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2일(목)
원래 이 날 아침은 일출을 볼 참이었는데 술마시고 잤으니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에 일어날리 만무했다. 일출은 포기하고 아침에 6:30에 일어나 수영부터 했다. 뜀도령은 못일어나겠던지 잠만 잤다. 아침을 먹고 다시 나섰다. 툭툭이 기사는 이미 나와 있었다. 이 툭툭이 기사는 영악한 인간이었다. 1인당 20불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 어제 10불이었고 오늘은 장거리를 갈 예정이니 20불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케이를 하고는 가면서 생각해 보니 1인당 20불이면 총 40불이었다(에라 이 돌대가리야!). 아무리 장거리를 간다지만 이건 바가지가 심해도 여간 심한게 아니었다. 툭툭이를 세우고 이건 넘 비싸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는 장거리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여행사 정보에는 장거리 이동시 15-20불 정도를 적정가격으로 보고 있었다. 어차피 오케이를 했으니 목소리를 더 키울수가 없어 30불을 주되 확실한 서비스를 전제로 5불의 팁을 더 주겠다는말로 정리를 했다. 어쨋든 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어제 일정과 요금 합의가 있어야 했다. 항상 대중교통을 타고 아메바처럼 다니는 여행을 하다가 한 곳에서 같은 기사를 데리고 종일 다니는 여행을 처음 해보는 통에 실수를 한 것 같다. 어쨋든 이 것도 다음 여행을 위해 좋은 경험이다. 우선 반띠아이 스레이(Banteay Srei)로 이동했다.
40km나 떨어진 장거리 이동인 관계로 시골풍경은 섭섭지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반띠아이 스레이에 도착하자마자 한 식당에서 맥주부터 한 잔 마셨다. 바이욘 맥준가뭔가 하는걸 마셨는데 앙코르와트의 맥주는 역시 밋밋하고 맛이 없었다. 맥주만 샀는데 식당 안에 들어가 앉아서 마시란다. 들어 갔더니 식사 메뉴를 내민다. 그럼 그렇지. 맥주만 마시고 나왔다. 호텔에서 서둘러 나오느라고 하지 못한 양치질을 가게 뒤쪽에서 하고는 입구를 향해 걸었다. 전통의상을 들고 따라 오며 팔려는 아가씨가 있었다. 상의 두 장에 5불이란다. 나오면서 다시 들러 한 벌 살 참이었다.
반띠아이(성채) 스레이(여인)는 입구에서부터 화려한 장식으로 보는 이의 눈을 압도했다. 깊고 섬세할 뿐 아니라 곡선미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분홍빛 사암과 붉은 라테라이트석을 사용하여 색조부터가 화려하다. 세월은 여기에 검게 변하는 흔적을 남기게 했다. 아래의 부조는 아이라바타(두통 셋달린 코끼리)를 타고 있는 인드라(번개와 홍수의 신)의 모습으로 위 사진의 입구 상단에 새겨진 작품이다.
자야바르만 5세(968-1001)때 브라만 승려 야즈나바라하(Yajnavaraha)가 세운 사원이다. 이렇게 생긴 곳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면
자그마한 해자가 둘러싼 이렇게 생긴 성소가 나온다.
일단 입구를 통해 들어 갈때
입구 상단을 보면 이런 작품이 있다. 작품의 주연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구름인지 안개인지 물결인지 신비하고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봐도봐도 싫증나지 않는 이 아름다운 조각들은 성소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넋을 놓고 보다 보면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입구에 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이 탑(?)은 장서각이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일케 생겼다.
더 가까이서 본 부조의 중앙부분
더 가까이서 본 부조의 아래부분
성소탑. 이 곳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들어갈 수 없도록 줄을 쳐서 통행을 제한했다. 안그랬다간 훼손될 염려가 있겠다.
마치 환상에서나 볼듯한 예술작품. 이렇게 복잡한 조각도 좌우 대칭을 철저하게 따라 작품화했는데 한치의 실수가 없다는 것이 놀랍다. 이러한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후면쪽에 무너진 담벼락을 배경으로 보니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가까이서 세세히 둘러보고싶었지만 역시 줄을 쳐서 통제구역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배제하고 이 유적을 볼 수 있다면.... 넘 큰 욕심인가?
건축물 어디에도 밋밋한 부위가 없다.
