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09 네팔

네팔여행6(담푸스→포카라)

코렐리 2009. 7. 31. 09:58

2009. 7. 11(토)

트래킹 마지막 날이다. 오늘 트래킹 구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날 무리를 해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가 넘도록 걸었지만 아침은 상쾌했다. 오늘 이 곳 담푸스를 떠나면 1시간이면 카레에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트래킹 종료다. 아침식사로 구룽과 감자스프를 먹었다. 보기엔 후져 보여도 감자스프 참으로 맛이 좋다. 구룽은 타다빠니의 그 집보단 못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침 식사 후 짐을 싸 떠나기 직전 무심코 먼 산을 보니 구름 사이로 설산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나푸르나 사우스봉인 것 같다. 

 

이 마을 한켠에 트래킹 허가증 검사 사무소가 있었다. 이 곳에서 검사를 마친 뒤 카레를 향해 길을 나섰다.

 

그림같은 하늘과 그림같은 산자락 우물가의 아낙네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카레에 도착한 것이다.

 

마을에서 일부러 조성한 터인지 아님 사유지인지 몰라도 잔디를 깨끗하게 심어 놓은 공간도 보인다.

 

 

 

마을 한 켠을 지나는 버스 정거장으로 나왔다. 6일간의 장정이 끝난 것이다. 짧은 코스였지만 뿌듯하다. 안나푸르나 지역 트래킹은 당초 계획과는 약간 다른 코스로 다녔다. 원래 예정했던 코스는 세간다에 나오는 몇 가지 코스 중 소요일수에 맞춰 계획을 잡았지만 재남씨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금 타이트한 코스로 잡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유는 있었다. 만일 좀 더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면 좀 더 타이트하게 코스를 잡아도 내 체력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고산병은 체력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고도로 올라갈수록 속도는 완만하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다닌 지역은 최고도가 3,100 정도였기에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본다.

 

최초 예정 코스: 나야풀--->티르케둥가--->고레빠니--->타다빠니--->톨카--->담푸스--->카레

차후 변경 코스: 나야풀--->울레리--->고레빠니--->타다빠니--->촘롱--->담푸스--->카레

 

안나푸르나지역 6일간의 트래킹을 결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트래킹 경비는 1일 1,000루피면 숙박비,  음료수비, 물값, 식비 해결이 가능하다. 사실 이 것 빼면 하산해서 영화를 보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으면 산에서는 돈 쓸 일도 없다.

 

비싼 가이드 고용 따위는 안해도 된다.

특히 여름이라면 고도 3,000미터 이하정도의 코스를 다닌다면 포터도 필요 없다.

  

가이드

지도 하나만 사면 끝이다. 트래킹 코스에 난 길은 절대 복잡하지 않다. 그냥 길따라 가면 된다. 가다 보면 군데 군데 이정표도 있다. 오죽하면 혼자서는 등산 못가고 남이 가자면 따라갈만큼 산길에 잼벵이인 나도 가이드 도움 없이 내 판단대로 다녔다. 길을 잘못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 정도다. 가다 보면 수시로 마을과 주민을 만나게 된다. 가던 길이 미심쩍으면 그들에게 물어 보면 된다. 고산족들의 영어실력을 우습게 보고 걱정할 지 모르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트래커들을 상대로 밥벌어 먹고 사는 만큼 영어소통에는 거의 문제가 없다고 보면 된다. 설사 막대기 놓고 "I" 자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해도 지명만 대면 손가락으로 방향을 찔러준다. 말이 필요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산에 관한 내용은 책자를 읽어봐도 충분하다. 뱀도 없고 맹수라고는 흡혈 거머리밖에 없는 이 곳에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일도 거의 없었다. 다니다 보면 일행이 생겼다가 혼자가 되기도 하니 만일 혼자가 두렵다 해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가이드 고용비 의외로 비싸다. 그들은 고학력의 다경험자들이라 포터와는 다른 높은 보수를 받는다. 깊이 들어 가면 길은 더 단순하다. 그래도 가이드 필요하면 고용하셈.

