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12(일)
이른 아침이었다. 전 날 한 잔하며 약속했던대로 인수군이 사랑콧 코스차량을 수배하여 나를 깨웠다. 사실 잠결에도 '오늘 아니면 사랑콧 못갈텐데' 하면서도 전날 낮부터 시작해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신 술이 과했는지 일어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인수도 술에 거시기해서 그냥 퍼져 자면 나도 그냥 핑계김에 퍼져 잔다며 잠결에 중얼거릴만큼 나도 비열했다. 오면 와서 좋고 안오면 안와서 좋고. 그런 순간에 인수군이 문밖에서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희안하게도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는대로 찬바람과 뜀도령이 자는 방으로 쫓아가 그들을 깨웠다. 그들도 일어나기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충 씻고 대충 카메라와 우산 등을 담은 가방을 수습한 뒤 차량에 탑승하고 보니 현지인 신혼부부 한커플이 이미 타고 있었다. 차량은 인수군이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의 차량이고 운전기사는 바로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었다. 대략 1인당 150루피였던 것 같다(200루피였나? 가물가물). 이 때 까지만 해도 사랑콧까지의 편도 요금인 줄 알았다.
6명을 태운 고물찝차는 포카라 북쪽 끝까기 도달한 뒤 꾸불꾸불 만만찮은 경사를 길길거리며 기어 올라갔다. 경사는 천천히 걸어서 올라도 될 정도였지만 차량 없이 오르자면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할 거리였다. 이걸 걸어올라 가면 어떨까 생각했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반갑지도 않게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다. 순간 왜 여길 오르는지 망연자실까지는 아니어도 허무함이 밀려왔다. 보자고 올라가는건데 천연 안대가 눈을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는 차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올라 손님들을 내려 주고는 잠시 후 다시 내려갈테니 멀리가지 말란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요금이 편도인줄 알고 있다가 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 아냐? 어쨋든 이 곳이 정상인줄 알았던 나는 이 곳에서 좀 더 올라가야 전망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랑콧에 오르는 이유가 있는건데 이 곳까지 와서 전망대도 올라가보지 않는다면 총알 맞은것도 아닌데 뭐하러 쓸데없이 돈을 내고 여기까지 오겠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닌만큼 신혼부부의 양해를 구해야 한단다. 지랄을 하셈. 우리는 신혼부부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선뜻 1시간 뒤에 출발하는 것으로 조정하는 데 동의했다. 신혼부부와 뜀도령은 남고(당시 뜀도령은 아마도 똥이 마려워서 등산욕을 잃은 것 같다. 틀림 없을걸 아마) 나와 찬바람 그리고 인수군은 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구름은 점점 더 자욱하게 끼어 설산은 볼수 없었고 기타 다른 것도 아예 안보였다.
그저 하얗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보자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전망대에는 일단의 서양인 여행자들이 아무것도 없는 이 곳 사랑콧 전망대에서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다가 내게 단체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한다. 찍어줬다. 우리들 보고도 찍어줄테니 포즈를 잡으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배경은 모두 똑같다. 걸터앉아 걍 찍어봤다. 사진이 예상과 똑같이 나왔다.
바로 아래에는 다 쓰러져가는 힌두교 사원이 하나 있었다. 시바신인가?
볼게 없으니 올라가서 사실 잠깐의 시간만 보내고 바로 내려왔다. 기다려도 구름이 걷힌다거나 할 조짐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1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신혼부부는 이 곳에서 내려가면 장거리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차시간을 놓쳤다고 한마디 하더라는 뜀도령의 말을 듣고 나니 전망대 오를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 여긴 뭐하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없는 사람이 껴들어 다른 사람들까지 자기 시간에 맞추길 바라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뒤로 차를 놓쳤네 어쩌네 하는 일 없이 우리보고 밀크티 한잔씩 살테니 마시고 내려 가자는 말을 하기에 고맙지만 사양했다. 이유도 없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한테 얻어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셋이서 단체사진 찍자니까 까칠한 뜀도령 좀 봐라. 이 뜀도령아. 그러니까 까칠하단 소릴 듣는거야. 알간?