이 성소를 둘러싼 해자에는 연꽃이 만발했다. 어찌나 고고하고 예뻐보이던지 한 컷 담아 보았다.
해자 앞에서의 개폼 한 컷
이 곳을 나오자 마자 이곳의 전통 의상부터 샀다. 그 아가씨가 안보이길래 가까운 곳의 아줌마의 가게에서 사려고 했더니 10불을 부른다. 역시... 관심없는척 하니까 쫓아다니는 사람은 5달러 부르고 우리가 필요해서 찾아가니 10달러를 부르는군. 5달러에 주지 않으면 그 아가씨를 찾아 가겠다고 하니까 5달러에 가져 가랜다. 어디 한 두 번 장사하나. 이 곳을 떠나기 전 툭툭기사는 주유를 하고 가겠단다. 그래서 들른 주유소 겸 매점이다. 담배, 과자, 음료수, 과일등 식료품과 휘발유다. 소녀인지 아가씨인지 여인의 뒤편에 큼직한 병에 담아 놓은 것이 휘발유다. 큰 차량이 드물고 툭툭이 대중교통수단이다 보니 이런 작은 단위의 주유가 가능하다. 주유 방법은 원시적(?)이다.
깔데기를 주입구에 대고 철철 부어 주유한다. 이색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넣고 지불하는 돈은 단돈 1달러. 툭툭기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추가주유로 이날의 모든 장거리 행선지를 다 해결했는데 주유비만 20달러가 든다고 사기를 쳤다. 이 사기꾼은 우리가 바본줄 아는 모양이다. 어느 일본인 관광객은 하루 60불을 지불하고 자신의 툭툭을 대절했단다. 나는 그 일본인이 바보이거나 당신이 농담하는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받아쳤더니 할말이 없었던지 입을 다물었다.
이 곳을 떠나 반띠아이 쌈레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조금 가다 보니 마을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엄청 크게 틀어놓고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궁금해서 툭툭이한테 물어 보았더니 결혼식이랜다. 궁금해서 함 들러보자고 했다.
신랑과 신부는 안보였다. 오다가다 구경하는 관광객이 많아서일까 지나가는 과객이 들러도 찝쩍거리는 사람 하나가 없었다. 이들은 결혼하면 마을사람들이 이틀동안 이렇게 먹고 즐긴단다.
음식을 만들어 내보내는 임시주방인 것 같다. 야채를 넣은 소스가 담긴 큰 솥과 조리대가 보이는데 천정에 매달린 미원 봉지가 재미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만해도 한국에선 시골마을 잔치에 일면식 없는 과객도 밥을 먹여 보내게 마련인데 누구 하나 밥먹고 가란 사람이 없다. 내심 이들과 섞여 밥한끼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냥 나오기 섭섭했다.
나오는길에 마을 입구에 큰 트럭이 한 대 서 있는데 엔진덮개도 없고 모양새가 단순무식했다. 처음보는 형태의 차량이 신기해서 뜀도령과 내가 사진을 찍고 요모조모 뜯어보니까 툭툭이가 아는체를 했다. 이건 캄보디아에서 만든 차인데 엄청나게(?) 비싸단다. 엄청난 가격이 도대체 얼마인지 궁금해 물었더니 3,000 US달러랜다. ㅡㅡ;
다시 길을 떠났다. 숙소로부터 40km를 왔고 반띠아이 쌈레로 가자면 35km 이상을 되돌아 가야 했다. 자연 속에 묻힌 시골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이런 시골에 무더운 바람 맞아가며 가는 길은 속도가 완만해도 에어컨 달린 고속차를 탄 기분에 댈바가 아니었다.
물소가 끄는 달구지의 모습은 더없이 목가적이었다.
반띠아이 쌈레의 진입로이다. 이 곳 길이 운치있어서인지 여기서 내려 주고 걸어 들어가란다. 뜀도령과 난 여기에 서있는 푯말에 무어라고 써있는 것인지 의견을 주고 받았다. 결론--->모름.
입구에 다다랐다. 반띠아이 쌈레(Banteay Samre)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1159-1175년 사이에 건축한 힌두교 사원으로 쌈레족의 성채라는 뜻을 지녔다 한다.
이 사원은 비쉬뉴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입구 가까이에 가서 보니 조각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이 곳 씨엠립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기억된다.
