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은 전설의 디바 김추자가 데뷔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가던 그녀의 음악(사실 신중현의 곡들이었지만)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은 열광적인 것이었지만, 한 편으로 나훈아가 최고로 잘나가던 가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젊은이들에겐 김추자였고, 기성세대에겐 네박자 쿵작 나훈아의 노래가 대세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김추자의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는 둘째 친다 하더라도 당시의 보수적 시각으로 봐서는 간질병에 가까웠던 그녀의 춤은 대부분의 기성세대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봐주기에 곤란한 몸부림이었다. 당시 우리 집의 분위기와 시각으로는 그녀가 그다지 정상적이지 못했다. 집안 분위기는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내게는 그녀가 추는 춤이 징그럽고 제정신에는 도저히 출 수 없는 광기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내게 있어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임은 변덕스러운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고백하거니와 그녀의 창법은 정열의 쏟음이기에 그런 쏟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가사에 내재된 감정을 목소리에 담고 노래에 혼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가수는 그녀를 놔두면 달리 할 얘기가 없다는 생각이고 그렇기에 그녀는 나에게 있어 영원한 디바의 디바다. 추자님 죄송합니다. 어린 날의 어린 허물을 용서하소서. ㅡ,.ㅡ;
1971년에는 상암동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나는 짝궁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사랑했다. 반에서 가장 예뻤고 미모는 눈에 띠었다. 물론 어릴 때 기준이었으니 지금 다시 본다면 기준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지만 그 땐 그랬다. 수업이 끝나고 짝궁과 함께 학교를 나서려는 나의 태도를 보고 다른 반에 배정된 동네 절친 둘이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고 찾아왔다가 샘이 났던지 외면하려던 나를 대놓고 비난했다.
"야, 야! 째째하고 치사하게 우리하곤 안놀고 여자하고나 같이 노냐? 저자식 보내고 우리끼리 가자. 야 넌 여자하구 잘해봐. 동네 돌아가면 똥싸개 한테도 얘기해 주고 강넹이 녀석 한테도 말해줄거야."
강넹이란 별명의 소유자도 똥싸개란 별명을 가진 애도 모두 동네 또래 사이에선 좀 덜떨어진 애들로 유명했다. 그런 애들한테까지 나의 연애담을 누설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의리와 사랑 사에에 갈등하며 망설이던 나를 짝궁이 쳐다보며 결정을 기다리는 표정을 내비쳤다.
"너 먼저 가"
나는 친구들에게로 돌아서곤 했지만 이후에도 나는 틈만 나면 짝궁과 줄행랑을 치곤 했다. 이 때 내가 중얼 거리던 노래가 모두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미미의 먼 데서 오신 손님도 있었던 것 같다. 트롯트 곡이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애타도록 기다리는 님인데....
수업 시간엔 팔을 들어 짝궁이 기댄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 놓고 공부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조숙함은 남보다 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짝궁은 어느날 소리소문 없이 전학을 가버렸다. 나는 그녀가 학교에 다시 나오길 기다렸지만 기다림의 보상은 없었다. 그 후 새로 여자애 하나가 전학을 왔다. 전학간 그녀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전학 온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정확히 기억에 남으니 이 또한 묘한 일이다. 그녀의 이름은 정복자였다. 키는 껑중하게 컸고 뒤통수의 반까지 바싹 바리깡을 댄 단발머리에 롱코트를 입은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꾀재재하고 코까지 흘렸다.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예"
"네 짝궁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나는 대뜸 전학간 짝궁 이름을 들먹였다.
"그 아인 다른 학교로 갔으니까 이젠 지금 네 옆에 앉은 아이가 짝궁이야. 이름은 정복자니까 잘 데리고 놀아야 해."
"걔는 인제 안와요?"
나는 못내 섭섭했던지 당돌하게 그녀의 안부부터 물었다.
"이젠 안와 알겠지?"
나는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지만 그 날은 별로였다. 나의 질문에 실망을 실어준 선생님이 미웠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처음 나눈 대화는 이랬다.
"너 오늘 아침에 세수 안했지?"
"아냐 했어."
"이게 거짓말 하구 있어."
함께 쓰던 2인용 책상은 어느새 두 사람의 영역을 가르는 금이 그어지고 나는 수시로 복자에게 말했다.
"넘어 오면 죽을줄 알어"
다투던 두 짝궁의 사이가 좋아지면 금은 지워지게 마련이지만 나는 한 번 그어진 금을 지우지 않았다. 나도 참 보통 못된 놈은 아니었던가 보다. 타당한 이유도 없이 나는 그 애를 땡복자로 바꿔 불렀다.
그러다가 1학년이 채 마쳐지기도 전에 나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연히 전학도 했다. 이사는 구파발로 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당시론 시골이었던 구파발에서 나와 형을 학교에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는지 가까운 서울로 전학을 하게 했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초등학교 1학년생. 지금 돌이켜 보면 안쓰럽다.
당시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양각 구도로 가요계의 메이저로서 영역을 양분했다. 그 가운데도 김추자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굉장히 유행을 했고 이사하면서 함께 살게 된 대학생 삼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아마도 대한민국 최초의 아파트로 기억되는 시범 아파트 추첨에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우리는 다시 집을 갖게 되었다. 방 두칸의 13평짜리 아파트였지만 우리 여섯 식구에겐 대단한 대궐이었다. 이사와 동시에 전학도 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였지만 당시로선 신생학교였기에 5학년이 최고의 학년이었고 학년당 반도 2개씩 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반 담임 선생님은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짧은 시간 동안에 아이들에게 많은 노래를 가르쳤다.
