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부르기를 잊고 살던 중학교 1학년의 어느날 아버지가 당시로선 귀했던 일제 녹음기를 들여왔다. 나와 함께 방을 썼던 형은 큰 집 형으로부터 12개짜리 세트로 구성된 영화음악 테잎을 빌려와 수시로 틀었다. 형이 음악을 들을 때 옆에 있었던 나는 음악들이 귀에 익으면서 영화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든 여인,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진홍의 날개,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랑의 엔젤러스, 남과여, 사운드 오브 뮤직, 내일을 향해 쏴라, 베를린 천사의 시 등이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곡들이었다. 하지만 영화음악에 묘한 회의감이 곧 들기 시작했다. 영화음악도 명곡은 워낙 많은 악단들이 편곡하고 연주하는 통에 극장에서 들었던 영화 음악을 들었을 때나 형과 함께 들었던 음악이 막상 라디오나 다른 음반에서 다시 찾아 보면 오리지널이 아닌 다른 연주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다시 찾으면 10중 8~9는 내가 좋아하던 그 곡이 아닌 것이다. 가장 듣기 끔찍한 것은 영화 대부의 주제곡을 폴모리아 악단이 연주한 경우였다.
그 뒤로 죽었다 깨나도 듣지 않을 것 같던 않을 것 같았던 팝송 한곡이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 곡은 1978년인가 크게 히트했던 빌리지 피플의 YMCA였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몇 주 동안을 프로그램 마다 한 번씩 반드시 이 음악을 송출했다. 오죽하면 등교와 하교길 버스 안 라디오 방송에서 수시로 이 노래를 접했고, 길을 걷다 보면 레코드방에서도 수시로 흘러 나왔다. 나는 도대체 빌리지 피플이라는 그룹이 어떤 남자들로 구성된 그룹인지 궁금해 수소문해 봤지만 그 대단한 히트에도 불구하고 음반도 출시되지 않았고 사진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오늘날 처럼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은데다 매스미디어가 비교적 빈약하던 당시에는 외국 가수가 매스미디어를 탈 기회는 월간 팝송 외에는 거의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정말 대단히 잘생긴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동성애자들아라더구만. ㅡ,.ㅡ; 어쨌든 처음으로 미쳐 찾기 시작한 팝송이 바로 이 곡이었다.
(빌리지 피플의 YMCA의 후속편인 Can't Stop the Music Sound Track 앨범)
친구들과 처음으로 청량리의 청산학원 수학반에 등록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 곳은 온통 교복을 입은 또래들이 학원이고 거리고 지천에 깔려 돌아다닌다는 것이 공부 자체보다 훨씬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진정 공부에 목적이 있어서 이 곳을 배회하던 아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고 그 나머지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이었다. 어느 학원의 강사가 더 이해 잘 가게 잘 가르친다는 이야기 보다는 어느 학원의 여자애들이 더 예쁘더라 뭐 어쩌고 하는 얘기가 훨씬 더 큰 화제거리였다. 청량리가 청소년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보니 이들을 타겟으로 한 불법 복제 음악테잎 장사들이 리어카에 물건을 잔뜩 싣고 음악을 틀어 오가는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썰렁한 주머니를 자극했다. 당시 절친 중 하나가 길거리 테잎 하나를 거금 500원 주고 사줬다. 여기에는 당시 최신 히트곡이 총망라 되어 있었는데 이 테잎이 최초의 엘피를 구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테잎에는 물론 YMCA도 들어 있었다.
떠들다 보니 이때 시기에 떠오르는 추억이 또하나 있네 그래. 청산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 두 놈 사이에 리틀엔젤스 예술학교에 다니던 한 여학생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당근 예뻤기 때문. 그 중 한 놈이 걸핏하면 주절거렸다.
"오...오... 리틀엔젤."
얼마나 좋아했으면 작은 천사라고 불렀을까. 이름을 모르니 그렇게 부른 것이었지만 나름 애가 탔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엔 그보다 예쁜 애들도 많은데 왜 하필 얘였나 싶었다. 당시 리틀엔젤스 예술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은 군청색 계열의 교복에 새빨간 빵모자를 쓰고 다녔다. 어느날 농담처럼 내기가 벌어졌다. 쟤 꼬시면 빵하구 우유 사주기. 어쩌다 보니 반 등떠밀렸다. 그녀가 학원 복도에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용감한 척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나의 뒤통수를 쏘아 보는 친구들을 의식한 채 당당한 척 그녀를 향해 다가 갔다.
