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6(월)
새벽부터 쏟아붓기 시작한 비는 잠결에도 첫날 트래킹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아침 7시에 나야풀을 향해 게스트하우스를 떠날 참인데 6시쯤 아침을 먹으러 나갈때까지도 굵은 빗줄기는 멈출줄을 몰랐다. 재남씨와 나는 아침식사를 위해 우산을 받쳐들고 다시 그 티벳식당으로 갔다.
김재남씨는 브렉퍼스트 세트를, 나는 모모와 산 미구엘 맥주를 주문했다. 아침부터 맥주먹는 병 여행만 다니면 도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여행 첨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어쨋든 이 집 야채모모 정말 맛있다.
나는 식당 주인에게 음식 칭찬을 한 뒤 트레킹에서 돌아오면 2명의 친구들이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들을 데리고 다시 올 것을 기약했다.
아침식사 후 숙소로 돌아간 우리는 전날 수배한 차량으로 나야풀을 향해 떠났다. 첫날부터 눈에 띠는 사고차량. 아예 차량이 전소됐다. 여긴 왠놈의 사고가 그리도 많이 나는지 15일 네팔 체류기간동안 내 눈으로 본 것만도 4건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지만 게스트하우스를 떠날 때와 비교하면 많이 잦아든 상태였다. 차안에서 내다보는 구름 먹은 산풍경은 대기의 먼지를 씻어내는 신선한 빗물과 함께 환상적인 경치를 만들어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45분정도를 갔나보다. 나야풀의 도로변 한 가게방 앞에서 우리를 내려준 차량 기사는 기왕에 왔으니 일정을 마치고 포카라로 돌아가려는 트래커를 태우기 위해서인지 이제 막 트래킹을 시작하는 우리의 등딱지가 사라질 때까지 있었던 것 같다.
빗줄기가 잦아들긴 했어도 비가 적잖이 오던 중이라 방풍점퍼를 꺼내 입었다. 조금 걷다 보니 영화속에서 나쁜넘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찍음직한 다리가 나왔다. 기념촬영 안할 수 없지.
오래간만에 트래커들을 봐서 신기했을까. 미간에 티카를 찍은 어린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멀끄러미 쳐다본다. 이마에 찍는건 많이 봤는데 얘는 미간에 찍었으니 좀 특이하다. 그 뒤로도 미간에 찍는 사람은 못봤다.
조금 가다 보니 트래킹 허가증서를 점검하는 사무소가 나왔다. 잠깐 들러 스템프를 받고 나와 계속 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요란하게 흐르는 강물소리를 귀에 담으며 옮기는 발걸음이 가볍다.
강줄기를 따라 20분이나 더 갔을까. 여기에서 또 한번의 허가증 검사가 있었다. 트래킹 허가비가 아까워 슬쩍 입산한 사람이 첫 번째 사무소 직원의 눈을 용케 피해온 사람이라며 여기서 딱걸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걸리면 짤없이 포카라로 돌아가 트래킹 허가부터 받아야 한다.
사무소를 지나면 게스트하우스와 식당들이 있다. 여기서 밀크티 한 잔 했다. 여기까진 음식값이 그리 비싸진 않았다. 20루피였나? 산골로 가면 40루피 받는다. 물론 작은 잔 기준이다.
차 한 잔 마시고 나서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걸으며 보이는 경치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파노라마를 펼쳐 놓아 걸으면서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다가 참을 수 없는 더위 때문에 방풍점퍼를 벗었다. 점퍼를 입고 더워서 흘리는 땀에 젖으나 내리는 비에 젖으나 젖기는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비에 젖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점퍼를 벗어 배낭 안에 구겨 넣었다. 대략 한 시간 단위로 쉬었나보다.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쉬며
맥주를 한 잔 했다. 여기만 해도 맥주값은 상당히 비싸다. 병맥주만 해도 250~270루피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나는 베이스 캠프 근처도 안가 보았으니 고레빠니나 촘롱을 넘어 베이스캠퍼 쪽으로 더 올라가면 그놈의 맥주값과 음식값은 어느정도까지 치솟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좌우지당간 여기서 마신 맥주 한잔이 고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숨차고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트래킹을 마치는 그날까지는 두 번 다시 맥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멋도 모르고 맥주를 한모금 넘기고 흐믓해하며 한 컷.
