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13(월)
아침 느즈막이 일어난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른 음식을 먹기로 했다. 고산지대를 다니며 맛있게 먹었던 구룽을 찬바람과 뜀도령에게 맛보여 주고 싶었다.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구룽이 메뉴로 나와 있는 집이 없었다. 고산지대에 흔히 보던 구룽은 도시 내에선 맛보기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아래의 집에서 구룽이 있는지 물어봤다. 메뉴에는 없지만 만들 줄 안다고 하는 대답이 왠지 미덥지가 않았다. 메뉴에 없다면 그다지 잘하는 음식이 아닐거라는 선입감이었다. 내 보기엔 쥔장이 구룽족도 아닌 것 같고...
제법 맛은 있지만 약간은 다른 맛이다. 우리는 구룽 2개씩에 밀크티 한 잔씩을 아침식사로 해결했다.
아침을 먹고 나와 자전거를 빌렸다. 하루 대여경비가 100루피라고 한다. 우리는 인수군이 정보를 준대로 80루피로 우겼다. 석 대의 자전거를 빌린 우리는 하나씩 타고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남쪽에 볼거리가 밀집되어 있기 때문인데 대중 교통은 기다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헤매기도 귀찮아 지도를 봐가며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자전거로 레이크 사이드와 마을 구석진 곳까지 쑤시고 다니는 기분은 여간 좋은게 아니었다.
비 온 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은 이따금 수영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보일만큼 깨끗했다. 우리는 포장이 되지 않아 툴툴거리는 도로 위에서 마을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대로로 나오니 거의 마을 끝이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은 일본인 승려들이 세웠다는 평화의 탑이었다. 포카라의 남쪽 끝이라 생각되는 곳에 도달하자 이제부터는 경사진 길이 나왔다. 이상하게 찬바람과 뜀도령은 수월하게 잘들 올라 가는데 나만 낑낑대고 있었다. 이런 젠장. 두 사람은 자동 변환 기어가 장착된 자전거였고 나는 그런게 없었다. 그러니 오르막이 순탄할리 없지. 나는 그런것 정도는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을 줄 알고 뒷쪽에 가방을 싣고 다니기에 좋은 놈을 고르는데 여념이 없었으니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또는 올라 타고 경사진 길 한 참을 올라 발견한 더욱 골때리는 상황은 평화의탑 입구로부터 샛길로 툴툴거리는 비포장 급경사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갖고 있었고 잠금장치가 있었지만 도난의 우려때문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올라가면 될 줄 알았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지루한 코스였고 게다가 뜀도령과 나는 쪼리를 신고 있어 꼭지가 떨어져 나가 쓸모없게 되면 심각한 상황이 되는 관계로 우리는 쪼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힘이 들고 자전거를 왜 빌렸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름 상당한 재미가 있었다. 뜀도령은 여행때문에 느끼는 운동부족을 해소한다며 좋아라 했다. 아이들이 몰려와 돈을 조금만 주면 자전거를 보관해 주겠다고 한다. 내가 느덜을 뭘로 믿냐. 글구 끌고 올라가는게 힘들긴 해도 재미가 있던 터였다. 한참만에 평화의 탑 꼭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수 없을만큼 급경사였다. 용케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려 올 때는 더 위험하고 더욱 고단한 상황이 될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바로 아래 가게방에서 음료수 한 병씩을 사먹고 자전거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뒤 걸어서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
페와호가 내려다 보이고 레이크사이드의 북쪽이 내려다 보였다. 눈에 보이는 거리는 이렇게 가까운데 오는 길은 어지간히도 멀었다.
정문을 보니 일본산불법사라고 쓰여 있다.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일본 승려들이 세웠다는 이 스투파는 불교의 4대 성지 즉
이시파타나
쿠시나라
부다가야
룸비니
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세사람의 단체사진을 찍느라 잠시 내려 놓은 수첩을 아예 내려 놓고 잊은채 돌아오는 통에 그동안 적은 일지를 통째로 날려먹었다. ㅠㅠ 나쁜 사진. 속상해서 안올렸다. 의욕을 잃은 그 뒤로 여행일지를 쓸 생각을 접어버렸다. 주변은 잔디를 심고 화초를 가꾸어 예쁘게 조성했다.
아래쪽에서는 무슨 난꽃인지 고운 자태를 뽐냈고
저 아래로는 그림같은 페와호를 담고 있었다.