하루는 "내게 바이올린이 있다면"이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였다.
내게 바이올린 있다면 온세계를 다니며
여러분이 좋아하실 멜로디 들려드리죠
짤랑짤랑 은전을 던져 주면
그 것으로 바이올린 또 산다다오
내게 바이올린 있다면 온세계를 다니며
여러분이 좋아하실 멜로디 들려드리죠
이 노래는 후렴 마지막 "멜로디 들려드리죠" 부분에서 전창과는 일부 음을 달리하는 곡이었다. 하지만아이들은 여기서 자꾸 전창과 같은 멜로디로 노래하였다.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게 그리도 햇갈리는지. 가르친 노래를 첨부터 끝까지 부르게 하는데 두 번인가를 바로 그 부분에서 연속으로 틀리자 선생님의 얼굴에는 짜증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세번째에 나는 내 노래에 나름대로 도취(?)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이 번에도 틀리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있었던가보다.
세번째에도 "...멜로디..." 바로 그 부분이 틀렸고 선생님의 풍금소리가 멈춰졌다. 아이들 노래가 멈춰지고 갑자기 조용하고 썰렁해진 분위기도 감지하지 못한 나는 눈까지 감은채 "...들려 드리죠" 하고 마지막 다섯 음절을 끝까지 다 불렀다. "엉?" 하고 눈을 뜬 순간 아이들은 웃었고 선생님의 얼굴은 화가난 심각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드러내길 싫어하던 성격의 소유자였던 나는 무척 당황했다.
"일어나!"
나는 애들을 웃긴 죄를 물리지 않을까 무척 겁이 났다.
"모두가 틀리고 상철이 너만 맞았어. 친구들 앞에서 다시 해봐"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하면서도 혹시나 마지막에 틀리면 선생님의 핀잔을 듣고 애들은 웃게 되지 않을까 무척 두려웠다. 더 두려웠던 것은 선생님의 실망. 무사히 틀리지 않고 끝까지 부르자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은 나를 한껏 치켜 세웠다.
"여러분 어때요? 상철이가 아주 노랠 잘하죠?"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음악가가 되라"는 격려의 말까지 해 주었지만 어린 마음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숙기가 없던 나는 조회시간과 종례시간이 고역이었다. 노래를 좋아했던 선생님은 조회때 세 곡, 종례 때 세 곡을 모두함께 부르게 하고 나면 나의 독창을 반드시 시켰다. 당시 선생님의 나에 대한 애정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끔찍했다.
겨울이 되자 교내 콩쿨대회가 벌어졌다. 선생님은 매일 나를 연습시켰고 주말엔 과외수업(?)까지 이루어졌다. 출전곡은 눈내리는 밤이었다.
창 밖에 함박눈이 내리는 밤은
멀리 두고 온 고향생각 그립다
이웃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서
옛이야기 즐겁게 꽃피는 마을
밤깊은줄 모르던 고향생각 그립다.
가사에 문법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이 곡은 당시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던 곡이었다. 이 노래는 하루 두 차례 즉, 조회와 종례때 친구들 앞에서 독창으로 불러제껴야 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당시 강당이 없었던 학교는 교실 한 개를 임시 강당으로 개조(?)를 했는데 무대가 제법 그럴듯했다.
교실은 출전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 자리를 가득 메웠다.
내 기억엔 각 학년 각 반 대표들이 한 명씩 나온 관계로 출전자는 총 10명이었던 것 같다. 내 차례가 되어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나의 노래에 만족감을 표했다. 하지만 1반 대표인 박정미가 출전하면서 나는 기가 죽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정미의 노래는 깔끔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긴장때문에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율동없이 밋밋하게 노래를 불렀던 나와 달리 정미는 무릎을 사뿐히 굽혔다 펴가며 약간의 율동을 취했고 얼굴표정은 생글 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우수상은 나의 짐작대로 정미에게 안겨졌다. 내가 장려상을 받으러 나갈 때 선생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다음날 안 사실이었지만 선생님은 그 심사결과에 매우 심기가 불편해했다. 우수상이 당연히 정미꺼라고 생각했던 나와 달리 선생님은 우수상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을 언중에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내가 살던 아파트에 엄마들만 모이면 나에게 노래를 시켰다. 숙기 없는 나에겐 고역이었다. 만일 내게 노래를 지도해 주셨던 그 선생님이 일직 전근가시지 않고 좀 더 오래 계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노래에 대한 나의 무관심은 계속되었고 중학교 시절 변성기가 지나면서 내 성대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없는 목소리만 만들어 내게 되고 말았다. 음악과는 상관도 없는 물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모 대학교 직원으로 근무중이니 선생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이다. 지금도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노래방과 단란주점이다. 물론 지금 나의 직업과 일에 만족해하며 살고 있지만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성악과를 가고싶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코 코렐리, 마리오 델 모나코,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등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얼토당토 않게 질투심을 느끼곤 한다. 유명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악과를 졸업해 노래 잘하는 교직원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내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난날의 추억일 뿐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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