렸던 것도 역시 생각난다. 망각은 인간의 속성인가... ㅡ,.ㅡ;
심란한 표정으로 화장중인 가트를 바라보는 아낙네들
위쪽으로 보이는 구조물들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안에는 수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명 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했다. 나는 사진을 찍고 마침 갖고 있던 10루피 지전을 내주었다. 이 때 찬바람도 찬스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눈치 빠른 이 수행자 아찌 죽자사자 찬바람을 쫓아다니며 돈달라고 했다. 찬바람은 마음의 주머니가 썰렁했다. 그 아저씨도 한동안 찬바람의 돈에 집착하더니만 포기했다. 둘 다 흠좀무. 전술한 바 있지만 수행자의 목표는 득도인지 득전인지 알 수가 없다. 태반이 가짜 아닐까.
가트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가 강물의 흐름을 막고있는지 소년 한 명이 하나 하나 타다 만 장작을 물속에서 꺼내 옮겨낸다. 날 때부터 신분과 직업이 정해지는 이 곳 네팔 사회에서 그가 하는 일로 봐서는 최하층의 천민인 듯하다.
뜀도령의 말로는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상류쪽으로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화장터로 이용하고 방금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던 아래쪽은 비교적 낮은 카스트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터가 된다고 한다. 죽어서도 차별이군. ㅡ,.ㅡ; 아래의 사진은 상위 카스트의 사람들이 화장터로 쓰는 구역. 지금 막 시신이 한 구 들어왔다.
안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 곳에는 더 많은 수행자들이 득전(?)을 위해 관광객들 앞에서 수행인지 시위인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서양인 관광객이 사진을 찍길래 안보는줄 알고 나도 슬쩍 찍었다. 귀신같이 눈치채고 내게도 돈달라는 그를 생까고 지나간 이유는 사진을 찍은 서양인 관광객이 수행자에게 100루피나 내주는걸 보고 내가 주는 10루피에 어이없어 할 것 같은 지레짐작이었다. 이 곳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 강 건너편 힌두사원을 보았다.
많은 신도들이 끊임없이 사원을 들고나는 혼잡한 곳이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수행자의 사진을 찍은 곳을 지나치는데 다른 수행자가 돈을 달라고 한다. 나는 양손바닥을 내 보이며 어깨를 들썩여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영어로 "너 좀 아까 옆에 있는 이 사람 사진찍어놓고 돈 안줬잖아!" 그 새 내가 돈을 안내놓아 그들 사이에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흠좀무. 나는 모르겠다는 시늉을 하며 또 생까고 지나갔다. 이 번엔 아마도 수행자들이 날보고 흠좀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 어쨋든 이들에겐 왠지 모그게 사이비의 냄새가 난다.
사원과 강 주변 동영상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이 곳에는 여러 사원과 설치물들이 적지 않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사진 한 장 찍자고 이 짓 해놓고 보니 어지간히 철없어 보인다.
놀고 있는 두 어린이의 모습이 정겹다.
다시 강가로 나와 강건너로만 보았던 사원을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사원 입구까지 올라갔지만 그 안에서 출입자를 통제하는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힌두교도만이 입장 가능하다고 하더니 1인당 100루피씩만 내면 들여보내 주겠단다. 사원 안에서 이런 불경한 소릴 지껄이는걸 보면 이 놈도 힌두교 신자가 아닌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예라~ 이 듣보잡!
찬바람의 지금 이 포즈는 확 죽여버리겠다는 의미인가? 역시 흠좀무.
이 젠 이 곳에서도 원없이 볼것 다 보았고 오늘의 목표가 달성이 되었다. 이젠 호텔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하면서 맡겨둔 짐을 찾아 나와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짐을 찾아 나오면서 샤워를 좀 하고 가도 좋을지를 물었다. 종업원은 리셉션 옆 로비 소파에 앉아 다른 이 와 담소를 즐기던 사람에게 우리의 샤워를 허용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그가 사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우리는 그들이 지정해 주는 빈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직원에게는 약간의 팁을 감사의 의미로 건네고 길을 나섰다. 룸비니로부터 카트만두로 막 돌아와 경복궁이라는 식당에서 만난 적 있는 교포를 타멜촉에서 또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이 사람도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한인이면서 인도음식 위주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간판에는 패스트푸드라고 했지만 패스트푸드 뿐 아니라 여러가지의 음식을 했다.