 

포터

여행사나 호텔에서 소개를 받으려고 알아본 가격은 1일 10달러 ~ 800루피 정도(10.3달러)다. 바가지 쓰면 13달러정도. 알고 보면 소개업자는 포터들에게 반토막만 주고 나머진 수수료로 챙긴다. 불로소득에 다름 아니다. 내가 까칠하단 소리를 듣는 것도 이런 상황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직접 수배해 보면 400~500 루피면 가능하다. 그러나 여름에 간다면 포터를 고용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고도에서 기온 급강하로 여름이라 하더라도 파커점퍼와 겨울용 오리털침낭을 챙기라는 트래킹 경험자들의 말을 듣고 평소 내습관과 달리 짐을 바리바리 싸갔지만 현지에서 알아본 바로는 점퍼, 모기향, 침낭 따위는 필요도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짐을 호텔에 맡겨두고 포터도 고용하지 않고 헐렁한 2.5리터 들이 배낭 하나만 매고 다녔다. 포터는 필요도 없었고 급경사의 코스를 다니면서도 어려움을 느껴보지 못했다. 몸이 허약한 재남씨도 자기 짐을 지고 다녔지만 포터를 고용할걸 잘못했다는 식의 푸념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다. 여름 단거리 트랙에 그래도 포터 필요하거든 고용하셈.

 

여름엔 트래킹이 불편하다? 또는 피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이말을 한다면 나는 즉각 물어볼 것 같다. "다녀 봤어?" 나는 물론 여름 이외의 시기의 트래킹은 못해봤다. 게다가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큰코스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다녀본 바로는 이렇다.

 

설산을 보려면 성수기에 가라?

성수기란 여름을 제외한 시기를 말한다. 구름이 워낙에 많아 설산을 보려면 가이드 책자나 경험자들은 구름이 적은 성수기를 활용하기를 권하곤 한다. 하지만 허구헌날 설산을 볼 수 있다면 무슨 감동이 그리 크게 몰려올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비가 억수같이 오고나면 구름에 살짝가려 오히려 신비함이 배가되는 설산의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으니 나라면 더 선호할 것 같다. 유럽 여자들의 얼굴은 궁금하지 않다. 차도르를 뒤집어 쓴 아랍여인들을 보면 어떻게 생겼을까 참 궁금하다. 벌거벗은 설산보다는 살짝 구름을 입은 산의 신비한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비를 피하려면 몬순기(여름)을 피하라?

희안하게도 사람이 다닐 때는 비가 오는 일이 그리 많지 않고 와도 대지를 향해 무식하게 복수의 돌진을 하듯 자유낙하하는 굵은 비는 흔치 않다. 이따금 흩뿌리듯 내리는 부슬비는 오히려 더운 몸을 식혀주니 고맙고 쿨맥스 등산복은 적게 적시고 빨리 마르니 문제될 것도 없다.

 

여름이라 불편한 것들

여름이라 불편한 것은 우선 더위. 하지만 땀이 많이 나긴 해도 다닐만 하다. 또 하나는 트래킹 코스를 도배하는 초식동물들의 떵. 소새끼 노새새끼를 보면 왠수같이 느껴질 정도다. 용케도 난 한 번 밖에 안밟았다. 으하하...! 비에 흥건해진 떵 주변은 밟고 싶지도 않고, 적당한 점도때문에 달라붙은 떵파리들이 드글거리는 곳을 지나가자면 그 개떼같은 떵파리들이 사방으로 웅얼대며 날아 흩어졌다가 부메랑처럼 다시 모인다. 이 때는 그 놈들 중 한마리와 부딛히거나 내 몸에 달라붙을까 엄청 두렵다. 물론 우기인만큼 적당히 말라 비틀어져 불쾌감이 적은 떵은 없다고 보면 정답이다. 이 걸 감당해 낼 수 있다면 여름 트래킹 추천할만하다. 

 

장점도 있던걸?

나는 비수기 여행을 선호한다. 성수기에 인간이 많은 것도 싫고 한국인이 바글거리면 더욱 싫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으면 내세상인 것 같다. 내 세상에 사는 현지인들이 모두 친구로 보인다. 고객이 적으니 바가지를 적게 쓴다. 왜? 싼값에라도 고객을 잡아야 하니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산에서도 적용된다. 전술했지만 비성수기 트래킹 코스에 밥을 팔기 위해 공짜에 가까운 숙박비에 방을 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흐흐흐...~!

 

트래킹 중에 느끼는 감흥

스틱 한 세트만 있으면 아무리 급경사의 연속이라 해도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맑은 공기와 수시로 바꿔가며 보여주는 경치가 걷기만 하는 트래킹의 지루함을 없애준다. 게다가 구름 하나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주변의 경치와 이다금씩 얼굴을 내미는 설산을 생각하면  안나푸르나에서의 트래킹은 강추할만하다. 그러나 트래킹만 하고 가겠다면 남의 취향에 왈가왈가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자칭 문화매니아인 나의 취향상 남의 나라에 외서 문화를 즐기지 않고 돌아 간다면 넘 거시기하다.

