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9(월) 계속
바알벡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나는 경수부터 찾을 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론니에 소개되어 있는 호텔 중 하나가 눈에 띠길래 안으로 들어가 코리안 보이(경수)와 러시안 레이디(타냐)가 혹시 여기에 묵고 있는지 물어 봤다. 아무래도 특이한 팀(?)이라 다녀 갔거나 묵고 있다면 금방 알아들을 터였다. 숙박비만 물어보고 기냥 휙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흠.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어마어마한 바알벡의 유적 일부였다. 나는 생각을 바꿔 경수가 묵는 호텔은 나중에 찾기로 하고 문닫기 전에 이 곳 유적부터 둘러볼 생각이었다. 비는 아직도 부슬부슬 오고 있고 하늘은 적당히 우중충한게 사진촬영에 잼벵이인 내가 찍어도 쓸만한 사진이 좀 나올 것 같다.
나는 부슬거리며 오는 비를 맞아가며 매표소로 갔다. 쿨맥스 등산재킷과 바지의 표면은 거의 젖었지만 속은 조금도 젖지 않고 뽀송뽀송해 지금 오는 잔비가 오히려 운치를 더해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 곳 바알벡은 페니키아의 신 바알(Baal)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는 Heliopolis(태양의 도시) 라고 이 도시의 이름을 명명했었다고 한다.
바깥에서도 얼핏 일부나마 유적이 들여다 보였고 유적 울타리 바깥에도 일부 유적이 있는데 울타리만 쳐 놓아 공짜로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유적지 입구 가까이에 이르자 유적의 일부인 담벼락에 사용된 돌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런 돌 하나 하나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다 썼으며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하게 건설된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표를 사서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포코트(Forecourt)와 프로필레아(Propylea)가 보이고 계단을 오라서면
양쪽을 으로 두르고 있는 벽 두께의 어마어마함에 경악을 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건물이었길래 이런 엄청난 두께로 돌벽을 쌓았던 건지...
안으로 들어가면 대광장이다. 대광장에 들자마자 보이는 왼쪽 기둥과 건물의 유적
오른쪽
정면으로는 주피터신전의 거대기둥이 보인다.
이 곳은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무척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곳의 부조는 오랜세월의 풍파를 견뎌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사람이 없다 보니 카메라에 다리를 설치해 놓고 안해본 포즈 없이 혼자 셀카놀이를 실컷 했다. 찍고 보니 적잖이 먹은 나이에 주책이다싶어 안올린 사진도 더러 있다.
여섯개만 남은 이 어마어마한 기둥은 이곳 바알벡 유적에서 본 중 가장 인상적이다.
이 기둥은 주피터신전의 일부로 AD 60년경에 세워졌고 이제 남은 것이 이들 여섯개의 기둥이지만 이 어마어마한 기둥의 크기로 보아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의 장엄한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내가 했던 초등생 연령의 셀카 놀이중 하나는 기둥 전체가 배경으로 잡히는 위치에 카메라에 다리를 설치하고 10초 타이머를 이용해 이 기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이 사진은 몇 번을 실패했다. 셔터를 누르고 발바닥이 안보이게 뛰어가 기둥 아래서 돌아서기도 전에 사진이 찍혀버리는 통에 결코 쉽지 않았다. 그만큼 기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어떤 때는 달리고 있는 뒷모습이 찍히기도... 셔터를 누르고 정신없이 뛰다 보니 도착한 곳이 가운데가 아닌데다 너무 밝게 찍혔다(아래 사진). 정신 나간 넘 모냥 이리뛰고 저리뛰고 해서 적당한 밝기에 정중앙에 내가 위치해서 간신히 성공은 했지만 나중에 편집하던 과정에서 지워먹었다. ㅠㅠ 어쨋든 이 사진을 기를 쓰고 찍은 이유는 이 기둥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내 키는 179cm. ㅡ,.ㅡ;
이 사진은 주피터 신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커스신의 신전이다. 로마시대의 기준에 이 신전은 비교적 작은 규모에 속한다는데 도대체 큰 규모면 어느 정도이길래 이 신전의 규모만도 경악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AD 150년경에 세워진 이 신전은 후에 비너스신에게 바쳐졌단다. 이런 배신자들 같으니 신을 마구 바꾸었구만. 바커스 신한테서 술한잔 얻어먹을 때는 언제고 그 술에 알딸딸해지니까 섹시한 비너스신의 유혹에 기냥 무너진 모냥이구면.
