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7(목)
전날과 동일한 아침식사다. 크긴 하지만 크로아상이라는 빵 자체가 속이 텅빈 공갈빵이다 보니 먹고 나면 시장스럽다. 그나마 칼로리 높은 코코아가 좀 메꿔주긴 하지만 먹성좋은 나로선 간에 기별만 간신히 간다. 갔던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나는 바로 길을 나섰다. 이 날의 목표는 프라도 미술관과 왕궁이었다. 스페인 마지막 날이자 마드리드에서의 실질적인 첫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지만 하루동안 방문할 곳으로는 이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비가 오는듯 마는듯 괜스리 땅만 적시는 축축한 날이었다.
하늘도, 젖은 도시도 우중충하지만 멋진 건물들이 그나마 우중충한 분위기를 상쇄시킨다.
프라도 미술관이다. 르누아르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을 입구에 크게 내걸었다. 이동전시인 모양이다.
미술관앞 광장에는 고야의 동상이 서 있다.
매표소로 가봤다. 매표소에서는 상설전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르누아르전까지 볼 것인지에 따라 표 값이 달랐다. 이 날 가급적이면 최대한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왕궁도 들러 볼 참인데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이 곳 프라도 미술관의 본질과도 많이 달랐고, 르누아르전은 혹시 생각이 바뀌면 그 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에 상설전시표만 샀다. 가이드북 값을 지불하니 안에서 교환하라며 티켓 하나 더 준다. 안에 들어서자 마자 짐을 맡긴 뒤 책과 기념품을 파는 코너로 가서 티켓을 내밀자 직원이 물었다.
"어떤 언어의 버전을 원하세요?"
몇 년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국어 서비스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어 혹시나 해서 물었다.
"한국어 버전이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한국어 버전은 없고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일어 버전이 있습니다."
짐작했던 답변이지만 막상 없다는 소릴 들으니 섭섭한 마음부터 들었다. 아직은 우리가 그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적지 않은 아쉬움부터 들더라는.
처음 들어가 전시된 작품들에 대해 어지간히도 꼼꼼하게 보려 시도했다. 작가의 시각적 위치, 구도, 빛의 방향, 색채 등을 확인해 가며 두 시간여를 감상하고 나서야 어마어마한 작품들중 그 시간을 투자해 몇 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장하다 장해 ㅡ,.ㅡ;) 전시된 작품은 빠짐 없이 보겠다고 작심했던 나는 그 때부터 한번 쓱 들여다 보고 작가의 이름만 확인하고 넘어갔다. 09:30에 입장하며 쉬지 않고 봤지만 14:00가 넘도록 반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미술관 내에 식당이 있었지만 여기서 밥이나 먹으며 시간을 죽일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궁상떨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 안에서의 식비도 무척 비쌀 것 같은 선입감도 작용했다. 작품들을 보다보다 지치면 놓여진 긴의자에 잠시 앉아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돌아다니기를 수차례. 결국 7시가 다 되어서야 한 점도 빠짐없이 보고 미술관을 나섰다. 나중엔 도대체 내가 이 그림들을 즐기는 건지 아님 그림들이 나를 혹사시키고 있는건지 불분명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부에서의 사진찰영은 금지되어 있어 가이드북만 들고 다녔다. 그걸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지만 하루종일 들고 다니니 이 역시 작은 짐도 아니었다. 그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번거롭게 다시 짐을 추가로 맡기기도 뭐했던 탓이었다.
이 곳에서 본 그림들 중 특히 걸출한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퍼다 옮겨봤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벨라스케스, 술마시는 사람들
벨라스케스, 실잣는 여인들
엘그레코, 목자들의 경배
보슈, 쾌락의 동산
쾌락의 동산 3단 중 가운데 부분의 확대된 그림
무리요, 무염시태
고야, 사투르노
수르바란, 정물
수르바란, 놀라스코에 현신한 베드로
미술관 안을 한참 돌아다니다 톨레도의 카테드랄에서 만났던 윤미씨 자매를 또 만났다. 여행지에서 한 번 만났던 사람을 다른 도시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닌데다 이미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무척 반가울 수 밖에. 1층에서 동생과의 재회가 먼저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품 감상을 하다가 흩어진 모양인지 1층을 모두 보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윤미씨를 또 만났다. 지친 다리도 쉴겸 계단 옆 벤치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저녁 약속을 한 뒤 헤어졌지만 그 날의 일정이 애매했던지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어쨌든 예술을 대하는 이들의 진지함이 지금도 인상적이다.