식당은 널찍하고 운치도 제법 갖췄다. 우리는 음식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시켜 마셨다.
주인이 곧 안주거리 삼으라며 치즈를 튀겨 왔는데 맛이 아주 좋다. 나는 치킨커리를 시켰다. 큰 기대 하지 않았는데 인도에서 먹었던 치킨커리 못지 않은 훌륭한 맛이었다. 나는 역시 일부러 손으로 음식을 먹어 봤다. 역시 이들 음식은 손으로 먹어야 하나보다. 더 맛있는 것 같다. ^^ 식사가 끝나고 기념품이나 좀 사자며 자리를 터는데 주인이 잠깐 기다리라며 직원 한명을 불렀다. 달려온 종업원에게 뭐라고 네팔 말로 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바가지 안쓰고 물건 사실려면 현지인과 같이 다니면 좋지요. 이 친구와 같이 다녀 보시지요" 하며 붙여준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가죽 가방을 사고 싶었다. 뜀도령이 2-3일 전 타멜촉에서 구입한 양가죽 가방이 마음에 들어 나도 하나 사려던 참이었다. 그는 타멜촉 남쪽방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나쁘지 않은 가격을 제시받아 우리에게 중개를 해주었지만 한국에서도 아무 시장통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제품들 뿐이었다. ㅡ,.ㅡ; 그는 이곳만의 특색이 있는 물건을 원하는 우리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원하는 물건들이 있는 샵으로 데리고 갔다. 며칠 전부터 봐 두었던 양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적정 가격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뜀도령이 다른 가게에서 며칠 전 1,500 까지 부르던 것을 깎아서 1,000 루피에 산 적이 있는 바로 그 가방이었다. 샵 주인은 1,600을 불렀다. 나는 친구가 그 가방을 900에 이미 구입했다고 사기를 쳤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절대 황당한 가격은 아니었는지 '그렇게는 안되고 1,500에 주겠다며 조정된 가격을 불렀다. 나는 950에 주면 사고 아니면 그냥 가겠다고 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동전용 양가죽 손지갑 20개를 이미 개당 20루피에 협상을 봐 놓은 터라 주인 입장에선 가방 협상에 실패하면 동전지갑까지도 날아갈 판이었다. 결국 가방은 가격협상의 달인인 뜀도령보다 더 싼 값에 샀다. 오히려 좋은 가격으로 협상해 주겠다고 따라 나온 네팔인 직원이 우리가 가격협상 하는걸 보고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황당한 사기를 끊임없이 치는 이집션들과 몇 번 거래를 해 본 사람이면 달인이 되고도 남으니 이 곳 네팔처럼 순박한 사람들과 협상을 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웠다.
우리는 따라 나온 종업원에게 100루피의 팁을 주고 식당 주인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뜀도령이 엊그제 양가죽 가방을 샀던 가게로 다시 가 보았다. 이 곳에서 뜀도령도, 나도, 찬바람도 동전지갑을 몇 개씩 더 샀다. 아래의 동전지갑은 개당 25루피씩에 샀다. 이 곳의 가죽 제품들은 상당히 예쁘다. 이 가게의 주인은 인상좋은 젊은 친구였다. 뜀도령은 이 것 저 것 더 사려고 가격 협상을 하면서 협상이 잘 안되자 배를 째라는 시늉을 했다. 가게 주인은 뜀도령을 데리고 한 쪽 구석의 서랍을 열더니 과일깎는 칼을 능청스럽게 꺼내줘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래도 그에겐 대박이었던지 차 한 잔씩 대접할테니 마시고 가란다. 사실 인상 좋은 이 친구와 좀 더 이야기 하고 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공항으로 가야했다. 뜀도령은 근처 다른 가게에서 천조각을 붙여 만든 티셔츠 한 벌을 더 샀고 기념품 쇼핑을 마친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내릴때도 루피화가 130루피밖에 남지 않아 여기에 1달러를 더 주고 공항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티케팅을 완료하고
전 날 사놓고 먹지 않은 맥주를 꺼내 마셨다. 공항 안에서는 물건과 식품 값이 비싸 그런지 이걸 마시며 돈을 대박으로 번 느낌이었다.
므흣~~!
우리가 탔던 비행기
사람이 별로 없어 좋았지만 그렇다고 네 칸 모두 차지하고 누워서 갈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니 조금 섭섭했다.
