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0 중국어학연수

중국어학연수15-2(시안)

코렐리 2010. 11. 2. 13:46

2010.7.9(금) 계속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제아무리 진용박물관이라 해도 민생고에 허덕이다 보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한 것이 당연한 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터오는 것은 식당이었다. 진용박물관 입구 길 건너편에는 왠지모르게 싼티만 풀풀나는 식당이 몇군데 있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으로는 이미 늦은 시간인지라 어느 집이 사람이 많이 꼬이는 집인지 알 수 가없었지만 그나마 사람이 좀 눈에 띠는 집으로 골라 보았다. 그 중 고른 집은 창문문틀을 시뻘겋게 칠해 놓고 괴물같은 메기를 그려 넣은 아래의 집으로 골랐다. 찬바람과 내가 먼저 들어가 주문을 하는 동안 뜀도령이 밖에서 찍은 사진.  

 

고기요리 한 접시와 야채요리 한접시 그리고 공기밥을 주문했다. 맛은 감동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은 그저 고만고만한 음식이었다. 다 좋은데 이 집도 밥은 밥통 안에서 식어빠진 밥을 대충 성의없게 퍼서 내오기는 이집도 마찬가지였다. 울 나라처럼 뚜껑달린 공기에 담아 보온 장비에 넣어 두었다가 내오는 이상한 짓은 절대로 한하는 모양이다.  

 

역시나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맥주였다. 중국에도 웬 맥주의 종류가 그리도 많은지 난 그저 칭다오 맥주와 연경맥주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물론 둘 다 맛있는 맥주지만 내가 좋아하는 맥주는 칭다오였다. 그래서 찾은 맥주가 칭다오였는데 없다 하니 꿩대신 닭으로 처음 마셔본 한스 맥주다. 어~~~주그리리리리! 이거 맛있는데... 주문한 요리는 그저 곱창 충만용이라면 맥주는 미각 충만용이라고 해야하나. 여기서 식사하느라고 뭉갠 시간은 최소 한 시간은 넘었다. 바깥에 비는 비슬부슬 오고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낮술의 달근함이 은근슬쩍 들뜨게 만든다. 사실 그럴만큼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가? 우리의 목표는 진용박물관을 모두 보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진시황릉에 가는거였다. 사실 볼거리는 봉분과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공간 하나 뿐일테지만 안보면 찝찝한게 사실이었다. 상관없다. 이 시간이 즐겁고 진용박물관과 병마용을 놓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초입에 세워진 진시황의 석상. 동짜몽같다. 도라에몽이 처음 한국에 소개될 때 동짜몽이라고 한국화시켜 소개한 이유는 동그랗고 짜리몽땅하기 때문이라나... 이거 보면 여불위 아들님 무덤에서 블떡 일어나게 생겼군. 아닌게 아니라 누가 만들었나 몰라도 진짜 못생겼다.

 

매표소에 도착해 표를 사고 나면 코앞인줄 알았다.

 

학생 할인권(45위엔)과 일반권(90위엔)

 

표를 구입하고 나니 셔틀차량을 탈 사람은 별도로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까짓게 멀면 얼마나 먼지 함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들어가다 보니 날뛰는 모습의 말 동상  6마리가 보인다. 진시황보다 훨씬 잘생겼다. 

 

표를 산 뒤 입구로 가는 길엔 잡다한 매점과 기념품점이 즐비했다. 이들은 들어가는 사람들에겐 거의 찝쩍거리지 않는다. 나올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습을 드러낸 진용박물관 입구. 솔찬허니 멀지만 걸을만은 하다.

 

 

이 곳이 1번갱 입구다.

 