밉살맞은 운전기사에게 겪어도 싼 벌이 내려졌다. 레이크사이드로 거의 되돌아 왔을 무렵 바퀴에 펑크가 난 것이다. 우리의 반응 대부분은 '그러게 맘을 곱게 쓸일이지'였다. 이 곳 차량의 타이어들은 안전이 문제가 아니라 써먹을 수 없을 때까지 써먹는지라 빵구 날 때도 이미 지난듯한 타이어였다. 우리는 타이어 갈아끼우고 자시고 하는 것을 기다리기도 싫어 걸어서 가기로 하고 신혼부부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기사에게 당초 요구했던 금액을 줬다. 펑크난 타이어에 본전생각이 났던가 보다. 이 듣보잡 하는 말이 전망대 다녀오는걸 기다려 주었으니 200루피를 더내라는거였다. 무시하고 걍 가자고 했더니 인수군은 자기가 묵는 호텔 사장인만큼 정리를 해야겠단다. 인수군과 나는 듣보잡을 공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심 쓰는셈 치고 100루피를 더 주겠다고 했다. 더 이상을 원하면 한 푼도 없으니 알아서 하라며 돈을 주니 못마땅한듯 받아든다. 받아도 싼 벌받고 우리한테서 본전을 뽑겠다는 심산이 으째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하다.
티벳식당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식당의 꽁치 김치찌개가 맛있다는 인수군의 말을 듣고 그리로 함께 가서 식사하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재남씨한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한 번 가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꽁치로 김치찌개를 끓이는데 어떻게 맛이 있을수가 있을지 도대체가 궁금했다.
그깟 김치찌개 하나 갖고 많은 의문점을 가졌던 나는 그래도 배도 고프고 밥을 먹어야 술도 빨리 깨니 눈이 빠져라 밥이 나오길 기다렸다. 주인이 밖에서 꽁치통조림을 사온다. 그로부터 한참 뒤 김치찌개가 나왔다. 생긴걸 봐도 도대체 맛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 술 떠서 입에 넣자마자 인수군이 물어본다. "어때요 형님?" "응 괜찮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맛은 내가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물론 칭찬은 아니다. 그래도 국물이 필요한 나로선 뻘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에 주는 자극은 짜르르하니 나쁘진 않았다. 걍 그맛에 먹었다. 얼큰한 국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해 하면서... 이게 아점이었다.
어차피 이 곳 포카라에서는 릴렉스하기로 했으니 그리스에서 했던 시에스타를 즐기고 나서(참, 오전에 하는건 시에스타가 아니었지?) 뱃놀이를 하기로 했다. 인수군은 그땐 자기도 불러달라며 자신이 묵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다 뜀도령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갑자기 멈춰섰다. "엇, 내 카메라" 식당을 향해 황급히 달려가는 뜀도령의 앞모습은 못봤지만 허둥지둥 달려가는 뒤통수만 보고도 놀란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뜀도령이 저멀리 사라지자 갑자기 찬바람이 내게 뭔가를 건네 주더니 피식 웃으며 나의 사정거리로부터 벗어나 숙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게 건네준 물건은 뜀도령의 카메라였다. 나는 뜀도령의 신경질이 두려워졌다. 나는 찬바람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찬바람도 바보가 아닌 이상 카메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예라 이 비열한 찬바람아. 나는 결국 뜀도령의 카메라를 찬바람에게 돌려주고 뜀도령의 까칠한 마수를 피하는덴 성공했지만 지난 겨울 레바논에서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구선 그나마 하나 남은 선글라스를 실갱이 와중에 해먹고 말았다. 뜀도령의 까칠한 뎅뎅거림이 유일한 찬바람에 대한 보복인데 밋밋하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럼 난 뭐야. 징징~~!
숙소로 돌아오자 빨래 겸 샤워를 하고 나서 젖은 빨래를 널었다. 전날 술먹고 술 덜깬 몸상태를 조절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일단은 퍼질대로 퍼져 잤다. 자고 나니 오후 두 시 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찬바람과 뜀도령을 깨웠다. 일어나기 싫어하는 뜀도령을 강제로 일으켜 인수군이 묵는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는 인수를 구박하며 끌고 나와 바하리 사원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 보았다. 왕복 20루피
뜀도령의 별로 친절한 브리핑에 의하면 이 사원은 전설이 있다.