"어, 그날 보고 여기서 또 보네?"
" 응? 뭐라고?"
"너 얼마전에 정독도서관에서 봤을 때 친구들이 있어서 아는척도 못했지 뭐야."
나도 순간적으로 어떻게 그런 작업 멘트가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즉흥적인 멘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기서 나 봤어?"
정독 도서관은 당시 중고생에게는 안가봤으면 간첩이나 다름 없었기에 덮어놓고 50% 이상의 가능성을 두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만일 거기 안가봤노라고 하면 이렇게 답변할 참이었다.
"고뤠? 지난주에 게 갔다가 너하고 너무 닮은 애를 봤는데 난 걔가 넌 줄 알았어.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걔도 예뻤거든."
아쭈 그러고 보면 나는 오히려 어렸을 때 고단수였나벼. 헌데 그녀는 진짜로 내가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지지난주에 너도 정독도서관에 왔었던거야?"
집어던 슬쩍 던진 신발짝이 똥그라미 안으로 들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응 맞어....."
대답해 놓고 나서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썰렁해지자 그녀가 물었다.
"나 친구들이 기다려. 가도 돼?"
뭔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응 가. 또 만날 수 있지?"
"글쎄."
힐끗 날 쳐다 보되 은근히 야릇한 느낌만 던지고 가버렸다. 보내고 나자 덩치가 이따만한 애들 세 놈이 나보고 잠깐 보자고 했다. 당시 덩치가 왜소했던(고등학교 시절엔 큰 키였지만 중학교 시절엔 나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나를 벽으로 밀어 붙이고 위협하듯 내 어깨 위 벽면에 한 필을 기댄채 잘생기지도 못하고 우락부락한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곤 물었다.
"야, 너 쟤 어떻게 알어?"
"모르는데?"
"근데 왜그래? 너 쟤하구 친해?"
"아직 몰라. 그냥 친구 할라구..."
여차직 하면 주먹이 날아올 참이었다. 참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걔 내 친구 까이야."
당시엔 청소년들 사이에 여자친구를 3인칭으로 칭할때 "까이"라는 은어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그 애한테 관심이 있었지만 그다지 마음을 얻는데 용이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나는 솔직히 덩치 큰 그 세 놈한테 얼어버렸다. 그 중 한 놈은 축구선수 웨인 루니와 똑같이 생겼었는데 실제로 그 녀석들 모두가 악동이었다.
그 후 나는 학습내용이 더 좋네 어쩌네 하는 다른 친구의 말에 속아 종로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괜스리 찝쩍거렸던 그 애한테 리틀엔젤 운운하며 목을 놓으며 설레발 치던 친구 녀석은 청산학원을 계속 다녔다. 내가 안보이자 그녀가 묻더란다.
"야, 니 친구 걔 이름이 뭐니?"
그 얘길 친구한테 전해듣고 잘해볼까 생각도 있었지만 친구녀석의 말 한마디에 그냥 접었다.
"얌마. 걔 진짜 날라리야. 너 그러고 나서 덩치 큰놈들이 너한테 뭐라고 협박한게 괜한건줄 알아?" ㅡ,.ㅡ;
어쨌든 중학교 연애담(?)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시시하게 끝났지만 돌이켜 보면 웃음 나오는 너무나도 재미 있는 사건이었다.
삼천포로 또빠졌다. 수다쟁이는 이게 한계라니깐...! 어쨌든 각설하고, 하교길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항상 지나치던 레코드 가게를 어느날 큰 마음 먹고 들어갔다. 얼마전 크게 마음을 쓴 아버지가 삼성 오디오 세트를 구입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오디오는 1단짜리 앰프에 카세트데크와 튜너까지 일체형으로 출시되었고 그 외 기기로는 턴테이블과 자그마한 1개조의 스피커가 풀세트였다. 그래도 당시엔 엄청난 고가인 35만원짜리였고 나는 집에 오디오가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하교하던 이 날 이 날 주머니에 돈이 좀 있었다. 처음으로 엘피를 구입하려던 참이었기에 하교길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레코드방에 앉아 계신 분은 쓰고 계신 돋보기 안경을 쳐다보기도 어지러운 심한 노안의 할아버지였다. 원래는 젊은 청년이 주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가게 쪽문이 가게집 마당으로 통해 가족이 돌아가며 가게를 보는 것 같았다.