오래 쉬면 늘어지게 마련이다. 잠깐 쉬고 다시 길을 떠나는데 거의가 완만한 경사만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알콜결핍증을 해소한 댓가는 적지 않았다. 아~~~! 이거 밥먹고 힘내야 할 것 같은디?
열두시가 넘었다. 눈에 띠는 식당 야외 테이블에 일단 주저 앉았다.
볶은국수를 야채옵션으로 하나 시켰다. 맛은 그냥저냥 먹을만한데 웃기는건 야채의 양이 아주 적다. 사실 말이 야채지 산나물이다. 이름 붙여 '무공해산나물볶음국수'다.
다시 길을 떠났다.
수시로 중간중간에 크고 작은 폭포가 눈을 통해서나마 시원함을 안겨준다.
가다가 만난 산골 아이들. 엄마 아빠는 일을 나갔는지 아이들만 놀고 있었다.
나그네가 와서 들여다 봐도 신경도 안쓰고 싸우지도 않고 노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
여기까지의 여정은 그래도 봄날이다. 여기서보턴 급경사의 돌계단이 트래킹 끝날 때까지 나온다. 아래의 사진은 내리막길을 찍은게 아니고 올라가던 도중 뒤돌아 찍은 사진이다. 주구장창 이런 길만 나왔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바로 스틱의 위력이었다. 산을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친구들 따라 오르곤 하는 편인데 경사가 많이 진곳에선 적잖이 다리가 땡겨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스틱을 쓰니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잖은 짐을 지고도 공짜로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코르사의 말에 따르면 스틱이 체중의 30%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나.
일기를 기록한 수첩을 잃어버려서 도착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첫번째 숙박예정지인 울레리에 도착한 시간은 대충 오후 2~3시경이나 되었을 것 같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한 소년이 인사를 건네며 숙박은 정했느냐고 물어온다. 영업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져 생깠다. 우리는 숙소에서의 전망을 고려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을 숙박지로 잡고자 했다. 꼭데기로 올라가 롯지 하나를 들어가 보았다. 방 좀 보자고 했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열쇄를 가질러 갔다 올테니 기다리란다. 그런데 그 롯지에는 젊은 애들이 같은 층에 묵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봐선 투숙객은 아니고 동네 젊은이들인 것 같다. 왠지 꺼려졌다. 시끄러울 수도 있고 간혹 트래커들이 도난도 겪는다는데... 그래도 일단 방을 보고 결정할려고 했다. 이 곳 주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되돌아와 하는 말이 열쇄를 못찾겠단다. 이게 먼소리여? 아무리 비성수기란다지만...? 어쨋든 잘됐다. 다른데로 가보기로 했다. 전망 좋은 집을 하나 더 발견했지만 공사중이었다. 주인이 나와 우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생까고 걍 내려왔다. 이 집이 어떨까 했던 마지막 집은 마을 입구에서 처음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던 바로 그 소년의 집이었다. 방을 하나씩 쓰기로 하고 물어보니 방값이 50루피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50루피(850원)라고? 최소 200루피인걸로 아는데? 비성수가 손님을 잡기 위한 당근이었다. 음식값이 비싸기 때문에 방값은 거저 줄테니 밥이나 팔아달라는 의도였다. 사실 음식값이 많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저 아랫동네로부터 모든 물자를 실어와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는 가격임을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식당에서 내려다 보는 전망도 아주 훌륭하고
방에서 내려다 보기에도 아주 좋았다.
1층은 주방과 주인의 생활공간이고 2층에는 투숙객들을 위한 방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방은 산중 게스트하우스 치고는 운치도 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오랫동안 손님이 없었다는 티를 내는지 창문틈에 거미줄이 그득했고 주인공인 거미까지 기어 나왔다. 방값도 안낸 놈과의 동거를 용납할 수 없어 지그시 눌러줬더니 기냥 속터진다. 원래 3인실인데 혼자 썼다.
엉성하지만 발코니도 있고 빨래 널기에도 그만이었다. 전에는 타잔놀이를 방안에서만 했는데 2층에 재남씨와 나밖에 없으니 전체 공간이 내꺼나 다름없어 2층 전체를 두고 타잔놀이를 했다. 이게 왠 횡재냐.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바깥에 내다 보이는 짐노새의 행렬이 보였다. 사실 트래킹 구간은 처음 트래킹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쇠동과 말똥으로 범벅이었다. 소는 마을마다 우유와 고기를 대는 중요한 수입원이니 그렇테고 고산지대로 물품들을 실어나르는데 중요한 수단인 노새들의 똥도 장난아니게 쏟아낸다. 흥건하게 물이 고인 바닥에 풀어진 똥, 비에 맞아 흩어진 똥, 적당한 습기때문에 떵파리가 드글드글한 똥, 갓싼 신선한 똥은 피해 가기도 정말 바쁘다.
