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7(수)
이 날은 아침일찍부터(06:30) 일어나 짐부터 꾸렸다. 그래도 수업 반쪽은 듣고 가려고 8시에 수업을 들어갔다. 이 시간은 노선생님의 독해수업이었다. 수업이 종료된 뒤 휴가가 종료됨에 따라 곧 복귀해야 하고 오늘이 마지막 수업참여라 고한뒤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옆자리 흠래는 공부하기 싫어 몸을 뒤트는 건 이 날도 여전하고 그동안 말문이 트인 태국인 양다청은 섭섭해했다. 두 시간의 독해수업 종료후 나갈까 하다가 다음 수업시간 전 회화담당 여선생님에게 마저 인사하고 가려고 기다렸다. 나가면서 치하의 인사를 하자 여선생님은 모두에게 내가 직장 복귀를 위해 오늘로 수업을 종료한다고 이야기해 버렸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뎅? 휴가를 얻어 온 관계로 보름밖에 함께할 수 없었던 사연과 시안을 들러본 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여지껏 서먹서먹했건만 그래도 간다니 모두가 섭섭해하는 눈치를 보여준다.
두 악당이 도착하기 전인 11시 30분경 치엔먼에 도착했다. 남는 시간 뭐하리. 치엔먼다지에 입구에 있는 별다방으로 가서 커피 한 잔 주문해 들고 창가로 가서 앉았다. 이들은 별다방도 고전적으로 지어 놓은 건물 안에 차려 놓았다. 창밖으로 서양인 부부가 여러쌍 보였다. 관광객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중국인 아이 하나씩 입양한 사람들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이들을 바라보던 나는 아름답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마음의 박수갈채를 보냈다. 12시쯤 되니 지하철 공항선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는 중이라며 전화가 왔다. 약간의 혼선이 있어 낯짝 접선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안반갑지만 반가운척하며 해후(?)한 뒤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아래의 사진부터 인천공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사진 대부분은 뜀도령이 찍은 사진들이다. 내가 가진 카메라가 본전을 뽑은건지(2006년 여름 구입) 배터리를 충전해도 몇 장 못찍고 작동되지 않아 아예 몇 장 찍고 포기한 탓이었다. 다중에 알고보니 배터리 수명이 디돠어 배터리만 새로 구입했다. 사진 찍는건 그나마 뛰도령이 나보다 나았고 게다가 DSLR을 새로 구입했으니 뜀도령은 찍게 놔두고 나는 구경만 실컷 다니니 편하기 짝이 없었다.
정양먼을 지나 점심식사를 위해 간 곳은
그 이름도 럭셔리한 취엔쥐더 카오야! 오예! 이음식점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뜀도령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이후로도 유적지의 역사와 배경에 대한 내용들은 뜀도령의 블로그에서 수시로 퍼오되 별도의 출처는 짐 여그서 한꺼번에 밝힌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력사도시인 북경에는 특색이 짙은 먹거리가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리구이가 첫손 꼽히는 대표적인 료리라 할수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호한이 아니고 북경의 오리구이를 맛보지 못하면 큰 유감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북경의 오리구이는 수백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데 650-700년전부터 황제는 물론 관리들과 부자들의 식탁에 올랐다고 한다.
북경의 구운 오리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제일 먼저 떠올리는것이 전취덕 오리구이인데 그것은 북경의 전통적인 오리구이 력사는 전취덕과 갈라놓을수 없고 또한 전취덕의 오리구이가 북경에서 최고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취덕은 북경에만 해도 전문대가점, 왕부정점, 화평문점 등 대표적인 분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전문대가점이 최고의 장식과 인기 및 맛을 자랑한단다.
1864년에 전문대가에서 오픈한 전취덕 오리구이점은 최초의 닭, 오리를 구워파는 자그마한 점포로부터 지금은 국내외에 81개소 직영점과 련쇄점을 소유한 집단그릅으로 탈바꿈 했다.전취덕 오리구이는 올해 7월에 오픈 145주년을 맞이했으며 지금은 북경은 물론 국내외에 유명한 세계성적인 브랜드로 되였다.