"비지스꺼 있어요?"
친구가 사준 길거리제 복제 테잎에는 비지스의 곡이 세 곡이나 있었다. Night Fever, Too much heaven, Love you Inside out 이 그 곡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제시해 주신 음반은 비지스의 Spirit Having Flown였는데 이 안에 그 중 두 곡이나 들어 있었다. 음반이 마음에 들어 가격을 물었다. 당시 음반 한 장 시세가 1,500원이었다. 그런데 음반을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요모조모 뜯어 보시더니 1,000원을 불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던가. 이 할아버지 잘 모르고 부르시는 것 같았다. 서둘러 1,000원을 내고 음반을 허겁지겁 받아 나왔다. 라이센스가 뭔지 빽판이 뭔지 모르던 나는 이게 준 라이센스라는 해적판임을 알지 못했다. 사서 뜯자마자 턴테이블에 올렸을 때 나오는 잡음(처음엔 원래 이런건 줄 알았다), 허접한 디자인의 레이블(이건 좀 이상했다)...
"살려면 제대로 사지 이런건 뭐하러 샀냐"
는 형의 핀잔에 잘 못 산 줄 알고 막급한 후회를 했늘 때는 이미 뜯어 턴테이블에 얹은 뒤였다.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비지스의 Saterday Nighjt Fever와 Spirit Having Flown)
그 뒤 애독하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실재했던 사기꾼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은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양복점을 운영하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동생이 샵 앞에서 호객해 반 잡아 끌듯이 데리고 들어온다. 손님은 마지못해 입어본다. 무심결에 가격을 물어본다. 주인은 샵 한켠에 안채로 연결된 쪽문을 열고 손님 들으라는 듯이 안으로 소리친다.
"형님! 이거 얼마죠?"
"어떤거?"
"아 그거 여차저차 한 양복 말이오!"
"오십달러!(Fifty Dollars)"
"십오달러라구요?(Fifteen Dollars)"
"오십 달러라구 이 멍청아!"
"아 예, 손님! 죄송합니다요. 제가 귀가 좀 어두워서요. 십오달러라는뎁쇼?"
후에 누군가의 제보로 체포된 이들 형제들은 심문 과정에서 이 때 자신의 오류(?)를 정정해 주려는 사람은 없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허겁지겁 계산을 하고 내빼더란다. 이걸 읽으니 비지스의 음반을 처음으로 구입하던 에피소드가 겹쳐진다. 내게 사기친 사람도 없구만 나는 왜 넘어갔을까. 다시 부끄러워졌다. ㅡ,.ㅡ;
하루는 외삼촌 댁에 놀러 갔다가 비지스의 토요일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빽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Night Fever가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사촌형에게 이 음반을 아바의 베스트 모음집과 함께 빌려왔다. 당시 아바는 누군가 좋네 어쩌네 하는 소리를 듣고 함 들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나는 30여장이나 음반을 갖고 있던 사촌형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수록곡이 너무나 좋아 열심히 들었고 이 음반에 수록된 비지스의 곡은 모두 좋아하는 곡이 되었다. Staying Alive, How Deep is your love, More than a Woman, You should be Dancing 등 묘한 가성의 노래가 귀를 잡아 끌었다. 이 사운드 트랙의 영화는 1977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 한국은 헐리우드에서 막 개봉한 영화를 늑달갔이 수입해 올 만큼 부자 나라가 아니었다. 인기가 확실하게 없어지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면 그제서 값이 내려간 필름을 수입하는 식이었다. 이 영화는 대충 기억에 중학교 3학년이던 1979년에 수입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비지스의 사운드트랙 앨범과 음악을 소개하는데 있어서는 그러한 인색함이나 굼벵이 등장이 아닌 신속한 조치가 취해졌다.