기내식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환승지인 카타르 도하 공항의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공항청사 안에서 새로 산 옷을 입고 폼재는 뜀도령.
쉰소리 하는 찬바람을 향해 주먹을 들어 위협하는 이걸 셀카로 또 찍으니 나도 참 특이한 인간이다. 얼굴표정과 보복을 위한 주먹질이 역동적인 이 사진. 내가 찍었지만 셀카의 걸작이다. ㅋ
갈아탄 비행기.
에어컨 추위에 떨며 셀카 한 컷.
적잖이 지루한 시간이었다.
오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항공기에서 내렸다. 금년 초 요르단으로부터 카타르항공을 타고 돌아올 때는 오사카에서 일부 승객(사실 거의 대부분이 내린다)이 내린 뒤 비행기에 탄 채로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에 맞춰 출발했지만 이 번엔 일단 모두 내리게 한 뒤 대기시키고 있다가 다시 탑승하도록 조치했다. 항공기 실내가 청소를 했는지 더욱 쾌적해졌지만 나는 사실 기내에서 그냥 더 자고 싶었다. 다시 타고 나니 4개 좌석이 전체가 비어있는 곳이 많아 모두 흩어져 누워 잤다. 밥 때 되면 깨워 주리라고 생각하고 잤는데 화장실을 가느라고 일어 나서야 이미 식사가 끝난 것을 알았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 오면서 밥을 갖다 달라고 했다. 밥을 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각자 편한 자리에 흩어져 있더라도 먹을 때는 서로 챙겨줘야 하지 않나 하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고약한 뜀도령과 찬바람 같으니라구.... 나중에 알고 보니 뜀도령은 내가 자고 있는 줄도 몰랐고 더군다나 찬바람은 한참 자고 착륙 30분 남은 시간이 되어서야 식사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았단다. 이 때는 이미 늦어 안전벨트를 매야 할 시간이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해지는 상황이었다. 찬바람군. 조낸 불쌍하군. 죄송하게 됐네... ㅡ,.ㅡ;
찬바람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수씨에게 전화해 기내에서 밥도 못먹었고 삼겹살을 먹고싶다고 전화했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이사람 강심장이군. 그래도 제수씨는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 그 시간에 삼겹살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단다. 이 친구 집에 도착해 씻고 나면 11시쯤 될테고 그 때서야 삼겹살과 쐬주를 즐기겠군. 대략 어이 없음. 이제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여행 때마다 일행과 공항에서 헤어지기 허전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고 헤어지자고 했다. 까칠한 뜀도령은 여행 다끝났구만 무슨 사진을 또 찍느냐고 궁시렁거렸다. 잔소리를 제압하고 단체 셀카를 찍어봤다. 우습게도 뜀도령의 얼굴이 반도 안나왔다. 으하하 이거야 말로 셀카의 걸작중 걸작이다. 제목도 잡았다. 천벌받은 반쪽이와 함께한 썰렁한 놈과 괜찮은 놈. 너무 멋지지 않은가. 으키키...!
이 번 여행의 의미를 돌아 보자.
이 번 16박 17일간의 네팔 여행중에 전에는 해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트래킹이라는걸 한 번 해 보았다. 등산 매니아들에게는 네팔이 꼭 한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곳으로 트래킹을 오는 한국인은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네팔 전역을 구석구석 보는 것으로 계획을 잡고 있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시도해 본 6일간의 트래킹은 내게 있어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과 강 그리고 마을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자연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았고 우리의 산수와는 너무나도 달라 더욱 좋았다. 생전 처음으로 본 설산에 대한 기억도,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밤비도,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모두가 값지고 소중하다. 여름에는 트래킹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비수기였기에 많은 사람들과 산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누렸고 낮에는 비가 많지 않아 크게 불편함도 없었다. 오히려 이따금 흩뿌리는 비가 더위를 식혀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엉뚱하지만 거머리에게 헌혈한 것도, 가는 곳마다 보이던 그 지긋지긋하던 소떵과 말떵도 이제는 재미있는 추억이다. 다만 트래킹 구간에 있던 롯지들의 음식이 너무 부실하고 형편없었던 것이 아쉽다.
더 이상은 순수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순백의 구름. 그리고 그 구름 사이로 이따금 선심쓰고 거드름을 피우며 얼굴을 내밀지만 절대 아니꼽지 않고 쳐다보기 황송했던 설산.