지친 몸으로 미술관을 나와 바로 길건너의 식당으로 가 봤다.
이 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물론 사람이 많아서다. 사람이 많으면 음식이 최소한 형편없지는 않다는 증거다. 벽에는 수르바란과 고야 등의 그림들이 벽에 그려져 있는데 그 섬세함이 본작을 뺨친다. 주문을 한 뒤 화장실 잠깐 다녀 왔더니 살짝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구입한 책자와 카메라가 든 가방이 나 혼자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없어지고 세 사람의 아줌마들이 앉아 있었다. 내 물건들은 또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옆테이블 빈 의자에 놓여져 있있었다. 이들이 앉은 자리에서 멈칫하며 살짝 당황기가 스치는 내 모습이 보였던지 그들이 미안해 하며 일어났다. 혼자 앉자고 그들이 일어나니 괜스리 나도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합석 하자고 하기도 좀 그렇고... ㅡ,.ㅡ;
바르에 앉으신 두 어르신들에게 살갑게 서빙하는 웨이터의 모습에 신사다운 멋이 풍겨 한 컷 슬쩍 찍어봤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로 주문한 치킨 빠에야와 올리브 열매 그리고 맥주. 올리브 열매를 보니 새삼 군침 넘어간다.
미술관에서 구입한 가이드 책자. 포장은 집에 와서야 뜯었다. 미술관 최대의 보물단지들 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 커버를 장식해 더욱 호감이 간다.
식사 후 나오며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한 식당을 찍어 봤다. 부질없는 짓은 왜 했을까. 아쉬움인가... ㅡ,.ㅡ;
한국에서도 흔해 터진 별다방 커피는 애당초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우 한 명이 스타벅스 커피 전문점의 머그잔을 모은다며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곳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셨다. 25리터 밖에 되지 않는 배낭 속에 넣어 올 공간도 부담스럽고 이걸 사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역시 부담스러웠지만 사오길 잘했다는 생각은 엄청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본 뒤였다.
민생고에 후식까지 다 해결되고 지친 몸도 휴식으로 좀 가벼워지자 슬몃 가 보지 못한 왕궁이 서운했다. 이 곳에서 가까운 솔광장이나 함 들러볼까 하던 내 생각을 고쳐 먹은건 다시 걷기 시작하니 다시 다리가 무거워짐을 느낀 뒤였다.
어둠이 깔리고 건물에 조명이 들어오자 멋들어진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일단 쉬고 볼일인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나는 그래도 그냥 자기가 아무래도 좀 맹숭맹숭했다. 무사히 만족스럽게 여행을 마쳤으니 혼자서라도 자축하고 싶었다. 가까운 바르로 가 맥주와 올리브 열매를 주문했다. 혼자 마시다 보니 옆에 앉으신 영국 노인 한 분과 대화가 트였다.
스페인에서 7년을 사신 이 분은 현재 라디오방송국에서 영어방송 일을 하고 있으며 영어 강좌로 부업도 하고 있었다.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벗고 계시던 모자까지 쓰고 포즈를 취하신다.
그 옆에 앉아 계시던 스페인 노인 한 분이 대화에 들어 오면서 가운데 영국 노인이 가운데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오가며 통역했다. 아래 사진은 웨이터 양반이 찍어 주신 사진. 11시가 넘어 자리를 뜰 때가 되자 두 분의 얼마 되지 않는 술값을 내고자 했지만 스페인 영감님은 굳이 사양하며 스스로 술값을 치룬 뒤 나가셨고 잠깐 더 함께 남아있던 영국인 영감님도 사양했지만 한국에서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에 대하여 소개한 뒤 여행 마지막 날 혼자 자축하던 중에 친구가 되어 줌에 감사를 표했더니 웃으며 나의 나의 술값 대납을 기꺼워 하셨다.
2011.1.28(금)
아침이 되어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와 지하철로 내려갔다.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한 처자의 가방에 붙은 딱지에 쓰여진 문구에 나는 웃고 말았다. 재치가 있다.
비행기에 올라탔다. 러시아의 미녀 스튜어디스들이 서빙을 시작했다.
얼굴에 왠지 동양미가 있는 한 스튜어디스. 허락 받기도 뭐해서 슬쩍 찍었다. 선명칠 않다.
곧이어 나온 기내식. 맛은 괜찮은데 전에도 그랬듯이 양은 20% 이상 부족.
항공기를 갈아타기 위해 들어선 모스크바 공항.