바커스신전으로 내려가 보았다. 아래 사진의 가운데 출입문의 안쪽은 출구로 통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미 불을 다 꺼버렸다. 문닫을 시간인 모양이다. 저 안에 박물관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결국 박물관 관람은 포기.
바커스신전의 규모에 압도 당한 나는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바커스 신전 옆에서 올려다 본 주피터 신전의 기둥
바커스 신전으로 올라가 보았다. 계단도 무척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외벽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지붕은 이미 무너지고 없다.
사원의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또 배경사진을 찍어 보았다.
바커스신전에서 본 주피터신전의 기둥. 로마유적이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 곳에서도 특히 바커스신전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나는 왠지 주피터 신전에 남아 있는 6개의 기둥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고 이 안에 있는동안 내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로선 변두리중에도 최외곽의 변두리였던 이 곳 바알벡에 로마인들이 이런 건축물을 세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로마의 신들을 위한 신전을 지어 동화시키려는 목적도 강했겠지만 이러한 어마어마한 신전을 세워 둠으로써 로마의 위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반란의 기를 죽이고자 했던 것이리라 추측해 본다. 아님 말구.
이 때까지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잠시 피해 보았다. 날도 적잖이 쌀쌀한 편이었다. 옷이 젖지 않고 장갑까지 끼고 있으니 별문제 없지만 카메라의 습기가 사진 영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잠시 출입구에서 비를 피하며 실루엣을 이용해 또 직찍놀이를 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싫증이 나지 않는 이곳을 본데 또보고 본데 또보는 철저한 복습을 했다. 관리인이 남은 관람객이 없는지 둘러보는 동안 나는 일부러 바커스 신전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사람이 워낙 없었던지라 대충 둘러보고 나갔는지 이젠 관리인도 없고 나만 남았다. 나야 원래 혼자서도 잘해요 스탈이니 내 세상이 따로 없다. 주피터 신전과 바커스신전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이 곳에서 나갈 땐 너무나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노땅의 철없는 행복은 여기서 나갈 때 조낸 황당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통로를 따라 저 멀리에 있는 출입구로 가니 유리벽면과 굳게 잠긴 문이 나의 진로를 차단한 것이다. 안되면 쉽사리 다른 길을 찾는 나. 미련을 버리고 출구로 되돌아가 보았다. 역시 잠겨 있었다. 이미 다 본 사람들인지(사실 안에서 이 사람들 못봤다) 아니면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들어가 보겠다고 몰려와서 잠긴문을 이제 막 확인한 사람들인지 몰라도 일단의 여행객들이 모여 있다가 나를 보더니 뭔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 어쩌다 갇혔냐는둥, 문 닫히는 시간을 몰랐냐는둥, 나올 방법이 있겠냐는 둥 잔소리 일색이다. 나는 출입구 옆으로 이어지는 강철로 만들어진 철책을 쳐다 보았다. 위쪽은 뾰죽하게 창모양으로 되어 있어 넘다가 주저 앉거나 그 위로 엎어지면 본전도 못뽑을 상황이다. 월책을 시도했더니 어떤이는 내가 관리인을 찾아 연락해 볼테니 위험한 일을 시도 하지 말라는둥, 지금 하는 일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둥 역시 잔소리 일색이다. 자신있게 월책을 시도했던 나는 결국 겁을 집어 먹고 포기했다. 좀 있으니 누군가 영양가 있는 소리를 했다. 반대편으로 돌아오면 관리인들의 출입문이 있는데 아마도 그 곳은 밖에선 못열어도 안에선 열릴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나는 유적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그가 말한 곳으로 가보았다. 과연 쪽문이 있고 안에서는 열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못나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고 혼자서 미로찾기놀이 하는 기분이었다. ^^