지붕 달린 운동장같은 어마어마한 공간 아래 길게 파여진 갱도에 늘어선 토용이 눈에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토용의 진용이 자못 위압감을 주는데 만일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발견이 되었다면 얼마나 멋진 모습이었을까. 하기는 이 정도를 복원해 낸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병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이야기한다. 진시황 병마용은 1974년 봄, 임동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것으로 진시황릉 동쪽에 있는 서양촌(西楊村)에서 감나무 과수원에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고 그 때 그 일에 참여한 생산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물을 찾아 여산의 골짜기 입구와 이어진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판기 시작한 지 일주일 후 1974년 3월 29일, 그들이 원하던 물은 나오지 않고 토용의 파편과 같은 이상한 것들이 계속 나타났다. 내화 벽돌이 깔린 평면이 나타나는가하면 녹슨 청동 화살과 쇠뇌가 발견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벽돌을 부적삼아 베개로 삼고, 청동기는 폐품 회수처에  팔기도 하였다. 출토된 도용을 이상하게 여긴 것은 수리시설 건설 책임자인 방수민(房樹民)이었다. 우물 파는 상황을 감독하러 왔다가 중요한 문화재로 판단해 현문화관에 보고했고 현문화관에서 나온 조강민(趙康民)이 중요한 문화재임을 알아채고, 도용의 파편을 6대의 수레에 실어 임동현 문화관에 옮겨 보관하고 자신이  직접 복구한 다음에 상부에 보고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달간이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고향에 와있던 신화사의 기자인 인안온(藺安穩)이 현문화관에 근무하는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 방문 후 북경으로 돌아간 후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진대의 무사용이라는 글을 써서 인민일보에 발송하게 되었고 이 글은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게 되었다. 1974년 7월 15일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들 고고학 발굴팀의 단장은 고고학자 원중일(袁仲一)이었고 처음 발굴이 시작한 곳이 1호갱이었다.(뜀언)

 

1호갱에는 전차병과 보병의 연합 부대가 방진을 형성하고 있다.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야기로는 갱도 안에 토용이 진을 치고 있는 이 형태는 당시의 군사진용을 그대로이며 개개의 병사들은 각각의 계급에 맞추어 복식이 표현되어 있으며 오늘날 같으면 대충 머리 틀과 몸통 틀을 미리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냈을테지만 이들의 얼굴과 몸통은 하나하나 그대로 빚어낸 결과 키와 생김새 등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하니 놀라고 또 놀랄 일이다.

 

복원 작업은 아직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발굴작업에 열심인 전문가들. 이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져있어 진시황릉과 용갱의 관계를 확정짓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다가  조각난 도용의 몸체 앞에 아직 녹슬지 않고 새것처럼 빛나는 구리 극(戟)이 발견되었다. 구리 극 머리 부분의 안쪽에는 선명하게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는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사공구’는 아마도 구리극을 주조한 공장 이름인 듯하다.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올랐다. 이 태자 정이 바로 시황제(始皇帝)인 것이다. 이로써 용갱이 진시황릉의 일부분임이 증명되었다.(뜀언)

아항~~~! 그렇군요.

 

 

하나하나가 얼굴이 다른 작품이다. 진시황은 자기 무덤을 지킬 예술작품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묻고 만리장성을 쌓고 보수하는 안 백성들의 도탄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 틍림없건만 그 덕에 후대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알고 감상하니 이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제1호 갱은 보병과 거병(車兵)으로 형성된 사각형의 진으로 손에는 각종 병기를 든 무사가 6천 명 정도 되고, 수레를 끌고 있는 말이 160필, 전차가 40필이다. 남북 가장자리와 동쪽 가장자리에는 궁노를 들고 있는 무사용이 둘러싸고 있고, 중심부분에는 전차와 수레를 따르는 무사용이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들 무사들은 경장보병(輕裝步兵), 개갑보병(鎧甲步兵), 군리(軍吏), 어수(御手), 거사(車士)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등에는 청동화살이 들어 있는 화살통을 메고 있다. 무사용은 우임(右袵)의 여밈을 하고, 상투는 볼록하며, 상투는 오른쪽을 향해 솟아 있다. 다리에는 끈을 메고, 발에는 코가 네모진 신발을 신고 있다. 제 1호갱의 병진을 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 전투에서 보병의 위치가 점차 증가해 가는 것을 알수 있다. "[출처:임중혁교수의 스무날동안의 황토기행 중에서]---뜀펌

 

 

 

1호갱을 나와 2호갱으로 넘어갔다. 비는 그 때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2호갱 출입구를 흥건하게 물을 괴어 놓고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양말 속까지 열심히 적셔놓고 있었다. ㅡ,.ㅡ;

 

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1976년 4월 23일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1호갱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독립된 갱으로 1호갱이 보병갱이라면, 2호갱은 거마(車馬)의 혼합병단이었으며, 직사각형의 1호갱과는 달리 이곳은 L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길이는 동서 96m, 남북 84m, 깊이 5m, 면적은 6,000㎡로 1호갱의 절반쯤 된다.(뜀언)

 