 

 어쨋든 우리는 버스 정거장으로 나왔다. 버스 정거장이라는 개념도 사실상 없다. 우리네와 달리 중간에도 손을 드는 사람이 있으면 태우고 내릴 사람도 없고 탈 사람도 없으면 그냥 계속 간다. 택시 기사 한 명이 방금 코스를 마치고 나온 우리에게 수작을 걸어왔는데 수작치곤 구미가 당기는 괜찮은 수작이었다. 500루피에 포카라까지 모시겠단다. 나는 버스를 탈거고 택시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사실 이건 정말로 싼 값이다. 그 택시기사는 트래커를 내려 놓고 어차피 여기서 포카라로 돌아가야 하는데 빈차로 가느니 그나마 건져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런게 비성수기의 중요한 매리트 중 하나다. 좀 이따 그 택시기사는 400루피에 포카라 레이크사이드까지 모시겠다며 수작의 수위를 높여왔다. 역시 거절했다. 대중교통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대로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왠지 재남씨는 택시를 타고싶은 눈치고 핑계김에 시계를 들여다 보니 공항에 10시까지 도착하기엔 빠듯하거나 시간이 약간 부족해 보였다. 나는 흔쾌히 택시 기사를 불러 택시에 가진 짐짝과 함께 덜렁 몸을 실었다.  

택시를 타고 포카라로 가면서도 볼만한 경치는 계속 이어졌다. 호텔에 도착한 직후 김재남씨는 먼저 내리고 나는 다시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 기사와 공항까지의 요금 협상을 시작했다. 레이크사이드와 공항간의 택시요금은 죽었다 깨나도 200루피였다. 가까운 거리인데 그리 비싸야 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장거리를 타고 왔으니 씨가 먹히지 않을까싶어 100루피에 수작을 붙여 봤지만 택시 기사의 대답은 "여기까지 오는데 나는 손해를 감수하며 당신들을 싣고 왔다. 더 이상은 안된다"는 식이었다. 사실 우리가 타지 않았으면 빈택시로 오려던 참이었으면서 웃기는 소리를 한다. 나는 새로 택시를 잡고 새로 협상을 하기가 귀찮아 그대로 눌러 앉아 공항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기준엔 트래킹이 끝나고도 옷도 안갈아 입고 짐까지 맨 채 직행한 덕에 시간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지연된 9시 비행기를 탈테고 내 경험으로 비추어 빨라야 9시 30에 출발한다고 가정하면 10시는 되어야 찬바람과 뜀도령이 도착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1시가 넘도록 웬수들의 낯짝은 고사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까지도 오지 않으니 이상했다. 전화를 하자니 공중전화도 없어(네팔 여행 내내 공중전화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과 국제전화 서비스를 하는 가게로 가야 했다) 당장 올게 아니라면 밥도 먹어야 하니 일단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뜀사진)

 

우선 하루 묵고 짐을 맡겨 두었던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잠지리에서 뭔가가 나를 물어 뜯는 방과 욕심 많은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트래킹 가느라고 일부 덜어내 맡겨 두었던 짐을 찾아 더 묵을 것도 없이 나왔다. 여기만 그런건지 다른 곳도 그런지 몰라도 짐 보관료를 하루 20루피로 계산해 120루피를 받았다. 이제까지 내가 여행을 다녀본 바로는 투숙객이 짐을 맡기는 것 정도는 걍 서비스로 해줬다. 계속 묵지 않을 핑계꺼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가지가지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좀 있었다. 만일 서로 엇갈려 공항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면 바로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 곳을 나가면 찬바람과 뜀도령하고는 또 한 번 엇갈릴 수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엇갈리면 수시로 이 곳에 와서 알아보면 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들이 여기에 체크인을 해버린 상황이라면 배신자 소리를 들을게 뻔했다. 그래도 나는 짐을 찾아 들고 김재남씨가 욕실 딸린 방을 200루피(물론 깎은 값이다)에 묵고 있다는 포카라짱으로 가봤다.