환승 대기시간은 3시간으로 그리 길지 않은 편이었다. 공항청사로 들어서면서 짐과 몸검색을 새로 받고 해당 게이트를찾아 한참 걸으니 1시간여 남았다. 이 참에 러시아 맥주 맛은 어떤지 호기심에 함 사봤다. 선입감인지 맛은 약간 강한 듯하지만 대단한 감동까지는 없고 즐길만하다.
일요일 출근 전날에야 인천에 도착했다. 이제 여행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이 번 여행도 만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번 여행기는 대충 정리하는데만도 어지간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두 달이면 끝났을 여행기 정리가 일이 좀 바쁜 것도 있지만 자꾸 미룬 탓에 이 번엔 무려 3개월 반이나 허비했다. 다음 여행지를 궁리하고 준비하느라 자료를 조사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데만도 두 달 정도가 휘익 지나가고, 두 달 동안 준비한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러한 여행기 정리에 보통은 다시 두 달을 소비한다. 이제 나는 다시 또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같은 사이클 한 번 더 돌리고 나면 1년이 그새 간다. 1년 동안 두 번의 보름짜리 여행을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한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 과정 모두가 너무나도 즐겁다.
이 번 여행은 내게 있어 드문 유럽여행이었다. 뜀도령도 걸핏하면 유럽에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나를 장난삼아 트집잡곤 한다. 유럽에 관심도 없다는 사람이 그리스에는 뭐하러 갔으며 네덜란드는 뭐하러 갔었느냐고 핀잔하더니, 이 번엔 스페인 여행이 좋았네 어쩌네 하면 어김없이 딴지가 들어온다. 가 보지도 않고 미리 단정을 해버리는건 나쁜 습관이라나 뭐라나...
네덜란드는 이집트 여행을 다녀 오면서 남는 시간 암스테르담에서 10시간 정도 머물며 구경한 데 불과하다. 사실 내게 있어 관심사항은 남유럽 뿐이다. 그리스는 의외로 밋밋했다. 감동이 밀려올 줄 알았던 파르테논 신전도 의외로 감동은 별로 없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내가 넘 준비없이 갔던것은 아닌가 돌이켜 볼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우선 스페인의 건축문화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른 유럽과는 비교되는 독특한 강열한 느낌의 그 무엇이 스페인 건축에는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이 그중 특히 그러하다. 녹아 내리는듯한 사그라다 파일리아를 본 감동은 지금도 짙은 잔상이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떠날 줄을 모른다. 가우디의 손때가 묻은 곳은 1개의 파사드와 1개의 탑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적은 건축물이었지만 그의 손때가 묻은 파사드는 한 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강열함이 있다. 선축의 기본 개념부터 뒤흔들어 놓았던 카사밀라와 카사바트요의 아름다운 곡선실제로 보고 돌아오니 지금도 눈에 아삼삼하다. 굴곡을 가진 건물 외관은 물론 마치 조각공원 한가운데 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언제 다시 가 볼 기회가 있을른지...구엘 공원의 귀여운 도마뱀도 그립기만 하다.
스페인 건축양식으로 대표적인 무하데르 양식은 건물에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에서 스페인의 강열한 그 무엇이 전해져 오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이 것은 에너지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지만 아라베스크 양식의 아름다움은 버릴 수 없었던지 그 양식을 기독교 양식에 접목해 전혀 새로운 양식을 구축해 냈다. 이 것이 없었어도 스페인에서의 감흥은 반감되었을게 틀림없다. 똑같이 오래된 건물이지만 스페인의 건축물이 유독 눈을 홀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이 무하데르 양식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산 파우 병원, 카탈루냐 음악당, 마리아 루이사 공원의 아름다움은 지금 상상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메스키타 등 아라베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도 잊을 수 가 없다. 특히 메스키타를 직접 보면서 행운아가 된 기분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감명을 말해준다. 다만 메스키타를 온전하게 남겨두지 않고 곳곳을 개조해 기독교 양식을 가미한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뾰족한 아치, 거대 스테인드글라스, 뾰족한 탑과 십자 모양의 형태를 갖추고 수백년간 지어진 고딕 양식의 카테드랄 역시 아름답고 화려하다. 도시마다 누볐던 오래된 골목들이 나를 다시 이 곳으로 다시 끌고 오지 않을까. 마드리드의 왕궁을 보지 못했으니 논하기 뭐하지만 기대와 달리 세비야의 왕궁은 밋밋한 느낌이었으니 논하기를 생략한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또하나의 스페인 문화가 바로 음식문화다.