산은 구름 하나의 변화에 시시각각으로 표정을 바꾼다. 방금 보았던 산의 풍경은 1분만 지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충 짐을 부려 놓고 빨래도 해서 널고 나니 저녁식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6시쯤 밥먹게 해달라며 미리 주문을 넣었다. 우리는 닭고기볶음밥을 주문했다.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닭고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당을 기웃거리는 닭은 꿩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소년은 이웃집에 닭고기가 있는지 알아볼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나갔다. 생각해 보니 성수기같으면 닭을 잡아도 계속 소빅사 있을 테지만 우리의 소량주문때문에 닭을 잡고 나면 오랫동안 묵히거나 가족을이 먹어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후 역시 닭고기볶음밥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야채볶음밥을 시켰다. 밥값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150~180루피정도였던것 같다. 여기에 차(40루피)나 250mml 들이 병음료(70루피)를 추가하면 더 들어간다.
남는 시간동안 우리는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그 곳에는 많은 마을 청소년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었는데 실력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웃 마을과 곧 경기가 있는데 마을의 자존심 외에도 적지 않은 상품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의 왼쪽 건물은 이 마을의 도서관이고 오른쪽 건물은 교실이 있는 본관이라고 한다.
자그마한 마을 구경도 워낙 작은 탓에 금방 끝났다.
주문한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주문과 함께 밥솥에 쌀을 씻기 시작했고 야채를 다듬어 볶음밥이라는 음식이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배가 무척 고팠다. 배가 덜고팠나. 음식맛이... ㅡ,.ㅡ; 담날 아침에 만난 한국인 트래커는 바로 아랫쪽 롯지에서 잤던 모양인데 쌀에서 냄새까지 나더라나. 난 운이 좋은 편이었군.
늦은 시간이 되자 둥근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밤이 되니 어김없이 비가 왔다. 물론 장대비로 무지하게 쏟아댔다. 해도 일찍 지고 할 일도 달리 없으니 9시쯤에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일정이 만만치 않았으니 잠도 달콤했다.
2009. 7. 7(화)
울레리에서 고레빠니까지는 계속 오르막길만 이어지지만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닌 탓에 이 날 일정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공기가 좋은 곳이라 그럴까. 전날의 피로는 간데 없이 말끔하다. 빨래를 걷으려고 나간 발코니 저멀리에는 구름에 살짝 가린 안나푸르나사우스봉(아마도)이 눈에 들어온다. 네팔 와서 처음으로 보는 설산 피크다.
신비감마저 감도는 설산이 구름에 살짝 가려진 모습은 적잖이 감동적이었다.
아침에는 팬케익(90루피 --- 아마도)과 밀크티(40루피) 한 잔으로 가볍게 때웠다. 내가 만들어도 이 것 보단 나을 것 같다. 점심 먹을때까지 간단하게 먹은 아침식사는 내게 적잖은 후회감을 안겨 주었다.
설산은 내게 자신의 일부나마 잠깐 내밀고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조금 더 지나니 내가 묵고 있던 이 게스트하우스는 구름에 완전히 덮여버렸다.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마을을 떠나면서 지나가던 한 가게집을 지나가다 보니 아이들이 오밀조밀 몰려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이 중엔 전날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자주 보던 아이도 섞여 있었다. 그 아이의 집이었던 모양이다.
가다가다 휴식을 취했던 곳 중 한 곳에는 한 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몇 컷 담아 보았다. 크면 남자들 깨나 울리겠다.
큼직한 물가가 나오자 나는 그냥 쉬고 싶어졌다. 물가에 앉아 물과 과자를 꺼내 먹으며 지친 몸을 쉬었다. 동행자는 먼저 앞서갔다.