(아바의 베스트 모음집: 이 음반으로 처음 아바의 음악을 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했었다. 당시엔 국제극장, 국도극장, 중앙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같은 개봉 상영관으로 가자면 500원 정도의 비싼 입장료를 내야 했지만 다른 대안도 있었다. 의정부에는 1주일에 한 번씩 프로를 바꿔 가면서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외화 위주로, 나머지 하나는 한국영화 위주로 운영했다. 입장료는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77년 당시에는 150원인가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아무때나 표만 사면 무제한으로 입장을 시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의 공간 공유로 인해 공기도 무척 탁했고, 중간에 들어가 서서 보다가 중간부터 보고 중간까지 본 사람들이 나갈 때 또는 다음회가 시작되기 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의 좌석을 얼른 꿰어 차야 다음회 처음부터 그 나머지를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운 나쁘면 영화를 보고 나올 때까지 서서 봐야 했지만, 그래도 입장료가 싸니 사람이 몰렸다. 이 극장엔 교복 착용자 일색이었다. 이 곳 의정부에서 외국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은 서울시내의 한 유명 극장 이름을 도용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하나는 단성사, 나머지 하나는 국도극장이었던가 국제극장이었던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황야의 무법자가 10년만에 이 곳에서 재개봉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의정부의 극장에 발을 들인 이후 주말에 돈만 생기면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교복입은 채로 버스 타고 의정부로 새곤 했다.
그 후 2년인가 후의 어느날 뒤늦게 수입된 "토요일밤의 열기" 예고편을 의정부 극장에서 보고 충격을 먹고 말았다. 그동안 2장짜리 사운드 트랙 안의 비지스 곡은 전부 꿰차고 있던 나는 배경음악 이상으로 주인공(존 트라볼타)의 기막힌 춤솜씨에 매료되고 말았다. TV쇼프로에서 무대를 활개치며 추던 당시 국내 백댄서들의 춤을 보고 뭐하는 짓인가 혀를 차던 내게도 이건 차원이 틀린 수준급의 춤으로 받아들여졌다. 춤문화도 엄청나게 발달한 오늘날 다시 보자면 조잡하기 짝이 없던 춤이었지만, 당시엔 존의 현란한 춤은 세련되고 파격적인 춤이어서 그를 보고 매료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영화를 꼭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고 기회도 오지 않았다. 춤이란 것 자체가 당시엔 청소년들에게 해로운 문화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국내에 수입된 이 필름이 돌고 돌아 2차 상영관인 대지극장에서 상영할 때에서야 드디어 기회가 왔다. 친구와 같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야메로 구입한 초대권을 내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꼬리표에서 문제가 생겼다. 개봉관이 아니니 규제가 심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검표원 아저씨를 조르고 졸라 간신히 입장해서 본 영화는 너무나도 환상적이었고 음악도 너무나 좋았다. 그 뒤로는 비지스가 더욱 좋아졌다. 영화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돈을 모으고 모아 거금 3,000원을 들여 비지스의 두 장짜리 베스트 음반을 샀다. 엥? 뭐 이래 이거. 가성이 아니잖아? 한동안 나는 무척 실망했다. 자신들의 진짜 목소리로 노래하던 옛곡들에 적응이 되질 않은 것이었다. 물론 후에는 창법을 바꾸기 전의 이 음반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다. 내가 이 음반을 틀자 나의 형은 이 음반이 진짜 비지스 거냐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가성으로 부른 비지스의 곡을 듣고는 고자가 죽어 귀신이 되면 이런 소릴 낼 수 있다고 했으니 이 음반이 의아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음악에 관심이 없던 한 친구는 우리 집에서 아바의 음악을 듣더니 저도 덩달아 아바의 The Album을 샀다. 그의 집 다시 놀러 갔을때 그가 틀어 준 이 음반의 수록곡은 내가 사촌형으로부터 빌려왔던 그 음반과는 완전히 달랐다. 첫 곡인 Eagle이란 곡을 듣고 나는 다시 충격을 먹었다. 환상적인 분위기의 반주와 노래가 너무나도 좋았던 모양이다. 외삼촌 댁 사촌형에게서 빌려온 음반 중 하나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Bridge on the troubled Water였다. 이건 내가 좋아 빌린 것이아니고 나의 형이 빌려왔다. 그 덕에 나도 레퍼토리 하나가 는 셈이었다. 그 후 누군가 비지스와 비슷한 이름의 비틀스를 들먹였다. 오호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호기심에 또 산 음반이 비틀스의 두 장짜리 아래의 음반이었다. 