기재에 따르면 청나라 동치년간에 양전인이라는 사람이 장사가 안되여 부도가 난 《덕취전》으로 불리웠던 가게를 사서 본격적인 오리구이를 시작했다. 그러던중 이름난 한 풍수선생을 모셔다 풍수를 봤는데 《덕취전》을 《전취덕》으로 고치면 운수가 대통할것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가게이름을 《전취덕》으로 고쳤는데 그때로부터 장사가 흥성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료해에 의하면 전취덕에서 사용하는 오리는 엄격한 표준이 있는데 오리가 너무 작으면 지방이 적어 맛이 못하고 오리가 너무 살져도 느끼하고 고기가 연하지 못하기에 보통 3-4킬로그램 사이의 오리만을 고집한다. 그리고 오리구이는 온도가 엄격히 통제되는 전제하에서 규정된 시간내에 명화로 구워내는데 그래야만 오리의 지방이 고기속으로 푹 스며들어 비린냄새를 제거하고 일품의 맛을 내게 된다고 한다.
전취덕의 오리구이점에서는 깨끗하게 튀한 오리가죽과 고기사이에 바람을 가득 불어넣는데 그 원인은 가죽과 고기를 분리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에 오리몸체에 엿을 발라 일정한 시간동안 건조시킨후 전취덕 특유의 조미료를 넣고 과일나무 장작으로 구워내는데 그러면 오리고기에서 향긋한 과일 냄새가 풍겨 먹기에도 제격이란다. 전취덕의 료리사들이 식객들앞에서 구워낸 오리를 저미는것도 한가지 볼거리이다. 흰색 모자를 쓴 료리사들은 손님들의 식탁곁에서 먼저 껍질과 고기를 저며내고 마지막에 뼈를 갈라내며 그 뼈로는 담백한 국을 끓여 올린다. 손님들은 엷은 밀가루떡에 오리고기, 파, 오이, 장 등을 싸서 먹는데 그러면 느끼하지 않고 바삭바삭하고 고기맛이 일품이여서 둘이 먹다가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전취덕 오리구이점은 전국의 음식업체중 제일 처음으로 상장한 업체로 되였고 지금까지 1.49억 마리의 구은오리를 판매했으며 최근년간에 수억원에 달하는 순리윤을 올렸다. 전문가들의 계산에 의하면 전취덕의 무형재산의 가치는 12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출처:길림신문(2009.11.04)
안내받아 차지한 자리.
썰렁이 찬바람.
까칠한 뜀도령.
인간성 럭셔리한 코렐리. 자리잡고 앉아 주문한 것은 코스요리로 1인당 360위엔. 이거 넘 럭셔리한거 아닌가?
나오는 요리;마다 맛은 좋다만 왠지 돈을 씹는듯한 느낌은 뭐지? 나오는 음식들 모양새 하나하나가 맛은 물론이고 모양새도 훌륭하다. 음식을 눈으로 먹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여기에 충실한 요리가 이 집 요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연경맥주도 주문해 주시고~~~!
이게 무슨 스프였더라. 맑은 국물에 맛은 더없이 깔끔하더만... 바로 뒤에는 삶은 아스파라거스도 보인다. 이들의 야채요리는 우적거리며 씹는 맛이 일품이다.
뒤이어 나온 오리 고기는 어떻게 요리한건지 몰라도 먹을 때도 별로인데다 왠지 식은 음식 나시 덥혀 나온 것모냥 거시기했다. 이건 내 입맛이 촌스러워서 그런게 아닐까.
이건 새우요리였던 것 같은데
다 먹을때쯤 되자 오리 한마리를 내와 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주는 앞가슴살 껍데기. 이걸 씹으면 기름이 흥건하게 혀와 입안 전체를 덮는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이걸 먹고 느끼하닥 말하곤 했지만 내 입엔 고소하기만 하더구만... ㅡ,.ㅡ;
다음으로 나온 살코기. 고기 한 점을 전병 위에 얹고 채로 썰은 싱싱한 파를 검고 달작지근한 소스에 찍어 같이 얹은 뒤 말아서 먹는다. 이런 젠장 왜 다시 군침이 도는거야...