전엔 이 곳이 호수가 아니고 마을이었단다. 시바신이 거지로 현신해 마을을 다니며 구걸을 했단다. 거지가 시바신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마을 주민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한 노부부만이 그를 극진히 대접했단다. 노한 시바신은 이 마을을 떠나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노부부가 마을을 벗어나자 물난리가 나 마을 이 잠겨버렸고 이 곳 페와호는 그렇게 생겨났다. 이 바하리 사원은 시바신을 기리기 위해 노부부가 세웠다고 한다. 왕족도 이 사원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던가? 아니던가? 아님말구.
사원의 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그다지 볼품있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배를 타고 들어오는 곳이니 핑계김에 함 들러볼만하다.
단체사진에 꼭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뜀도령. 물에 확 빠뜨릴려다가 물귀신모냥 붙잡고 같이 들어갈까봐 참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푸라노 바자르가 있는 포카라 북부로 가봤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삼거리. 이 곳은 오가는 사람과 쉴 새없이 크락션을 울려대는 자동차 그리고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통이 정신없이 혼잡하지만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너절하게 때가 뭍고 켜켜이 먼지가 쌓인 삼성전자 광고판도 보인다. 뜀도령의 브리핑에 의하면 이 시장은 티벳 등과의 교역을 위해 형성된 오래된 시장이라고 한다(찬사진: 이하 사진출처 생략)
물건값은 확실히 여행자들로 바글거리는 레이크사이드보다는 값이 쌌다. 쪼리 한켤레의 값을 물어보았다. 150루피(2달러 정도)란다. 100루피에 달라고 했더니 한사코 안된단다. 100루피를 쥐어주고 선수쳐서 고맙다고 했더니 웃으며 봉지에 슬리퍼를 담는 모습을 찍었다. 자기네 언어로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다. "있는 놈이 더 무섭다니깐"---아마도.
시장 끝자락까지 가면 그 곳부터는 전통 양식의 집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여기서 사진을 찍으며 마을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옥수수를 말리는 빈 가게터 앞에 인형을 들고 선 아이.
가네쉬 신전
신전 주변에 카메라가 신기한지 몰려온 아이들. 이마에 티카를 찍었다.
이 아니는 이마에 티카가 없는걸 보면 불교신자인듯.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는지 열쇄를 목에 걸고 있다.
전통가옥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아저씨.
안쪽으로 여닫는 전통가옥의 창문이 재미있다.
지나가다 만난 신전에 카메라를 들이대니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포즈를 잡는다. 안찍어 줬다간 섭섭할 눈치다. 카메라를 아이에게 다시 들이대니 뭐가 그리 흐믓한지 미소가 푸짐하다.
길가에 재봉질을 하던 아줌니.
동생과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한 가겟집 아이. 동생은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지 숱이 많지 않은 머리는 맨질거리고 머리카락은 떡이 졌다. 나의 첫 돌에 형과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친절한 약도가 가는 곳마다 있음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가고자 했던 빈디아바시니 사원의 위치와 우리가 선 자리가 표시되어 있어 손쉽고 기분 좋게 찾아갔다.
이건 길가다 본 작은 사원이다.
빈디아바시니 사원 바로 앞에서는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과 아버지의 행복한 모습. 허락 받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아이들이 달려와 부록으로 찍혔다.
빈디아바시니 사원 바로 앞에는 불교 사원이 하나 있었지만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쳤다.
빈디아바시니 사원은 죽음의 신인 두르가를 모신 사원이지만 두르가 외에도 비쉬뉴와 크리슈너를 모신 사원도 각각 자리를 잡고 있지만 사원 하나하나는 그다지 특징적인 모습은 없는 듯하다. 이 사람은 브라만인 것 같다.