첫 곡으로 수록된 Help가 처음듣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한듯하면서도 신선한 비틀스의 음악에도 곧 빠지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자주 나왔던 곡 중 하나는 Chic의 히트곡 Le Freak였는데 이 곡의 제 목을 알고 손에 넣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뒤로 다시 손에 넣은 음반이 키스의 Dynasty 앨범. 디스코음악이 대세이던 이 당시 키스 조차도 락을 집어 던지고 디스코 음반을 냈다. 기괴한 그들의 분장이 당시엔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나는 마귀할아범들 같던 그들의 분장과 의상 그리고 공연 사진만 보면 사이비 종교 교주를 만난 신자 만큼이나 흥분했다. 이들의 음반을 사고 싶었지만 당시엔 라이센스 음반이 나오질 않아 할 수 없이 준 라이센스로 구입해 들었다. 지금 와서 당시의 노래들을 들으면 가장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곡은 J.D. Souther의 You Are only Lonely였다. 친구들과 청산학원 수업 끝나고 청량리 일대를 싸돌아 다니다 보면 수시로 나오던 그 곡인데 외로움과 그리움을 호소하던 이 애상적인 곡은 귀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추억의 한 페이지에 자리 잡았다.
또 다른 친구의 집에서 들었던 올리비아 뉴튼 존의 A Little More Love를 듣고 청순하고 귀엽기만 한 그녀의 매력에 다시 푹 빠졌다. 월간팝송 부록으로 나온 달력 5월인가에 올리비아 뉴튼 존의 확대사진이 들어 있었다. 내가 쓰던 방 달력은 1년이 넘도록 5월이었다. ㅡ,.ㅡ; 어머니와 언니들이 모두 이혼을 경험했던 그녀는 결혼을 두려워했다. 나는 그녀가 영원토록 시집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크거든 나한테 시집 오면 더 좋고... 늦깎이로 노처녀 시집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놈이 내 여잘 데려가나 궁금했지만 지금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진 모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그녀도 나를 팝의 세계로 끌어들인 원흉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1년 넘게 디스코의 열풍이 무척 강하게 불었다. 그 가운데 저마다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하던 아티스트들도 많았지만 역시 대세는 디스코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1,2학년 까지 듣던 음악의 스타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물다 만 대가리 속에 콩나물 몇 자락이 들어간 나는 괜스리 교만해져 수준 있는 음악을 듣겠다고 설레발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이 것 저것 고르고 골라 들었던 음악이 이보다 크게 수준이 노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 시기에 들었던 음악이 수준이 떨어지는 음악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1978년에는 한국에서 가요계에 또하나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산울림의 등장이었다.
아니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에 훤하게 밝았네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금에 가득
이리저리 지나치는 정다운 눈빛 거이에 찼네
가사도 희한하고 음악 풍 조차도 골때리는 고문관같은 이상한 음악의 풍은 호기심을 넘어 하나의 열풍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했다. 음악에 관심이 없던 무지렁벵이들 마저도 산울림의 노래에는 그냥 꺼뻑 갔다. 가요를 시시하다고 생각했던(지금 와서 또 하나 고백하거니와 대갈통이 덜 여물어 지은 허물은 용서하시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산울림이든 땅울림이든 떠들거나 노래하거나 나는 관심 밖이었다. 누군가에게도 영향받은 적 없고, 누구에게도 영향을 준 적 없는 별똥별같은 이 괴짜 천재 뮤지션들의 음악에는 새삼 열광하노라... 아이 씨! 뭘보나!. 열광 좀 하겠다는데... 어쨌든 여물지 않은 대가리에 들어간 콩나물 몇 쪼가리가 나로하여금 겉멋 들게 만들었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과 레퍼토리에는 변화를 겪게 된다.
(제 5편에 계속)
'음악여행 > 음악에 관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HMV의 파산 - 레코딩 역사의 산실 역사의 뒤안길로 (0) | 2013.01.16 |
---|---|
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5 (0) | 2012.11.20 |
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3 (0) | 2012.10.08 |
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2 (0) | 2012.10.07 |
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1 (0) | 2012.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