이 곳을 나온 나는 경수가 묵고 있는 호텔부터 찾아다녔다. 시장기가 몰려왔다. 나는 가게방에 들어가 맥주가 있는지를 물었다. 없단다. 이 근처 어디에 맥주를 파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섭섭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이걸 마시라면 내주는데
얼핏 보고 그래도 알콜음료니까 내줬겠지 싶어 믿고 따봤다. 마셔보니 애플주스였더라는... ㅡ,.ㅡ;
과자 하나를 사서 대충 허기를 달랜 뒤 론니를 뒤져 보았다. 이 곳의 과자 맛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만든 과자하곤 비교도 안되게 맛이 좋았다. 론니의 소개로 나오는 호텔 중 가장 싼호텔에 묵고 있을 것 같은 지레짐작에 뒤져보니 그중 가장 싼 호텔이 아시 샴스(Ash-Shams)호텔이었다. 찾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프론트에 타냐와 경수가 TV를 보고 있었다. 경수는 내가 레바논 시내를 돌아다닐때 탈랄호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호텔 프론트가 있는 층이 문을 여는 시간(09:00)이 지나도 열리지 않아(사실 호텔이 24시간 영업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문을 잠그고 찾아오는 고객은 물론이고 다른 층이나 별관에 이미 투숙하고 있는 객까지도 박대를 하니 어이가 없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와 베이루트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호텔사장이 봤을 때는 이미 짐싸서 방을 나섰고 돈도 내지 않은 상태이니 숙박비와 맥주값을 떼먹고 도망간 도둑놈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던 나는 시내 관광을 마저 다녔다. 호텔ㄹ고 돌아간 나는 나로 하여금 문밖에서 기다리는데 허비하게 한 시간과 체크아웃을 위해 되돌아오느라 허비한 시간까지 하소연하여 사장의 사과를 받긴 했지만 도둑이 되어 있었을 줄 그 땐 생각도 못했다. 우라질. 어쨋든 두 사람은 이 곳 호텔 투숙객의 전체였고 이제 내가 들어 세사람이 전체 투숙객이 된 셈이다. 나는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아님을 아는지라 그들과 같은 도미토리 방으로 배정받았다.
호텔 응접실과 우리가 묵은 방입구.
안에는 세 개의 침대와 난로가 하나 놓여 있다. 난로는 얼음장이고 한쪽 구석에 설치된 세면대는 더운물 꼭지가 없다. 손씻기가 두렵다. 양치질도 두렵다. 우리는 체크인 하면서 난로 때는 경비를 별도로 냈다. 아저씨는 기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기름이 오거든 그 때 난로를 때워 주겠다고 했다. 결국 그날 기름 배달이 안된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샤워는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온기 없는 난로를 옆에 두고 잤다. 만일 침낭이 없었다면 얼어 죽었을 것 같다. 타냐는 침낭 없이 잤지만 살아남았다. 경수가 타냐와 같이 다니게 된 데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여행중 왠 러시아 여인이 어딘가 가는 길을 물었단다. 자신의 목적지를 말했더니 자기도 그 곳에 간다며 같이 가자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동행을 했단다. 그 이후 열흘이나 되는 날들을 떨어질 생각도 안하고 주구장창 따라다녔다고 한다. 길을 헤매면 같이 알아보는게 아니고 옆에서 두 손 놓고 경수만 쳐다보고 있고, 이야기 상대가 없는 곳에 있거나나 장거리를 이동하는 상황에서 이야기 상대라도 되면 좋겠지만 그녀가 하는 영어는 영어가 아니었고, 게다가 동행(?)이 생긴 만큼 여행중에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나 친구사귐도 안되고, 그렇다고 힘든 여정 끝에 맥주 한 잔 내놓는 법이 없더란다. 얻어 먹는 일도 없고 사주는 일도 절대로 없더란다. 더욱 특이한 것은 가정이 있는 여자란다. 남편은 다쳐 입원했고 애들은 친정 어머니한테 맡겨두고 왔단다. 이 대목에서 나도 경수도 어이없어함. 헤어지고 싶어 일부러싫은 내색도 해보았단다. 모른척 하더란다. 쉽게 말하자면 찰거머리 이방인이군. ㅡ,.ㅡ;
우리는 식사를 하러 나갔다. 이 날은 시장기도 시장기려니와 무슨 종류의 고기가 되었든 접시에 소담스럽게 담아 푸지게 먹고싶었다. 이 곳은 쓸만한 식당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군것질거리가 아닌 음식을 파는 곳을 한군데 찾아냈다. 나는 양의 혀(5,000LL)와 같이 마실 콜라(1,000LL)를 샀다. 맛은 좋은데 같이 먹을 샐러드도 마땅치 않아 오이지 같이 생긴 것이 진열되어 있길래 좀 달라고 했더니 걍 서비스로 먹을만큼 준다. 맛은 영락없는 한국의 오이지다. 여기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맥주를 사러 갔다. 경수는 간만에 마시는 맥주가 입맛을 버리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너스레다.