사원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웬 마을 아낙네들이 줄을 지어 몰려 다녔다. 그 뒤에는 자그마한 용달에 울긋불긋 장식을 했고 짐칸에는 할머니들이 타고 있었다. 트럭의 뒤쪽에는 남자들이 줄을 잇는다. 문화체험과 현지인과의 교감을 여행의 첫 번째 목적으로 삼는 나와 뜀도령은 뭔지도 모르고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이 용달을 중심으로 한 행렬에 들어 춤을 추며 흥겨워했다. 나도 따라 춤을 추며 이게 무슨 행렬인지를 물었다. 트럭에 타고 계신 할머니의 88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잊혀져가는 공동체 의식이 여기서는 아직도 빛을 발했다. 나와 뜀도령은 좋아라 같이 놀고 있는데 찬바람은 멀찍이서 눈만 끔뻑였다. 멋들 하능겨 남의 일에 껴서?--- 아마도
외국인이 껴들어 같이 춤을 추니 그들은 더욱 흥이 나는 눈치였다. 그들과 한동안 어울리다가 인사하고 행렬을 빠져 나오니 한 중년신사는 우리 보고 함께 축하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영화포스터가 인상적이었다. 사진 한 장 만으로 만든 영화포스터들은 여러장 겹쳐 합성하는 우리네 영화포스터보다 세련되어 보인다. 하지만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 곳에서 벗어나 더 다녀 보려니 더 이상의 전통가옥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차 한 잔 마시고 돌아 가기로 했다. 여기만 해도 외국인들이 거의 오지 않는지 주인장과 그 가족들도 자기네 가게에 외국인 손님이 온 것이 신기한 눈치였다. 우리는 여기서 차 한 잔 하고 나왔다.
튀겨 놓은 과자들이 먹음직해 보였지만 티벳 정찬을 먹으러 가기로 한 날이니 배를 비워둘 필요가 있어 차만 마셨다.
이 집 주인의 아들.
주인장의 딸과 막내 아기. 큰 눈이 한없이 맑아 총명해 보인다.
이 집 화장실을 가 보고 위생상태에 쓰러지는줄 알았다. 후장이 급한 것도 아니어서 걍 참고 가기로 했다. 그래도 뜀도령과 찬바람은 비위가 강한지 볼일을 보고 미소 지으며 나왔다. 버스 정거장에 거의 나오니 이 곳에도 깔끔한 쇼핑몰이 있다.
부슬부슬 비내리는 올드바자르로 다시 나와 레이크 사이드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늘어선 가게의 차양 아래서 피를 피해가며 기다렸다. 곧 소형 버스 한대가 왔다. 구겨타고 매달려서라도 가려고 많은 사람들이 버스 안에 자신을 차곡차곡 수납하는 모습을 본 우리는 질릴대로 질려 택시를 타기로 생각을 돌려 먹었다. 택시 탈 돈이 없으면 걸어서 가더라도 숨도 쉴 수 없는 이 버스를 타고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레이크사이드로 돌아와 씻고 나서 티벳식당인 라싸를 찾아갔다.
벽과 천정은 티벳 전통문양을 수놓은 천으로 장식되어 있고 종업원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우리 팀 외에는 대가족 모임인지 20여명의 티벳계 사람들이 이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뗀뚝이나 뚝바같은 간단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와인을 한 병 시키고 티벳 전골 정식이라 할 수 있는 갸코크 요리를 주문했다. 치즈볼과 생선튀김, 야채, 계란 등을 넣고 우리네 궁중전골처럼 숯을 넣은 신선로에 넣고 팔팔 끓는 상태로 가져왔다. 국물과 치즈볼은 짭짤한 편이고 우리 전골과 달리 국물은 약간 틉틉한 맛에 깔끔함은 없었다. 그런대로 맛은 좋은 편이고 육수는 국물이 졸거나 다 먹었다 싶으면 연방 추가로 부어준다. 이 주변에서는 비교적 비싼 음식에 속하지만 한 번 쯤 먹어볼만하다.
와인은 메뉴판에 와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각 한 가지씩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산이었는지 독일산이었는지 생각 안나지만 마셔보니 들쩍지근한게 마시기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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