 

정원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고 인상 좋은 주인장은 친절하고 깎아달란 고객의 요구에 비교적 잘 넘어가 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집도 문제는 좀 있었다. 다음 날에야 알았지만 음식물이나 음료수를 개방한 채 방치하면 개미가 새까맣게 몰려 들어 긴 행렬을 이루며 음식물을 나르는 모양새가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딸린 방과 욕실은 아주 깔끔했다. 그건 그렇고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뜀도령은 여행중에 전화를 받아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휴대폰 로밍을 해온다고 했고 찬바람도 업무상 전화를 로밍해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제전화 서비스가 가능한 여행사를 찾아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두인 간 모두 연결이 되지를 않았다. 최근 추세가 그런지 여기서만 그런지 휴대폰은 국제전화 인식번호인 00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00을 빼고 국가번호 82로 시작을 했지만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행사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가 보니 재남씨가 마실 나갔다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재남씨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가진 휴대폰으로 찬바람의 휴대폰(뜀도령의 까칠한 태클: 내가 뜀도령에게 문자를 넣었었단다)에 문자를 넣은 것이다. 찬바람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전화해 간신히 통화를 하고 나서야 13:20분 발로 카투만두를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륙시간 지연을 고려해 오후 세시쯤 가려고 했다가 혹시 모르니 시간 맞춰 나가라는 재남씨의 권유를 따라 1시 30분에 공항에 도착해 기다렸다. 

사실 이들과 연락이 닿기 전 나는 별놈의 공상을 다했다. 항공권 구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을텐데 표를 못구했을리는 없고 이 인간들이 포카라로 오는 비행기를 놓쳤나? 혹시 카투만두 도착도 하기 전에 도하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를 놓치고 아직도 도하에서 다음 비행기를 수배하느라고 헤매고 있는거 아닌가? 혹시 그래서 로밍했을 전화도 연결이 안되는건가? 혹시 찬바람이 뜀도령을 꼬드겨 경비 절약한답시고 버스를 타고 오는 중인가? 아~~~! 이 것들이 짐 머하능겨? 두 시가 조금 못되어 도착하는 비행기를 혹시나 하고 활주로 쪽으로 들여다 보았다. 저 안쪽으로 두 웬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타고 왔던 비행기와 달리 그들이 타고 온 항공기는 구나 항공사의 것이었다(이름 참 구리다) 안반가왔다고 하면 거짓말인거 다알테고 솔직해지자. 낯짝들을 보니 더럽게 반가왔다. 철없는 뜀도령의 첫마디 "상철아~~~!" ---> 지길롬.

까칠한 썰렁함의 포스가 느껴진다.

 

나는 이들과 택시를 타고 레이크사이드로 돌아와 아직까지도 점심을 안먹었다는 이들을 데리고 티벳식당으로 갔다. 뗀뚝과 모모를 시켜 놓고 산 미구엘 맥주로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뜀도령이 이 번 여행을 놈놈놈들의 네팔여행이라 나름 명명하고 자료를 조사해 만든 자신의 참고용 여행책자에 찬바람과 나의 사인을 요구했다. 이미 사인할 자리 세군데를 마련해 놓았다. 각각의 자리에는 까칠한놈, 썰렁한 놈, 괜찬은 놈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까칠한 놈의 자리에는 나의 사인을, 썰렁한 놈의 자리에는 찬바람의 사인을, 괜찮은 놈의 자리에는 제가 사인을 할거라나? 춴, 세상에 팔일동안 삶은 호박에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쉰소릴 해도 유분수지. 찬바람이 썰렁한 놈인건 맞지만 나보고 까칠한 놈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천지에 나를 아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동의를 하겠나. 찬바람은 그래도 착한데다 썰렁함이 천성이라 마지못해 가운데 자리인 썰렁한 놈에 사인했다. 이 번엔 내가 사인할 차례였다. 역시 뜀도령은 조낸 치사했다. 손으로 괜찮은 놈 사인할 자리를 손으로 가리고 사인하란다. 결국 보이는건 찬바람이 사인한 썰렁한 놈과 아직 사인이 안 된 맨 위 까칠한 놈 자리뿐이었다. 이런 저질이 있나. 이건 80년대 군사정권시절 병사들의 부재자투표에 장교들이 개입해 손으로 가리고 여당의 칸만 남겨놓고 투표하라고 하던 암흑기의 그 행위와 뭐가 다를게 있나.