몽환적인 배경 속에 상반신을 내민 여신의 모습이 담긴 이 조각은 입구의 틀 한쪽을 떠받치는 기둥에서 본 것인데 나의 눈과 마음을 한참동안 사로잡았다.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본 테라스와 해자. 해자가 지금은 잔디로 채워져 있다. 담벼락과 테라스의 안에 해자를 설치하고 건물과 건물마다 해자로 인해 단절되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다음 건물로 넘어갈 때마다 씻음으로 인한 정결함을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성소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인데 제단인가보다 제단 위에는 링가인듯.
반띠아이 스레이에 비하면 너무도 많이 손상된 조각
위 사진의 성소를 가까이서 보면 이렇다.
아마도 여기가 중앙성소였던 것 같은데...
위 사진이 보이는대로 나가 보았다가 두 여인이 소떼를 몰고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진엔 별 느낌이 없지만 실제로 보았을땐 감동했다.
풍화에 휩쓸린 가운데서도 생존한 조각의 일부. 뭉그러진 부분과 대조되어 희안한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이건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
이 곳의 사자상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얼굴이 없다. 도굴꾼들이 뜯어간 탓이다. 얼굴없는 사자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도굴꾼들을 괴롭히진 않았을까. 꼬리도 없다. 침략자들이 이 곳의 정기를 없애기 위해 한 짓이라고 하는데 침략자들도 어지간히 한가했던 모양이다.
이 곳이 소떼를 본 반대편 사원 바깥편이다. 전면의 두마리의 사자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맞이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다.
이 곳을 떠난 우리는 이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유적인 쁘레아 루프로 이동했다. 961년 라젠드라바르만 2세(Rajendravarma II)때 지어진 힌두교 사원이다. 사체(쁘레아)의 변신(루프)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이 사원은 장례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꼭데기에 올라가서 뒤돌아 내려 찍은 사진인데 두 번째 관문을 지나 들어섰을때 욕조같은 것이 보여 이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물을 담아 놓고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재개를 하지 않았을까 ---> 땡! 화장터였습니다. 화장터 좌우로는 터만 남은 장서각이 있고 이 계단을 올라오는데 사자상이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도 물론 사자들의 얼굴은 없었다.
중앙성소
힌두교 사원의 성소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사자의 꼬리가 머리까지 제대로 치켜져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뒤통수를 주연으로 멀리 떨어진 자연을 배경으로 찍고 보니 사자의 시야를 내가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곳의 석양은 정말 멋지다고 하는데 일정상 못보았음이 무척이나 아쉽다. 하루만 더 묵었다면 여유 있게 볼 수 있었을텐데...
다시 쁘레아 루프를 떠난 우리는 동메본(East Mebon)으로 이동했다. 이 곳은 쁘레아 루프보다 9년 앞서 지어졌다고 한다.
아주 이례적인 것은 얼굴이 온전한 사자상이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사자는 몸뚱이만 보았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던 차였다. 생각보단 얼굴이 크고 뭉뚝하게 생겼다.
야소바르만 1세 사후 왕권쟁탈전을 평정한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자신의 부모를 위해 952년경 지어 시바신에게 바친 힌두교 사원이다.
전에는 이 곳이 호수에 갇힌 섬에 설치된 사원이어서 배를 타고 들어와야 했다고 한다. 이 곳 말고도 서메본(West Mebon)이라는 사원이 하나 더 있지만 거의 같으리라는 가정하에 일정상 그 곳은 생략했다. 문을 지키는 사자상의 모습이 늠름해 보인다. 이 곳이 선착장이었던 모양이다.
신전 외각 각각의 사각 끝에 설치된 코끼리상 중 하나.
뜀가야! 배경 버린다. 비키그라.
가는 곳마다 건축물은 뛰어난 예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부처상은 왜 그리도 초라한지 모르겠다. ㅡㅡ;
'배낭여행 > 07 캄보디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엠립7)앙코르와트2,3층→꿀렌삐레스토랑→톤레삽호수 (0) | 2007.08.28 |
---|---|
(씨엠립6)따솜→끄롤 꼬→닉 뽀얀→쁘레아 칸→올드마켓 (0) | 2007.08.28 |
(씨엠립4) 앙코르와트 1층 (0) | 2007.08.03 |
(씨엠립3) 앙코르톰 (0) | 2007.07.31 |
(씨엠립2)쁘라삿끄라반→쓰라쓰랭과반티끄데이→따쁘롬→따깨오→톰마논 (0) | 2007.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