멀리간 줄 알았더니 손오공 발바닥(?) 이었다. 100미터 못미치는 곳 간이 식당에서 차를 마시며 오다가다 만난 한국여인(40대중반?)과 네팔인 남자(28세?)의 커플과 함께 담소중이었다. 나는 출출한 김에 네팔 라면을 맛이나 보자고 주문했다. 인도라면 보다는 좀 못하지만 먹을만은 하다. 먹다보니 신라면 생각이 간절해진다. 간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먹고 나니 그들먹해진 탓에 이게 점심이 되었다.
고레빠니에 도착한 시간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트레킹코스에 잡은 곳중 가장 고지대(해발 2,850미터)였다. 이 곳에서 코스를 조금 벗어나 푼힐에 오르면 해발 3,100 이다. 이 곳에서 안나푸르나 와 마차푸차르 등의 피크를 볼 수 있는데 낮에는 구름에 가려 안보이고 새벽 일찍 올라야 한다. 뙤약볕 아래 담요를 쓰고 주무시는 이 할머니 참으로 특이해 보여 한장 담았다.
우리는 쇠똥과 말똥이 눈에 거슬려 좀 더 깨끗한 곳을 찾기 위해 더 걸어 올라갔다.
가다 보니 앞마당에서 마른 빨래를 걷는 할아버지의 인상이 좋아 한장 찍자고 했더니 뭐라고 혼잣말을 하신다(찍긴 뭘 찍어 시골 촌부를 챙피하게... --- 아마도) 나는 쫓아가서 찍어 봤지만 하시던 일만 하고 도대체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다. 기대 미만의 사진만 한 장 찍은 뒤 인사하고 나왔다.
이 곳 고레빠니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집을 찾아 보았다. 이 마을에선 전화도 되고 인터넷도 된다고 한다. 마을 꼭데기 가까운 곳에 작은 광장이 있고 이 곳에 불교 설치물과 힌두교사원이 나란히 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사진아래 왼쪽 빵모자를 쓴듯한 설치물은 부처님이 가진 지혜의 눈을 상징하는 설치물이며 오른쪽에는 작지만 시바신전이다.
황소를 탄 시바신의 인형,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쉬 신, 가부좌를 한 빠르바티 여신(아마도) 그리고 부다까지 그 안에 있다.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원이다.
이 집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다. 우리와 반대편으로 가던 사람들이 여기서 묵었다고 했다. 고등학생 아들 둘을 데리고 트래킹을 하는 멋진 아버지였다. 그는 여기서 1000루피를 들여 닭백숙을 먹었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소담스럽게 담겨진 고기를 푸지게 먹고싶던 차에 그가 말한 집에서 묵기를 바랬고 굳이 찾아간 이 집이 바로 그집이었다. 숙박비는 방 하나에 무조건 200루피이며 깎아보려는 내게 그 이하로는 절대불가하다는 까칠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도 내 눈엔 이집이 그나마 가장 나아 보였다. 이집 이름이 뭐였더라? 푼힐 게스트하우스였던가???
2층 복도
욕실 겸 화장실
내가 묵은 방. 이 번에도 각자 방을 하나씩 썼고 트래킹을 마칠 때까지 나는 독방만 썼다.
불교의 상징물인 이 깃발 산골에서 자주보게 된다.
1층 식당 겸 리셉션홀
이미 구름이 많이 끼어 지는 해도 볼 수 없었다. 해는 도둑놈처럼 알게모르게 슬쩍 졌다. 우리는 닭을 한 마리 잡아서 통째로 요리를 해줄경우 얼마면 되겠는지를 물었다. 그는 1600루피를 말했다. 친구가 이집에서 1000루피에 먹었다고 했더니 1500을 부른다. 나는 100루피 더 엊어서 1100루피로 합의했다. 내가 직접 요리하겠다고 했더니 자기로 코리안 스타일을 아니까 직접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게 다 속이 있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암탉을 골라 그에게 잡아달라고 했다. 조리해서 나온 백숙과 죽은 맛이 제법이다. 그런데 염통, 똥집, 간은 없다. 어차피 두사람이 다먹지도 못할 양이니 그정도야 준다 쳐도 허락없이 앞가슴살까지 빼돌리는건 좀 그렇지 않나? 주길롬. 그래도 어차피 둘이는 다 먹지 못하니 걍 눈감아 줬다. 그닥 친절하지도 않은 집이었다. 푼힐은 몇 시쯤 가면 좋을지를 쥔놈에게 물어 보았다. 새벽 4시쯤 나가는게 좋단다. 그래서 일찍 자기로 했다. 저녁을 푸지게 먹고 나자 잠도 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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