보는 것만큼이나 고소한 빵.
옆을 지나가던 직원이 먹는 법을 아느냐고 묻길래 안다고 했다. 나는 보란듯이 전병을 한 장 깔고 오리 한 점 놓고 썰어 놓은 파채를 쏘스에 찍어 그 위에 다시 얹고 전병을 돌돌 말아 입안에 넣고 씹었다. 나는 눈짓으로 "어때, 이만하면 제대로 아는거지?" 하며 으스댔다. 직원의 반응은 어이없다는듯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럼 어디 함 해보셔." 하고는 어찌하나 보았다. 나는 숨죽이고 봤다. 전병을 한장 깔았다. 고기를 집어 소스에 찍어 전병의 원 위쪽 반 지점 위에 얹었다. 그 위에 파채를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전병의 반을 접었다. 그뒤 좌 우로 각각 한 번씩 더 접었다. 그러더니 먹으랜다. 우 쒸! 내가 한거나 지가 한거나 뭐가 달라? 나는 파채를 소스에 찍었고 지는 고기를 소스에 찍었고, 전병위에 놓은 뒤 나는 돌돌 말아 먹었고 지는 세 번을 접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그래서 함 따라해봤다. 뭐가 다른가? 난 모르겠는디? 너 짐 장난하는거지? ㅡ,.ㅡ;
오리 뼉다구로 우린 스프. 소뼉다구가 아니니 사골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사골 못지 않게 진하고 구수하다. 중국인들을 설렁탕이나 곰탕을 대접하면 반응이 좋은데 그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도 될랑가 몰라.
달작지근하게 디저트로 나온 에... 에... 그러니깐.... 후식.
연양갱 비스므리한 것과 제과점 빵 비스므리한 거시기.
뒤이어 마지막으로 나온 과일.
배가 그들먹해지고 헐렁했던 곱창이 거만해지자 이젠 눈요기로 관심을 돌린 우리는 정양문을 지나 티엔안먼광창(천안문광장)으로 갔다. 뭐 이날만 유독 본건 아니지만 지하철로 통하는 모든 지하도는 물론 이 곳 광장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가는 사람 하나하나 검색대에 가방을 밀어넣어야 했다. 이유는 뻔하다. 티벳사태와 신장 위구르 사태 이후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를 염려한 모양이다.
티엔안먼광창(천안문광장)의 깨끗한 모습은 이런 아주머니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겠나. 어쨌든 청소하는 풍경이 낯설어 재미가 있다.
마오 주석 기념당. 마오쩌둥이 사망 1년후인 1977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1층 로비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마오쩌둥의 기념상이 있고 로비는 '숭배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인 마오쩌둥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죄 다 들를 시간은 없었다. 우리에게 이 날 북경에서 주어진 시간은 저녁 9시 기차를 탈 때까지인만큼 고궁박물원(자금성)이나 제대로 보면 다행이었던 탓이다. 사실 뜀군과 나는 이미 북경에 와 봤으니 처음 와보는 찬군은 이 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보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인민광장에 면해 있는 곳들 대부분은 나도 방문해보진 않았지만 진짜 볼거리는 이 곳이 아니질 않은가.
인민대회당
# 인민대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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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대회당(중국어 간체: 人民大会堂, 병음: Rénmín Dàhuìtáng)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 서쪽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인민대회당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건설사업인 10대건축의 하나로, 자원봉사를 받아 1958년부터 1959년에 걸쳐 불과 10개월 만에 건조되었다. 중앙의 만명대회당(萬人大会堂), 북쪽의 연회홀, 남쪽의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소 빌딩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합계 17만㎡를 넘는 평면 면적과 300개의 방을 가진다. 33실 있는 회의장에는 중국의 행정구분에 연관된 이름을 붙일 수 있어 각지의 풍토와 관련된 장식이 되어 있다.