혼자 먹기에 좋은 작은 병의 와인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크나큰 행복 중 하나였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다 먹지도 못할 와인 한 병을 시킬 수도 없으니 그냥 건너 뛰기도 부지기수였지만 이 곳에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물론 와인보다는 맥주를 더 많이 즐기긴 했지만 말이다. 시커멓고 정감 안가게 생겼지만 풍부한 맛과 입한에 한가득 풍미가 퍼지던 오징어 먹물 빠에야도 그립고, 특히 세비야의 대형마트에서 사다 마신 산 미구엘 맥주, 함께 맛본 올리브 열매의 달콤한 듯 하면서도 은은한 향을 머금은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세비야에서 맛본 구운 오징어는 이제까지 오징어 요리의 새로운 세계를 볼 정도로 독특하고 감동적인 맛이었고, 세비야에서 맛본 쇠꼬리찜도 그렇지만 마드리드에서 맛본 코치니요 아사도의 감미로운 맛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전부터 즐기던 음악이었지만 세비야에서 본 플라멩코 공연의 감동 역시 나로 하여금 스페인을 추억의 나라로 표현하게 만드는 경험 중 하나다. 더 이상은 뜨거울 수도 없는 플라멩코의 강렬한 기타 연주와 혼을 불사르는 창법 그리고 신들린듯한 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멋진 공연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남부 스페인에 머무는동안 저녁마다 보고 싶었던 플라멩코 공연은 늦은 도시간 이동과 공연시기 등의 문제로 단 한 번의 감상에 그쳤던 일이다. 코르도바에서 나만을 위해 플라멩코를 연주해 준 마요도 살짝 그립다.
미술은 또 어떤가. 스페인 역시 서양미술에 빼 놓을 수 없는 토양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거장을 역사속에 묻어 두고있다. 달리, 피카소,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고야, 무리요 등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유한 스페인은 예술적 복이 많은 나라다. 사실 음악이라면 나도 나름 적지 않은 지식을 갖고 있고 즐길줄도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미술 세계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어줍잖은 심미안으로 이따금 감상 시도를 해 볼 뿐이다. 항상 가슴 설레게 하던 고흐의 그림 하나에만 열광하던 나도 이제는 레퍼토리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 같다. 엘 그레코의 과장된 인물 표현과 강렬한 색채감도 이젠 깊숙하게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기 시잓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고야의 작품 세계에서도 이젠 조금씩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인 딥퍼플의 3집 표지에 장식된 독창적 개념의 지옥 그림이 보슈가 그린 쾌락의 정원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이 여행으로 알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좋아하던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왔다는 사실도 내겐 큰 소득이었다. 음악 동호회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 할 꺼리 하나 생겼다.
포르투갈에서의 추억도 이 번 여행에서 가져 온 큰 소득의 하나다. 오랜 향기가 독특하게 남은 리스본의 알파마 지구를 진짜 구식 트램을 타고 다니며 돌아 본 기억도, 그 안에서 만난 매력 넘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도시에 대한 아름다움의 감동으로 크게 자리잡았다. 리스본의 한 식당에서 식사중에 본 네 분의 영감님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미 은퇴는 오래전에 했을 이 노신사들은 친구들과 모여 담소를 나누며 와인을 곁들인 저식식사를 즐기고 있었고, 이는 내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인 관계로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비쳐졌다. 도시 구석구석에서 여유를 갖고 서로를 배려해 가며 살아가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모습에도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파두 카페에서 만나 새벽 늦은 시간까지 함께 즐긴 친구들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과 눈물샘을 자극했던 파두 공연 역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추억이다.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내게는 말이다. 배탈이 나서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 화장실을 찾아 다니던 일들도,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던 일도,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던 일도, 호텔을 찾아 새벽까지 헤매고 다니던 일들도 지금 돌이켜 보면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립고 그립다. 다녀온지 이제 막 3개월이 넘은 시 시점에 벌써부터 말이다. 주착이라고나 할까.
'배낭여행 > 11 스페인·포르투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 이베리아11-3(톨레도) (0) | 2011.05.02 |
---|---|
하이 이베리아11-2(톨레도) (0) | 2011.05.02 |
하이 이베리아11-1(톨레도) (0) | 2011.04.27 |
하이 이베리아10-2(코르도바) (0) | 2011.04.18 |
하이 이베리아10-1(코르도바) (0) | 2011.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