순식간에 맥주를 마시던 테이블은 책자 쟁탈전의 장이 되었다. 아니, 쟁취의식을 발휘한 내가 군부(뜀도령)에 맞서 외로운 민중투쟁을 전개해 책자를 쟁취했다고 봐야 옳았다. 나는 투쟁끝에 달콤한 민주화를 이루듯이 맨 아래칸 괜찮은 놈 자리에 사인했다. 이제 남은 자리는 까칠한 놈 뿐이었다. 뜀도령은 역시 군사정권만큼이나 치사했다. 이제 하나 남은 까칠한 놈 자리에 사인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맨 아래쪽에 사인을 해놓고는 밀려서 사인된 거라나? 이 인간은 이럴때만 기발하게 머리를 쓴다니깐.

그 논리에 따르자면 찬바람은 까칠한 놈, 나는 썰렁한 놈, 지는 괜찮은 놈이 되는 셈이다. 나는 '밀려쓴 답안이 100점 나오는거 봤냐'며 뜀도령을 성토하고는 맨아래 사인한 뜀도령의 사인과 맨 위 까칠한 놈 자리를 화살표로 연결해 그리려고 했다. 물론 이 답안으로 100점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눈치 빠른 뜀도령은 책을 빼앗아 가방에 넣어 버렸다. 역사왜곡하는 일본인같으니라구. 날치기 법안이나 통과시키는 날라리 정치인같으니라구. 에이~~~!  ㅡ,.ㅡ;

 

열받아서 맥주를 추가주문 했더니 냉장된 산 미구엘이 없단다. 가는 곳마다 그 나라의 맥주는 꼭 먹어보는 나는 이 기회에 네팔 맥주를 먹어 보잡시고 네팔맥주인 아이스버그를 주문했다. 의외로 독특하고 맛이 좋은 맥주였는데 맛대가리 없는 TUBORG보다는 백번 낫다.

 

뒤이어 안주삼아 나온 모모와 식사로 나온 뗀뚝에 이들은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낮술로 달근해진 우리는 레이크사이드 주변을 슬슬 산책하기로 했다. 비가 덜어지기 시작했다.(뜀사진: 이하 출처 생략) 

 

사진 찍겠다고 특이한 포즈를 취하는 찬바람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똥침을 찌르는 뜀도령.

 

곧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수퍼로 들어가 알콜결핍증을 해결하기 위해 맥주를 하나씩 물고 나와

 

돌아다니기를 계속했다.

 

나는 이들이 도착하기 전 트래킹에 썼던 스틱을 반납하고 보증금 640루피를 돌려받기 위해 대여했던 집에 갔었다. 주인 아줌마는 전화를 어디엔가 걸더니 돈을 남편이 갖고 있으니 세 시간 뒤에 다시 오란다. 마침 그가게를 지나치던 중이라 가게에 들러 보증금을 환불받았다.

 

비를 있는대로 맞고 있는 까칠한 인상의 소 한마리.

 

맥주 안주가 필요했을까. 구운 옥수수를 입에 물고 맥주 한 잔 더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사랑방처럼 모인다는 산촌다람쥐를 찾아갔다.

 

가자마자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나와 찬바람더러 팔 두개를 앞으로 내밀어 네개를 만들란다. 네팔을 찍겠다나? 안해줬다간 까칠한 뜀도령한테서 무슨 보복이 날아올지 몰라 찬바람과 나는 순순히 응해줬다. 이게 네팔 사진이야? ㅡ,.ㅡ;(뜀사진)

 

기다리던 김치찌개가 나왔다. 찌개 맛이 아주 좋고 밑반찬도 외국에서 먹는 것 치고는 흠잡을데가 없었다. 우리는 한식 반찬에 맥주를 마셨다. 소주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이 곳의 전통주라는 술을 먹어봤다. 맛은? 뷁!

 

뒤이어 주문한 감자전. 이 것도 맛이 아주 좋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또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 보니 산촌다람쥐에서 만났던 인수군이 밖에서 카페를 지나고 있었다. 대학 3학년인 그는 혼자 여행을 와서 릴렉스한 일정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심심해서 산책하던 참이라고 했다. 사실 인수군은 산촌다람쥐에서 처음 만난건 아니었고 낮에 자전거를 반납하던 그를 보고 대여료가 얼마인지를 물어본 것이 첫 대면이었고 산촌다람쥐가 한국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한다는 것도 이 때 알았다.

 

내가 취하기 시작했나? 이게 뭔짓?

 

인수군이 합세하여 내 방에 모여 또 술한잔했다. 밖에는 비가 아직도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담날 아침 사랑콧에 가기로 했고 교통수단은 인수군이 수배하기로 했다.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모두 흩어지고 나는 아침에 인수군이 수배된 차량을 끌고 와 나를 깨울 때까지 세상 모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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