인민대회당에서는 매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 인민 대표회의)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2주간부터 3주간의 기간에 행해진다. 전국인민대표회의는 10,000석을 갖춘 대회의장에서 개최되어 그 별실에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열린다. 또 인민대회당의 중앙 홀에서는 5년에 한번, 중국공산당 총회가 열리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자원봉사를 받아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건물 내부의 잦은 붕괴나 배선 고장 등으로 최근 몇 차례 개수 공사가 행해졌다.
내부는 전국인민대표회의나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관람이 가능하도록 개방하고 있다. 관람 시에는 구두 위로 비닐 커버를 씌워 입장한다. 견학 시간은 자주 변동되며, 중국 각지에서 온 단체관광객으로 인해 길어지는 경우도 많다. 만인대회당은 연주회나 연극, 발레 등의 공연에도 자주 사용된다.
중국혁명기념관과 인민영웅 기념비. 역시 통과만 함.
# 인민영웅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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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의 천안문 광장에 있는 중국 혁명 영웅의 현창비로, 1958년에 만들어졌다. 표면(북면, 천안문이 보이는 쪽)에는 모택동이 썼다는 금석문(옛날에는 영웅들의 피를 빨간 문자로 나타냈다)의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 영웅은 영원 불멸이다)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고, 뒷쪽(남쪽)에는 저우언라이가 썼다는 현창문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뒷쪽의 현창문은 다음과 같다.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
三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三十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3년 이래 재인민 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 희생된 인민영웅들 영원이 잠들어 불후하리라 30년 이래 재인민 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 희생된 인민영웅들 영원히 잠들어 불후하리라
복잡한 천안문 광장을 이리저리 돌고 지하도를 통해 드디어 도착한 천안문 광장.
자금성의 어원은 '자미성원(紫薇星垣)'에서 나왔다고 한다. 송사 천문지(宋史 天文志)에 "자미성원은 북두의 북쪽에 있는데 많은 별들이 좌우로 둘러싸고 있으면서 돕고 보호하는 형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단다. 옛날 사람들은 북극성이 수많은 별들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북극성은 영원히 이동하지 않으며, 천제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 했는데 바로 북극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자미성원은 큰곰, 작은곰, 용, 카시오페아 등 170여개들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다. 이 별의 색깔이 '미자(微紫)', 즉 자색을 띠므로 자궁(紫宮) 또는 자미궁(紫微宮)이라 불렀다. 결국 하늘에 있는 '자미성원'의 별자리 이름을 따서 지상의 황제가 사는 궁궐에 붙인 것이다. 천자가 사는 황궁은 서민백성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되므로 '자금(紫禁)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고 지붕은 온통 누런 황색을 쓴 이유는 오행과 관련이 있는것으로 오행에서 천하의 중앙은 토(土)이며, 황색이다. 천자는 천하의 중앙에 서 있다는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하늘을 지배하는 천제의 궁을 지상에 재현한것이 자금성이라는데 글쎄올씨다. 자긍심을 가질만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천하를 지배하는 지배자가 그 곳에서 암살등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과연 마음 편하게 살수있었을까?란 생각이 먼저들었다.
꼼꼼한 뜀군은 이 오성홍기에 대하여도 조사를 해 놓았다. 여행기 정리에 느리적 거리다 보니 이렇게 편할 때도 있군. 허허허...
광장에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나라마다의 국기가 다양하지만 오성홍기는 일단 강하단 느낌이 든다. 1949년 제정된 것으로 붉은 바탕에 황금색 별 5개가 그려져 있는데 큰 별은 한족을, 작은 별 4개는 다른 소수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고 하는데 실은 큰 별은 공산당의 지도를 의미하고, 작은 별은 신중국의 노동자, 농민, 소자산가계급, 민족자산가 계급을 가리키는 중국인민의 혁명적 대단결을 상징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티엔안먼을 지나면 우먼(午門)이 나온다.