나는 경수와 함께 맥주를 사러 약간 외진 가게까지 갔다. 맥주가 있기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에페스가 있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큰 캔으로 6개를 샀다(개당 1,500LL) 경수는 안주거리로 견과류를 조금 샀는데 값이 만만치 않다. 타냐는 콜라도 안마시고 맥주도 사양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상태에서 민생고도 해결했고 잠자리 들기전 한담을 나누며 마셨던 에페스의 맛은 두 달이나 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립다. 바알벡이여! 그 곳에서 마신 에페스여! 담날 나는 레바논 국경을 넘어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가 다시 국경을 넘어 요르단 암만으로 간 뒤 남부의 와디무사로 갈 참이었다. 두 개의 국경을 지나 세 개의 도시를 거쳐야 하는 대장정이다. 낼 아침 나의 이동경로를 알게 된 타냐는 자신도 다마스쿠스로 갈 참이라고 한다. 경수와는 목적지가 다르니 나와 함께 가겠단다. 나는 경수를 쳐다 봤더니 너무 좋아 입이 뒤통수까지 찢어질 지경이었을테지만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낼 페트라로 갈 참인데 넌 이미 다녀 왔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어차피 나와 가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난 이제 페트라와 암만의 일정만을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뭔가 염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은 팔미라로 갈 참이란다. 왠지 모르게 경수는 죄도 없으면서 내게 미안해 했다.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서 경수와 서울에서의 재회를 기약하였다. 맥주를 사서 호텔로 돌아오며 보이는 조명에 비친 바알벡 유적이 아름다워 한 컷 담아 보았지만 아래의 사진 정도밖에 안나온다.
2008. 12. 30(화)
다음날 아침 타냐와 나는 대충 씻고 경수가 주는 걸레빵과 치즈 그리고 토마토로 아침식사를 대충했다. 경수와의 작별인사를 마친 후 호텔을 나서자마자 버스가 한 대 서서 당연히 우리가 탈걸로 아는지 타란다. 다마스쿠스로 갈 세르비스를 타려 하는데 승차장을 가는지 확인차 물었다. 이 차를 타고 간 곳은 지금 기억에 차우라였던 것 같다. 다시 세르비스로 갈아 탄(6 달러) 우리는 11시가 되어서야 다마스쿠스의 알 수마리아 버스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아래의 사진은 레바논 국경을 넘는 과정에 찍은 것 같다.
알 수마리아에 도착한 나는 우선 타냐의 팔미라로 가는 길을 알아봐 줄 생각으로 터미널 안으로 들어 가다가 요르단으로 가는 세르비스 호객자를 만났다. 요금을 물어보니 700 시리아 파운드란다. 바가진 아닌 것 같다. 나는 합승할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타냐의 팔미라행을 도와 주려 했는데 그녀는 작별인사도 없이 어느새 휙 가버렸다. 경수와 내가 나눈 대화를 어감으로 잡고 삐져 있었던걸까. 그러고 보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어쨋든 나는 이 곳에서 세르비스를 타고 요르단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암만에 오후 세시에 도착했고 페트라가 있는 와디무사에는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이틀간의 레바논 여행도 마무리를 했다.
