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4 이란

좌충우돌 낭만의 이란 2(마쑬레)

코렐리 2014. 9. 28. 19:39

2014.9.4(목)

바흐만씨와 나는 늦잠을 잤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집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집에는 가정부가 있고 정원사도 있어 비교적 부잣집인 것 같다. 이것이 페르시아식 정원이라고 한다. 나는 바흐만씨에게 한국의 전통적 정원은 옮겨심고 일구는 것이 아니라 물, 나무, 바위 등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러안은채 집을 세우고 담을 두른다고 했더니 놀라워하며 한 번 보고싶다고 했다.

 

개가 15살이라고 한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날동말동... 이 녀석을 보니 14년전에 보낸 나의 매기에 관한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보낼 당시 나이가 12살이었다. 떠날때 힘들어하던 그 모습에 아직도 그립기만 한데 남의집 나이든 개만 보면 내가 한바탕 겪었던 심적 고통을 이 집에서도 겪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제넘게 안쓰러움을 느끼곤 한다. 주인과 함께 늙어가니 오죽할까.

 

아침으로 먹은 당근주스와

 

계란, 그리고 빵... 바흐만씨가 삶은계란 두 개를 까서 그릇에 넣은 뒤 수저로 마구 조각을 냈다. 나는 그대로 따라서 했다. 여기에 계피를 뿌렸다. 나도 따라서 해봤다. 여기에 올리그유를 잔뜩 뿌리더니 숫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따라서 그대로 해봤지만 뭐 그리 대단하게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현지식에 많은 호기심을 가진 나로선 따라하기가 즐거웠다. 

"이게 페르시아식 계란요리군요."

바흐만씨의 대답이 대단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니, 이건 내방식이야."

"ㅡ,.ㅡ;" 

 

고맙게도 바흐만씨의 형님이 나와 바흐만씨를 시내까지 태워다 준 덕에 편하게 갔다.

 

주전부리로 피스타치오를 구입하는 바흐만씨.

 

생김새가 일정치 않고 색깔도 다양한 고추가 나의 호기심을 잔뜩 부추긴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주인이 다가와 고추 하나를 내주며 맛보라 한다. 날 뭘로 보구... 이보셔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매운걸 잘먹는 한국 사람일쎄. 아무렇지도 않게 씹으니 휘둥그레진 눈을 내게 대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잘익은 고추라 달았다. 달다고 했더니 날 놀려먹으려던 주인이 놀라 쳐다본다. 헐헐헐 바보.

 

중동의 가게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이 곳의 여인네들은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100%가 히잡을 두르고 있어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한다.

 

짭짤하게 간을 해서 볶은 피스타치오만 보다가 볶기 전의 생피스타치오를 보니 신기하기 짝이없다. 외피를 벗기고 속껍질을 벗긴 뒤 그 안의 속살을 꺼내 씹으면 약간의 물기도 머금고 있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해 그동안 맛보던 것과는 전혀 새롭고 차원이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바흐만씨의 안내로 찾아간 환전소.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신기한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환전하는데는 어찌 그리도 많은 시간을 소요하시는지. 답답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바흐만씨에게 한국 같으면 30초도 안걸린다고 했더니 웃는다. 우선 300달러를 환전했다. 945토만을 내준다. 1토만은 10,000리얄. 화폐 단위 숫자가 너무 커서 뭔가 계산할 때 존장 햇갈린다.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돈을 셀때 이상한 셈법을 쓰고 있어 가뜨기나 단위가 커서 햇갈리는데 여기에 혼란을 가중했다.

 

마쑬레에서 돌아오면 바로 쉬라즈로 날아갈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해 여행사부터 찾았다. 바흐만씨 덕에 시간 허비 안하고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항공권은 값이 무척 저렴했다. 쉬라즈 편도에 165토만(50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건물 4층인가에 여행사가 있었는데 영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데다 사무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도 건물 안에서는 볼 수가 없어 바흐만씨가 아니었다면 이 곳을 설사 찾았다 해도 여행사인지도 몰랐을게다. 게다가 이 곳 사람들은 영어에 특히나 취약하다. 사무실 번호 조차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번호가 아니라 페르시아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 젠장 어려워...