단문(端門)을 통과한 후 오문(午門)이다. 북경성의 남문으로 12지 가운제 오(午)자를 사용했으며, 오문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정중앙에 있는 문은 황제의 전용문이었고 문관은 동쪽 문, 무관은 서쪽 문으로 출입을 했으며 지금은 자금성의 입장권을 구입할수 있다.
내가 가진 학생증의 위력이 여기서부터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고궁박물원 입장료는 성인 1인당 60위엔이었다. 사실 싼값은 아니지만 다른 유적지들에 비하면 압도하는 규모와 그 볼거리로 따지자면 결코 비싸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이노무 입장료가 가는 곳마다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의 표는 찬군과 뜀군 두사람의 표로 120위엔짜리다. 나는 학생증이 있는 고로 표를 별도로 구입했다. 20위엔. 1/3 값이니 완전 감동의 도가니.
표를 내고 들어가면서 나는 검표원의 검문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시안으로 가는 장시간의 기차여행중에 마시려고 준비해둔 안동소주가 문제였다. 이걸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안에서 술마시고 추태를 부릴까봐 그러는 건 아닐거고... 짚이는게 있어서 물었다. 일부 지역의 독립움직임을 말살하려는 중국정부의 탄압에 대한 반발세력의 테러 위험때문인 것 같았다.
"위험물질일 가능성 때문인가요?"
"맞아요."
사실 이 곳 고궁박물원은 입구로부터 천천히 훑어본 뒤 후문으로 나면 곧바로 경산공원 입구다. 경산공원의 야트막한 산 위에서 고궁을 내려다 보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다. 술을 갖고 들어갈 수 없다면 맡기고 들어 갔다가 다시 정문으로 되돌아와 술을 받아든 뒤 경산공원으로 빙 돌아 가야 했다.
"그럼 나올 때까지 물건을 맡아 주시면 안되나요?"
"그럼 한 시간 내로 돌아 오세요."
이 어머어마하게 큰 고궁을 한 시간 내로 보고 오라니... ㅡ,.ㅡ; 이건 쉬지말고 끝까지 달리며 대충 훑어보고 나오든지 아니면 보다 말고 돌아 오라는 말이었다. 그러잖아도 문 닫기 전까지 겨우 두 시간의 여유밖에 없는 시각이었다.
"생각 좀 해 보세요. 한 시간동안 이곳을 어떻게 다 보고 나오겠어요?우린 문닫기 전까지 볼 생각인데 좀 도와 주시죠."
아마도 이 사람들 검표 업무가 한 시간 뒤면 교대된다고 하는데 인수인계가 귀찮았던건가... 그들은 물품 보관소를 이용하라고 했다. ㅡ,.ㅡ; 젠장. 그런게 있으면 진작 얘기를 해주지 나하고 괜한 실갱이는 왜 한거야? 어쨌든 저마다 가진 짐을 지고 다니자면 구경하기엔 짐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잘되었다 싶어 짐을 맡긴뒤 5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는 경고를 했다. 지고 들고 있던 짐들을 모두 맡기고 뜀도령의 카메라만 달랑 들고 나왔다.
2005년 여름 이 곳 고궁박물뤈에 와 본 이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 때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중앙의 건물들 중 좌 우에 길게 늘어선 건물들은 공사중 가림막 때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당시엔 구경을 다니면서도 때를 잘 못 맞춰 왔다는 싱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 번에는 그 때 보지 못한 것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지겹도록 더웠던 북경의 날씨는 이 날 따라 제법 날이 좋아 구경 다니기에 무척 좋았다. 4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날씨가 계속된다고 했던 내 말에 긴장들을 하고 왔지만 비교적 선선한 날씨를 접한 뜀도령과 찬바람은 까칠한 사람이 혼자 북경에 들어 오니까 날이 견디기 힘들정도로 덥다가 자기네처럼 쿨한 사람이 들어 오니까 날이 좋아진거라나? 몰매 맞기 싫으면 딴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옥신각신하며 도달한 태화문.