" 제2호 갱에서는 경장용(輕裝俑), 어수용(御手俑), 기병용(騎兵俑), 궤사용(跪謝俑), 장군용(將軍俑), 만마용(輓馬俑), 기마용(騎馬俑) 전차가 발견되었다. 특히 이 갱에서는 89대의 전차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보병인 제1호 갱과는 달리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의 서로 다른 부대로 혼성된 것으로 볼 때 강력한 기계화사단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전방에는 궁노병(弓弩兵)으로 구성된 소형의 사각형 진(陣)이 배열되어 있다. 진대의 활은 일반적 활을 뜻하는 인강(引强), 발로 쇠뇌를 당기는 답장(蹋張)이 있었다. 방진의 사방에는 강노를 서서 쏘는 입사수(入射手)가 있고, 방진의 가운데는 궤사수(跪謝手)가 무릎을 끓고 있다. 이것은 적이 접근할 때 사정거리가 긴 쇠뇌를 든 입사수가 발사하고, 근접시에는 궤사수가 활로 번갈아 사격하는 전술을 운용하는 것이다.

궁노방진(弓弩方陣)의 오른쪽은 전차병단이 자리잡고 있다. 세로 8열, 가로 8열의 64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논어(論語)』의 팔일무(八佾舞)가 가로 세로 각각 여덟 명의 춤추는 사람들로 구성된 천자의 의례를 나타내는 것과 동일하여 흥미롭다. 전차마다 갑옷을 입은 세 명의 병사가 타고 있다. 중앙은 운전병인 어수(篽手)이고, 좌우는 전투병이다. 어수는 고삐를 잡고 있는 팔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손은 재갈 끈을 잡은 듯 약간 벌리고 있다." [출처] 임종혁 교수의 스무날 동안의 황토 기행 중에서(뜀펌) 

 

 

2호갱 내부의 사이드쪽에 전시된 궤사용(跪謝俑)이다.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면 쉽겠다는 생각이다. "앉아 쏴"의 자세로 근접한 적들을 향해서 날리는 궤사수의 모습이 왠지 프러포즈하는 남자로 보여서 나홀로 살짝 웃고 말았지만 궤사용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서 철영이도 상철형도 나도 사진 찍기에 바빴다.(뜀언)

 

궤사용의 뒷모습. 허리에는 일부 채색이 남아 있다. 지금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색이 죄 다 없어져 버렸지만 처음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면 토용에 색이 섬세하게 입혀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갑옷과 목식은 물론 당시의 헤어스타일까지도 엿볼 수 있는 섬세함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궤사용을 지나서 옆으로 이동하니 군리용(军吏俑) 아저씨들께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런 스타일의 토용 모조품을 몇 개 수입해서 호프집 장식용으로 꾸몄으면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여러가지 현실적으로 무리인듯 하고...(역시 뜀언)

 

고급 군리용(장군용). 삼국지나 초한지 보면 이런 애들이 제일 먼저 완타치 붙다가 목이 따이드만...

 

"장군용은 머리에 절운관(切雲冠)이라는 모자를 쓰고 있고 가슴과 등에는 장식이 달려 있고, 목에는 머플러와 같은 것을 감았다. 또한 무릎까지 내려오는 중포(重砲)를 입고, 중포 위에는 찰갑(札甲)을 입고 있다. 양손은 무릎 앞에서 마주 잡고 있는데 긴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그 복식이 매우 화려한 것으로 보아 장군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좌용(左俑)은 장군용 옆에 서 있다. 머리에는 장관(長冠)을 쓰고 전포(戰袍)를 입고 있고, 그 전포 위에 전흉갑(前胸甲)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폭이 넓은 두 줄의 띠를 어깨 위로 올린 다음, 등뒤에서 ×자로 교차하여 내리고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이용(吏俑)은 머리에 장관(長冠)을 쓰고, 전포 또는 전포 위에 갑옷을 입고 있다. 군리(軍吏) 가운데 지위가 가장 낮은 이용은 지휘하는 무사용 가운데 숫자가 가장 많은데, 항상 병사용과 함께 배열되어 있다. 보병용(步兵俑)은 실제로는 전차의 뒤를 따르는 갑사(甲士)로, 갑옷을 입지 않은 전포용((戰袍俑)과 갑옷을 입는 개갑용(鎧甲俑)의 두 종류가 있다. 병마용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보병용이다. 이것은 전차에 소속된 것과 독립적으로 편제된 것의 두 부류가 있는데, 무기와 장비는 큰 차이가 없다.