 

이 번에는 마쑬레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이 곳 카라즈는 테헤란 시내에서 마쑬레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가는 길목이다. 역시 바흐만씨가 금방 알아나 내가 타고갈 버스까지 확인해 주었다. 덕분에 늦잠을 실컷 자고도 시간허비 없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중동의 대부분 장거리 버스들이 고급형이어서 안락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고속버스보다 훨씬 낫다. 이 곳 카라즈에서 마쑬레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라시트(Rasht)에서 택시로 갈아타야 했다. 마쑬레(Masuleh)는 당초 이 곳 이란에서의 마지막 코스로 잡았던 곳이다. 코스를 바꾼 이유는 다친 발때문이었다. 절지 않는척 하면서도 발가락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 하며 걷다 보니 발목에 무리가 와 이제는 발목에까지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바흐만씨와 카라즈 시내를 걸었던 것이 특히 무리를 주었다. 다른 도시에선 많이 걸어야 했지만 마쑬레는 천천히 쉬엄쉬엄 구경이나 되는 작은 마을이라 그 곳에서 쉬다 보면 발도 그새 좀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게 그 이유였다. 마쑬레에서 쉬고 나면 장시간 테헤란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쉴 수 있고 그 날로 국내선 비행기로 쉬라즈로 가면 최소 이틀은 발에 무리를 하지 않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도 이틀 뒤 아침엔 걷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좋아져 여행에 별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었다.  

 

주변 풍광은 무척이나 이국적이고 다른 중동지역과 비교해도 다른 독특한 모습이었다. 

 

잠깐 들른 휴게소에는 음료수 수송용 트럭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이국적인 풍경이 더욱 이국적으로 보인다.

 

버스 안에서 만난 청년들이 까먹으라고 내게 씨나락을 내민다. 먹고싶지도 않고 먹기도 번거로워 성의 무시가 되지 않을 정도만 집었다.  

 

내게 씨나락을 건넷던 청년들. 이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대화는 불가능했다.

 

부인과 어린 아들을 대동한 한 젊은 가장은 차 안에서 밖을 향해 연신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더니 도대체 뭐 볼게 있다고 사진을 찍는지 알수가 없다는 표정과 몸짓을 했다.

"이 곳은 한국과 풍경이 무척 다르기 때문에 내게는 특별한 볼거리가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감이나 전달해 보려고 한 얘기였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그 가장이 데리고 올라탄 어린 아들. 장거리의 장시간 이동이 무료한지 밖을 내다보는 얼굴이 무표정이지만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

 

라시트(Rasht)까지는 6시간이나 걸렸다. 이 곳에서 택시로 갈아탔다(40토만). 라쉬트의 버스터미널로부터 마쑬레까지는 30분 이상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다. 묘한 것은 택시도 구간제가 있는지 푸만(Fuman)까지만 데려다 주고는 그 곳에서 다른 택시로 갈아타란다. 알고 보니 거의 대부분 그런 방법으로 마쑬레까지 간다. ㅡ,.ㅡ;

 

푸만(Fuman)에서 택시를 갈아탔다. 기사가 가다말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과자점으로 들어간다. 이 곳 라시트의 명물이라며 과자를 두개 사오더니 하나를 내준다. 요금에 반영될게 두려워 사양했더니 굳이 준다. 물가도 싸고 바가지 씌워봐야 이 곳은 애교수준이니 받아서 함 먹어봤다. 쓸만한 맛이지만 굳이 쫓아가서 사먹을 만큼 감동적이진 않다. 

 

갈아타고도 적지 않은 시간을 갔다. 한 15분 이상 갔을까? 요금 12토만.

 

곧 주차한 자동차가 빼곡한 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19:00가 다 되어서였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로선 도착부터 실망했다.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마침 황금휴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가만 보니 관광객들은 거의 모두 이란 현지인들이었다.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암. 도착하자마자 일가족을 대동한 한 남자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운 기색을 하며 내 딸이 당신과 사진을 함께 찍고싶어 하는데 허락해 주면 좋겠다는거였다. 나야 현지인들 많이 만날수옥 좋으니 당근 오케이. 소녀는 무척 예쁜 아이였다. 이슬람 국가에서 아무리 어린 소녀라지만 옆으로 다가온 소녀와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내 손이 소녀의 어깨로 올라갔다. 불편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문화의 차이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소심증 후군이 나를 가끔씩 괴롭혔다.

 

일단 도착했으니 숙소부터 구할 일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큰 호텔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는 호텔이라 웬지 호감이 가질 않았다.