생고생까지 해가며 오르던 때와 달리 그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내려 오는 길은 신이 났다. 하지만 워낙에 포장이 되지 않고 돌부리가 많은 탓에 펑크라도 날까 무척 조심스러웠다. 내려가다 발견한 것은 더이상 내려 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는 두 대의 차량이었다. 앞차는 우리가 낑낑대며 여유있게 올라가던 흰 찝차였다. 우리가 아직도 자전거를 끌고 낑낑대고 있을 때 이 차는 이미 볼 일 다 보고 내려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참 전에 본 바로 그차가 여기에서 승차자들을 내려 놓고 껄떡거리는 중이었던 것이자. 앞차에 문제가 생겨 더 내려가지를 못하니 뒷차까지 운신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가 일보고 내려가던 차보다 먼저 내려가며 회심이 미소가 지어지는걸 보면 나도 참 못됐다. 거의 입구의 경사진 대로로 나와 쉬면서 차갑게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다. 등산화를 신은 찬바람이 여기서 쬐매 부럽눈치. 잠깐 휴식을 가진 우리는 다시 아스팔트의 경사진 길을 내려 타실링 티벳 난민촌을 가보았다.
마을 한가운데 큰 나무가 그늘을 제공하고 난민촌 아낙과 아이들은 그 곳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 곳에 물소 두마리가 어슬렁거렸다. 나도 나무 그늘에 가서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자니 노인 한 분이 옆으로 다가와 영어로 내게 말을 건네왔다. 있는대로 꼬부라진 혀에서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헤롱거림에 과한 낮술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착한 나는 무슨 말씀인지 계속 되물었지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이따금 뒤쪽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답답했던지 영어로 통역아닌 통역을 해준다. 그 순간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물소 두마리 중 덩치가 이따만한 놈 하나가 지나가다 말고 고개를 우리 쪽으로 갑자기 돌려 쳐다 보는데 해꼬지를 하고 싶어하는 듯한 눈빛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몸은 젖은데다 이물질이 잔뜩 묻어있고 방금까지 하다 되새김질을 멈춘 주둥이 주변은 허옇게 침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더욱 심상치가 않은 것은 나무 아래 모여 있던 아줌마와 아이들은 훠이훠이 쫓으려 해도 꿈쩍도 안하고 더위를 피하던 사람들을 아직도 빤히 쳐다보고 있고 사람들은 여차하면 소를 피해 뜨려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소가 하는 양을 주시했다. 소의 횡포가 무서운게 아니라 이놈이 덤비면 그녀석 몸에 묻은 이물질이나 주둥이에 허옇게 도배된 침이 입고 있는 옷과 노출된 피부를 영락없이 버려놓을 터였다. 이거 보통 악동(아니 악우라고 해야되나?)이 아닌것 같다. 나를 포함해 숨죽이며 소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사람들을 무시하고 언제 그랬냐는듯 이 놈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나중에 이 마을을 나갈때 싸이코같은 이 소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마침 제 대가리로 남의집(주인의 집인지도 모르지) 담벼락을 들이받아 무너뜨리는 괴력을 뽐내는 우끼는 놈이었다. 넘어진 담벼락을 보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한마디 소한테 하신다. "아이구 이놈아 이게 뭐하는 짓여?"(말투로 봐선 아마도) 이 마을에선 아무래도 요주의 인물 아니 소였던 것 같다. 소가 존중받는 나라의 깡패가 적절한 이름이 될 것 같다.
한 쪽에서는 집 밖에 나와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를 하시는 할머니의 경건한 모습도 보인다.
우리는 자리를 떠서 불탑이 보이는 곳으로 가봤다.
사각으로 담벼락이 둘러쳐져 있고 그 벽을 따라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마니차가 돌려보고 싶어졌다. 마침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오른쪽으로 도는지 왼쪽으로 도는지를 물었다. 왼쪽으로 돌으라며 시범을 보여 주었다.
나도 해봤다. 울 세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바퀴 또는 두 바퀴씩 마니차를 돌렸다.
뜀도령이 찍은 동영상
우주의 오원소를 상징한다는 다섯가지 색깔의 깃발 타르초.
이상하게도 이 타르초가 심오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너무나도 좋다.
마을을 나오다가 곰파를 하나 발견했다. 한국에서도 사찰만 보면 반듯기 들러보는 난데 당연히 들어가 보았다.