만 이틀간의 여행을 마치고 아침 일찍 레바논을 떠나며, 특히 바알벡을 떠나며 무척이나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이 번 여행에서 둘러본 4개 중동국가들 즉, 터키,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중동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무척 상냥하고 친절하다.
유대교라면 적대적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종교에 대하여도 무척 관대하고 개방적이다.
어느 구석진 어두운 거리를 밤늦게 싸돌아다녀도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들 중동의 국가들이 분쟁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어 무척이나 다니기 위험한 국가들이라는 오해는 이들이 서방언론의 변두리에 있어 어쩌다 분쟁이 생기면 그제서야 거명된다는 점과 서방인의 시각에 비친 언론에 의한 왜곡이 크게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회교사원의 아름다움과 신앙인으로서의 경건함 등이 내가 받은 이들에 대한 공통된 인상이다.
하지만 레바논은 이러한 점들을 다른 중동국가들과 공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중동 국가들과 다른 그들만의 특색이 매우 강렬하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사막만을 보아 왔던 중동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레바논 대부분의 지역은 녹지로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녹지와 함께 어우러지는 잘잘한 바위들은 녹지를 더욱 아름답게 꾸민다. 그 안에 듬듬이 들어선 집들은 한 폭의 풍경화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바닷가를 달리는 도로위에서 느끼는 감동은 거의 환장수준이다.
중동의 숨은 보석이라 불려지는 베이루트의 경우 유럽처럼 고전적인 건물들로 즐비하고 거리가 깨끗하고 세련되어 유럽의 한 구석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유럽과 차별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건물들은 거의 모두가 황색 계열의 칠과 마감재로 치장해 은은하고 따스하면서도 풍요롭게 느껴지는데다 회교국의 고전미가 넘치는 사원들이 혼재함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독특한 도시분위기와 건설 양식이 바로 이들의 지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럽을 따분하게 생각하는 내가 유럽을 닮은 이 곳 베이루트에 황홀해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중해를 전면에 두고 석양이 지는 비블로스의 유적과 주변 녹지. 그리고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이 완벽한 도시 비블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레바논의 다른 도시들도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오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이 도시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릴 것 같다.
완전히 시골구석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소도시(소도시라기 보단 작은 마을이란 말이 합당하겠다)를 이루고 있는 바알벡. 그리고 그 곳에 장엄하게 우뚝 선 로마의 유적(유감스럽게도 이 것이 그들의 유적이 아니긴 하지만)과 유적을 적시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지금도 강렬한 인상과 감동이 머리와 가슴에 담겨 감상에 젖게 하곤 한다. 이 곳에 독특한 양식의 회교사원이 있는데 시간 관계상 그 곳을 들러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요르단 페트라의 유적에 욕심을 둔 나는 남부 도시 티레와 시돈을 간과하고 레바논을 떠났다.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다지 레바논의 특색이 강하지 않은 관계로 시간이 정 없다면 간과해도 좋다는 말에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지만 다음에 가면 이들 두 곳도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곳 레바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중 하나는 차도르를 뒤집어 쓴 여인네는 거의 보지 못했고 가는 곳마다 기독교회당이 엄청 자주 눈에 띠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것이 개방적인 중동 사회의 분위기가 이 곳 레바논에선 한 층 더 강하다는 반증으로 여긴다. 게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무역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민족과의 혼혈로 인해 레바논의 처자들은 눈부실 정도로 미모가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중동 여자들의 미모가 알려져 있지만 레바논이 특히 그러하며 더욱 재미있는 것은 군살이 많은 다른 중동의 여자들과 달리 군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녀 온지 이제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다녀온 곳 모두가 그렇지만 내 눈을 통해 담아온 레바논의 잔상이 벌써부터 그리움으로 그 땅을 목말라하게 만든다. 다시 가고싶다. 나를 매혹시킨 바로 그 레바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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