 

일단 마을을 구석구석 다녀 보기로 했다.  다니다 보니 가정집의 주인과 객이 뭔가 거래를 하는 것 같았다. 어? 민박도 하는가?

 

돌아 다니다 보니 이따금 집앞에 뭔가 써붙였다. 페르시아어를 알아야 말이지...

 

언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 탓에 지붕이 길 옆 발밑에 있는 집들이 많았다. 굴뚝도 길 바로옆 지붕에 설치되어 재미가 있다.

 

가정집에 쓰여 있는 내용이 궁금해 집주인에게 물었다. 민박이란다. 심지어 전화번호까지도 페르시아식 표기법으로 되어 있으니 뭐가 뭔지 알길이 없다.

 

집들이 예뻐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차 안에서 장시간 쉬니 발도 많이 나아졌다.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모스크의 모습이 특이하다. 지붕도 미나렛도 모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새에 건축자재도 황토였다. 아랍니역과 페르시아 지역을 통틀어 전에도 본 적 없지만 이후에도 본 적 없는 특이한 건축형태였다. 지붕이 삐따닥하고 앞 뒤 높이가 다른 건 다른 집들과 같은 모양새였다. 건축양식이 찬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이한 모양새와 독보적인 분위기가 적잖이 눈길을 끈다.

 

여기저기서 사진 함께 찍잖다. 왜그러지? 눈이 쭉찢어진 외국인이 신기한 동물이라도 되나?

 

마을의 청년들이 내 사진을 찍었다. 그 댓가로 나도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현지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를 좋아하는 나이니 여간 좋은게 아니었다. 

 

산 경사를 따라 지은 집들은 거의 대부분 흙벽으로 되어 있고 올려다 보면 무척 운치가 있는 마을이다. 의외로 내려다 보면 대부분 집들의 지붕이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마을에는 나름 복잡한 중심가가 있다. 중심가? 중심골목???

 

이 곳의 기념품에는 수제품들이 무척 많다.

 

이 곳에는 기념품 가게, 식당, 카페, 전통의상점 등이 즐비하게 널려 있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외국인은 거의 없어 보는 재미가 크다.

 

묘한 것은 가는 곳마다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 떨어질만한 곳에는 우리네 상식처럼 여겨지는 난간이 없다. 술이 금지된 나라이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고 깨나 났을 곳이다.

 

이 곳에서 기념으로 팔찌 세개 샀다. 이란에서 만든건 줄 알고 좋아라 사서 손목에 걸고 나서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 기념품들 전부 이란산이죠?"

"이란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중국산이에요. 당신이 산 팔찌도 중국에서 온거예요." ㅡ,.ㅡ;

자랑거리 아닌거같은데 자랑스럽게 얘기하넹? 아~ 젠장.

 

이 곳은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눈꼽만치도 없다. 어딜가나 영어 표기는 없다. 숙박 요금, 전화번호, 메뉴, 가격 등 모든것이 다 페르시아식 표기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박이 가능한 곳인데 어느어느 집이 민박 가능한 집인지 알 수가 있나.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녀봤다.

 

숙소를 구하러 다니다 보니 이 곳의 청년 세 사람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이 나그네인 나를 그들의 작은 파티에 초대했다. 대화는 몇 몇 기초적인 이야기 외에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내게 차를 내주고 갤리운(물담배. 아랍지역에서는 우리가 흔히 물담배로 알고 있는 이 물건을 시샤라 부르는데, 이들은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쓰는 관계로 용어가 달랐다)도 건넸다. 그러잖아도 물담배 생각이 나던 차였다.

 

이들과 앉아 차마시며 갤리운도 나누고 잠시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지친 몸을 쉬었지만 일단 내겐 숙소와 식사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두어군데 방을 보기도 했지만 방이 우중충하거나 가격이 안맞았다.

 

저녁 7시나 되어 이 마을에 도착한데다 마을 구경하며 숙소를 구하러 돌아다니느라 적잖이 늦은시간이어서 나는 일단 민생고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마을 중심부 야외 가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셀카를 찍을 때는 몰랐는데 뒤 쪽에 있던 사람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포즈에 완전 빵터졌다.