한 스님이 보내주는 사인에 따라 2층부터 올라가 보았다.
2층엔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이것을 만다라라며 보여 주는데 나는 만다라가 셈세하게 그려진 불화를 말하는건줄 알았는데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도 만다라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약간의 헌금(?)을 놓고 나왔다.
자그마한 부처와 보살의 상이 여기 저기 있다.
우리와 문화가 다르면 다를수록 열광하는 나로선 한국의 사찰에서 볼 수없는 독특한 형상과 분위기에 감격했다. 남들이 보면 내가 불교 신자인줄 알겠군. 어쨋든 이후 카트만두로 돌아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곰파(티벳불교의 절을 곰파라고 부른다)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어김없이 모셔진 달라이 라마의 사진
벽에 걸어놓고 금빛 커튼을 드리운 탱화.
나올 때 우리를 보며 미소짓는 스님의 인상이 편안하다.
시장기를 느낀 우리는 마을 입구 과일가게에서 토마토와 바나나를 사서 그자리에 주저 앉아 요기를 했다. 오전에 아점을 먹었으니 이건 점저인 셈이다. 저녁 식사를 위해 일부러 부담이 없는 과일로 배를 채운 뒤 다시 데비의 폭포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확실한건 이 곳에서 데비의 폭포까지는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혹시라도 지나쳐 버릴까봐 수시로 길을 물었다. 사람들 말로는 오른쪽 시장통 골목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런 시장통에 무슨 폭포가 있을지 의아해 뭔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건가 했다. 시장통 쪽으로 들어가 보니 그제서야 이정표가 보인다. 어이가 없다. 바깥에 이정표를 크게 설치해도 모자랄 판에 시장통 깊숙한 안쪽에 붙여 놓은 이정표의 꼬라지 하고는...
입구에서 표를 샀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시바신전이 있고 여기까지 들어가는 것은 40루피이고 동굴을 더 들어가 데비의 폭포를 보자면 100루피를 더 내야 했다. 표를사서 들어가는 중에 가네쉬 신상을 만지며 사진을 찍는 아낙이 있어 공짜로 슬쩍 붙어 찍었다.
지하에 시바신의 신전이 있지만 별 볼품은 없었다. 동굴엘 들어가면 시원할 줄 알았던 우리는 후덥지근하고 여기저기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습한 공기에 오히려 불쾌감이 느껴졌다. 과연 이 동굴 안에 있는 데비의 폭포는 어마어마했다. 동굴로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물은 다시 지하로 통로가 연결이 되는지 곧바로 벌꺽벌꺽 들이키는 모양새에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압도되고 말았다. 이 물에 빠져 휩쓸리면 물과 함께 곧바로 더 깊은 지하로 물과함께 휩쓸릴 위험한 곳인데 난간같은 안전장치는 전혀 없었다. 스릴을 만끽하라고 일부러 배려한건가? 감사합니다요.
뜀도령이 동영상을 찍었다.
이 곳에서 나온 우리는 표를 사기 봐 두었던 기념품 가게로 가서 흔히 보이던 네팔식 카우보이 모자 가격을 다시 물었다. 사실 이미 물어본 값은 200루피였다. 사실 레이크 사이드만 벗어나면 물가가 싸다. 레이크사이드에선 250 또는 300루피를 불렀다. 나는 3개 살테니 얼마에 줄건지를 물었다. 깎는 시늉만 하길래 개당 150루피로 우겼다. 안된다길래 포기하고 가는 시늉을 하니 붙잡는다. 못이기는 척하고 사줬다. 카우보이 모자는 얇은 섬유 두 장 사이에 폴리우레탄으로 보이는 재질의 얇은 막을 겹쳐 박음질을 했다. 엉성하지만 모양새는 그런대로 쓸만했다. 스타일은 미국식과는 거리가 좀 멀고 호주식에 가까웠다. 레이크 사이드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산촌 다람쥐로 갔다. 좀 더 다양한 네팔음식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뜀도령은 "형하구 많이도 다녀봤지만 이 번 같이 한국음식을 많이 먹어몬 것도 처음이라"며 찬바람한테는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했더니 싱거워졌다나? ㅍㅎ
외국에서 먹는 한국음식 치고는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다. 외국에선 제 맛을 내는 한국음식을 만나기는 정말 어려운데 특히 이집트 바하레이아 사막에서 먹었던 된장국 백반의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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