쏟아지는 햇살 아래 여백 없이 푸르고 푸른 산. 그 속에 게릴라처럼 흩어져 있는 농가와 그림같은 계단식 논과 밭.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과 영역다툼이라도 하듯 그 사이를 비집는 그늘이 공존하는 트랙. 그 안에서 만나는 순박하고 순수한 사람들
내 머릿속에 담아온 이러한 잔상들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세계 4대 블랙홀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여행지라 가장 기대했던 포카라는 오히려 볼거리도 적고 릴렉스해져 보기엔 내가 너무 성질이 급한지라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자전거 여행만큼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자전거를 타고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오르막길을 헥헥거리며 달리던 기억.
평화의 탑과을 보겠다고 위해 포장도 안된 급경사의 하염없던 길을 자전거 끌고 올라가며 체액을 모두 땀으로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길을 자전거타고 내려오면서 느끼던 짜릿한 즐거움이란.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들른 티벳난민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깡패같은 물소를 만난 기억은 지금도 미소짓게 만든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같은 데비의 폭포가 주는 자연의 위압감도 흔치 않은 체험이었다.
포카라로부터 룸비니로의 장거리 이동이 힘들긴 했지만 내다 보이는 절경이 이동 자체에까지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룸비니에서 느꼈던 살인적인 더위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사실 이 곳에선 석가모니 탄생지와 그 유적, 한국 사찰인 대성석가사와 중국사찰 외에는 들러본 곳도 사실 없다. 일본 사찰도, 파키스탄 사찰도, 독일 사찰도, 프랑스 사찰도 모두 둘러보고 싶었지만 더위에 강한 나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더웠다. 문화매니아인 뜀도령도 바로 코 앞 중국사찰 들르는 것마저도 마다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석가모니 탄생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소년수행자를 만난 것 역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체험이어서 그 장시간을 오고 또 떠났던 힘겨운 그 길이 밟을 충분한 가치와 의의가 있다. 그 당시엔 끔찍하게 느껴졌었지만 택시에서 내려 주디와 헤어진 뒤 사찰구역 안으로 수풀 사이로 난 비포장 길을 비오듯 땀흘리며 걷던 일이 벌써부터 아련한 추억이 되어 그립다.
마지막으로 들른 카트만두와 그 주변 도시인 파탄, 박타푸르 등은 이 번 여행 최고의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해 자칭 문화매니아인 나의 여행만족도를 극대화시켜 준 곳이다.
이상하리만치 종교문화와 고전건축에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카트만두와 그 주변 도시들은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인도와 네팔의 문화가 공존하거나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 네팔만의 문화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건축물과 이를 장식하던 여러 신들의 형상과 섬세한 문양은 상당히 나를 즐겁게 했다. 특히 짱구나라얀, 황금사원, 루드라바르나 사원에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과 보는이를 압도하는 위압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니 못한 이러한 체험은 지금도 나의 잔상에 강렬하게 남아있어 두고두고 네팔에 대한 이미지로 가장 크게 자리잡을 것 같다. 이는 네팔인들의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산물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같다.
나는 여행지를 선정하는데 있어 상당히 신중하고 무척이나 고르고 고르는 편이다. 정신문화의 위대함이 녹아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나를 유혹한다. 어쩌면 그래서 종교문화의 색채가 강한 곳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번 여행에 선정한 곳이 바로 네팔이었고 여행은 내가 선택한 가장 훌륭한 대안 중 하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네팔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친절함과 순박함은 이 나라를 다니는 나로 하여금 내내 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하도록 해주었고 그들과의 접촉과 교감은 이 번 여행에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다. 이 번 여행의 아쉬움은 음식문화였다. 음식호기심이 많고 향신매니아를 자처하는 나지만 네팔의 음식은 뭔가 독특한 것도 없고 부실함이 속상하다. 나는 핑계김에 나의 평소 원칙과 달리 걸핏하면 한국음식과점과 패스트푸드점을 다니곤 했다. 역시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문화매니아를 자처하는 나지만 찾다가 찾다가 포기한 전통문화공연이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한가지 크게 의의를 두는 것은 오랫동안 별러왔던 놈놈놈들의 트리오 여행이었기 때문이고 함께한 썰렁한 놈과 까칠한 놈에게 감사한다. 특히 썰렁한 놈의 함께함을 허락한 제수씨에게 특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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