 

맥주가 없는 곳이니 대용품으로 생각하고 주문한 음료수. 0.0%가 표시되어 있어 무알콜맥주인가 했지만 레몬 음료다. ㅡ,.ㅡ; 먹을만은 한데 여행만 가면 빨고 다니는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케밥에 밥을 주문했다. 구워져 나온 케밥은 양이 얼마되지 않고 밥은 잔뜩 준다(14토만).

 

바로 옆테이블에는 현지인들이 아기에게 전통의상을 입혔다. 허락 받고 한 컷 찍었다. 엄청 예쁘다고 했더니 자기 딸이라며 그 아빠가 으스댄다. ㅎㅎ 

 

식사를 하고 나니 몸도 피곤하고 노근한게 축 늘어진다. 그 김에 갤리운(7토만)도 주문했다.

 

혼자 앉아 갤리운을 즐기고 있다 보니 아까부터 오며가며 마주치고 숙소 정보를 내게 주던 두 청년이 혼자 있는 나를 발견하고 허락 없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숙소 구했냐?"

"아니 아직. 니넨?"

"우린 방금 구했어. 집이 아주 좋은데다 내가 마구 깎았어. 30달러에 둘이 쓸 방을 구했다구."

"우와 재주 좋넹. 나도 빨리 구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집마다 다 방이 찼거나 숙박 운영 안한대."

"숙소가 없어? 거 이상하네? 우린 가는곳마다 빈방이 있던데? 우리 옆방이 비었어. 원하면 따라와. 내가 소개하고 협상까지 해서 싸게 구해 줄께."

통성명을 한 뒤 한동안 그들과 함께 갤리운을 즐긴 뒤 나는 그들을 따라 갔다.  

 

과연 괜찮은 집이었다. 침대가 없는게 흠이긴 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에디군이 나를 집주인에게 소개하며, '내가 데리고 왔다'며 주인에게 있는대로 생색을 낸 뒤

"우리한테 30달러에 두사람 방을 내줬으니 16달러에 내주라"고 했다. 주인은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에디군은 수건까지 덤으로 요구한 뒤 내게도 하나 내주었다. 싹싹하고 다정다감한 친구였다. 아래 사진은 수건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오는 에디군.

 

방을 잡은 기념으로 한 컷.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법같은 마을 분위기에 이끌려 우리는 다시 밖으로 눈호강을 시키러 나왔다.

방을 구해주고 가격 협상까지 신해 준 에디군과 윌리엄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왔고 그들은 여러 나라를 여행중이었다. 한국에도 왔었다는데 한국은 물가가 비싸다고 투덜거렸다. 하기 요즘은 엔화가 폭락해 일본도 물가가 저렴한 곳이 됐다.

"프랑스 가봤어?" 내가 역공에 나섰다.

"가봤지."

"거기보다 비싸?"

"물론 프랑스보단 싸지."

"그럼 됐잖아."

묵묵부답에 고개만 끄덕이며 못마땅하하마 마지못해 동의하는 에디군을 보며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도 참 이런 소린 왜했나 몰라. 어쨌든 한국이 이젠 뭐든게 만만치 않은 나라임을 각인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게다.

이 곳엔 섬세한 수공품이 많다 그 중 철판을 두드려 형태를 만들고 붓으로 직접 그린 접시와 물병이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셈세함에 있어서는 나중에 들렀던 이스파한(Esfaha)이 한수 위인듯하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사는 것보단 이스파한에서 사는게 훨씬 낫다는 얘기다.

 

이 곳의 돈은 참으로 헷갈린다. 단위가 엄청나게 크다. 300달러를 내주니 930토만 정도를 내준다. 1토만은 10,000리얄로 통한다. 다시 말해 환전해서 받은 돈은 9,300,000 리얄. 환전해서 받은 돈은 가뜨기나 단위가 커서 햇갈리는데 이들은 돈을 셀때 "0" 하나를 빼먹고 카운트한다. 예를 들어 10,000리얄이면 ten thousand 리얄이 아니라 one thousand 리얄이 된다. 처음엔 값이 너무 싸서 놀랐다. 그랬다가 그게 아님을 알았을 때는 한 두 사람이 영어를 못해 생기는 헤프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이런 이상한 셈법을 썼다. 나중에 만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란인들의 습관상 0 을 하나씩 빼고 말한다고 한다.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토만 단위로 가격을 부르는데 이 역시 헷갈림을 부채질한다. 가끔씩은 한참 햇갈려 돈내기를 주저할 때도 생기곤 했다. 이 역시 좌충우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