타이허먼(태화문)은 명조때인 1420년에 지어졌고 청조때인 188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재건하였다. 3.4미터 높이의 베이스 위에 박공구조의 지붕을 얹고 처마를 돌출시켜 세웠다. 명조에는 이 곳에서 황제들이 관리들과 조회를 열었다고 한다.
태화전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옛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것이다. 궁전의 높이는 26.92m, 높이가 8.13m가 되는 3층으로 된 한백옥의 수미좌 기단위에 건조해서 전체 높이는 35.05m이다. 가로 11칸, 세로 5칸으로 면적은 2,377m2이다. 그리고 태화전 광장에는 일체 나무가 없다는데 그것은 자객의 은신처를 없애려는 목적도 있었고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할때 새들이 방해꾼이 되는 것을 막기위한 목적도 있었다는데 졸병들이 많이 고생했겠네. 어쨌든 중국의 목조건축 양식 가운데 가장 존귀한 지붕양식으로 산동의 태안에 있는 대묘의 천황전, 곡부의 대성전과 함께 3대 건물로 불리운다.
태화전 내부.
태화전의 후면에 수미좌 기단 위에 건축된 중화전과 보화전이 있다. 중화전은 규모가 작은 정자식 건물이기 때문에 수미좌 기단도 줄어들었으며, 황제가 태화전에서 정무를 처리하기 전에 먼저 중화전에 쉬면서 내각, 예부 대신 및 시위들의 예를 받은 후, 중화전에 보존되어 있는 가마를 타고 태화전에 갔다는데 그냥 걸어가면 좋잖아. 건강에도 도움이 될텐데...
보화전의 뒤편으로 내려다보면 석물조각이 있는데 무게가 250톤의 초대형 조각으로 해수, 상운, 구룡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은 명나라때 조각된 자금성 최대의 석조로 석재를 운반할때 돌이 너무 크고 무거워 겨울철에 길에 얼음을 얼리고 수송을 했다는데 뜻이 있는곳이 길이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
사실 태화전에서는 마눌님인 이태화가 생각이 났고 보화전에서는 예전의 코미디언이었던 김보화가 생각나더만...푸핫 --->뜀도령이 써 놓은 글을 퍼온거지만 썰렁하긴... ㅡ,.ㅡ;
보화전의 뒤편이 전조와 후침을 구분하는 곳으로 후침은 안뜰이라는 뜻의 내정(內廷)이라고 하는데 건청궁과 교태전 그리고 곤녕전의 궁전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황제와 황후의 침궁이며 건청궁은 후침의 첫번째 궁전으로 명청 시기 황제의 침전이란다.
건청문
건청궁은 전면이 9칸, 옆면이 5칸이 되는 건물로 내부의 정중앙에 보좌가 있는데, 전부 금박을 입히고 루비와 에메랄드를 상감했으며 팔걸이와 등받이는 모두 금룡으로 휘감았으며 그 뒤편으로 순치제(順治帝)가 쓴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건청궁과 곤녕궁의 건과 곤은 하늘과 땅을 의미하므로 황제가 거처하는 곳은 건청이며, 황후의 침궁은 곤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개의 궁 사이에는 교태전은 '천지교태(天地交泰)', 즉 음양이 조화하여 만물이 편안하다는 의미를 가졌다는데 이곳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의 역사속에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서 편안한 날이 있었던가?
교태전
교태전의 내부. 교태전 내부의 양쪽에는 고대의 시계가 있는데 동쪽의 것이 물시계인 동호적루(銅壺滴漏), 서쪽의 것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젠마이식(스프링 모터)큰 시계인 대자명종(大自鳴鐘)이 있다.
곤녕전은 명대에는 황후의 침궁이었다는데 청나라 초기에는 심양에 있는 황궁을 모방해서 그 정간(正間)과 서간(西間)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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