병사용은 그 신체적 특징에 따라 출신지역을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진나라 군대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몸집이 작고 광대뼈가 나온 병사용은 사천성 출신이며, 뺨이 넓고 카이젤 수염을 길렀으며 코가 높은 병사용은 흉노계통이며, 얼굴이 길고 후두부가 튀어나오고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 것은 서아시아 계통의 병사이다.

병사용 하나의 무게는 200kg 정도나 된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다리부분은 모래를 섞은 점토를 사용했고, 상반신은 점토만을 사용했다. 머리는 틀을 이용해 찍고 그 위에 얼굴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눈, 코, 입이 이렇게 다르게 표현된 것을 보면 상상력만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고 모델을 이용해서 만든 것 같다. 이러한 수작업을 할 때 이들은 그 두상 내부에 무심코 자신의 지문을 남겼다. 2,200년 전의 지문인것이다.

흙으로 빚은 병사용 하나는 약 한 달간 건조시켜 1,000도의 가마에 넣은데, 5일에걸쳐 불의 온도를 서서히 올린다. 이때 온도조절이 핵심기술이다. 점토가 완전히 마르지 않으면 구울 때 균열이 생겨 실패작도 많이 나오게 된다. 하나를 만드는 데는 건조기간을 제외하고도 세 사람이 달라붙어 15일 정도 걸린다. 이곳 병마용을 약 8,000개로 추정한다면 80명의 도공이 조금도 쉬지 않고 실패작을 하나도 내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12년이나 걸리는 대공사였다. 또 이렇게 구워낸 병마용에 일일이 채색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출처] 임중혁 교수의 스무날 동안의 황토 기행 중에서(뜀펌) 

 

입사용의 모습인데 왠지 태권도의 아래막기를 하고 있는듯해서 약간 웃겼다. 멀리 있는 적들에게 활을 쏘는 병사들에 대한 예의로서는 아닌듯 하지만 그때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내마음이니 어찌하리오.(뜀언)

 

출토된 병마용중에서 상태가 완전한 것을 유리에 넣어서 가깝게 다가가서 볼 수 있게 했는데 안마기병용 또한 왠지 방자가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면 정말 철없는 생각일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했지만 쉽게 눈길을 뗄수도 없었다.(뜀언) ---> 방자가 군복입고 다녔군.

 

아래의 사진은 2호갱에 전시된 사진을 찍은 것인데(내가 찌근건 아니지만도 ㅡ,.ㅡ;) 최초 발견 당시만 해도 채색이 얼마나 섬세하게 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얼핏 보면 사람 그대로를 세워 준 것 같다. 이걸 처음 완성했을때를 생각하며 상상해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2호갱에는 갱도 안에 세워진 토용은 거의 없고 발견 당시의 상태로 보존만 해 놓은 것 같다. 파손 상태로 보면 복원하기 쉽지 않겠다.

 

마지막 남은 3호갱이다.

 

1호갱의 경우 세 명이 탑승했는데 반해 3호갱의 전차에는 네 명이 탑승하고 뒤에 따르는 보병의 숫자도 많이 있다. 갑옷을 입은 무사용은 모두 64구이며, 1호갱과 2호갱에서 과(戈), 창(槍), 극(戟), 검(劒)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지만 3호갱에서는 뾰족한 다각추이고 몸체는 나무자루를 박아넣을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들어진 병기인 칼날이 없는 수(殳)만 발견되었다. (뜀언) 

 

이 곳에는 4마리 말이 끄는 전차와 갑옷을 입은 병사, 무관, 어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곳이 군 통치부였음을 알 수 있다.(세간다)

 

 

 

 

 

 

진동차마전(秦銅車馬展)으로 가면 볼거리 중 최고의 볼거리가 남아 있다.

 

뜬금없이 거대한 토용과 이 소녀는 뭔고?

이 아찌는 마리오네트로 팔,다리,어깨에 줄을 달아서 움직일수 있게 만든 인형을 말한다. 전시된 병사용은 7.2m 크기에

654kg이며 소녀는 4.5m에 208kg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에 만들어졌으며 병사와 소녀의 마주 잡은 손은

평화와 우정,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의미한다.(뜀언)

 

 

 

이 날 최대의 볼거리인 2 개의 청동 마차상 중 하나다.

 

십수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진시황 유물전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 당시에도 가장 큰 볼거리로 여겨졌던 바로 이 청동 마차상이 모조품이었다는 말에 전시회 구경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청동 마차상이 모조품이라서 보기를 포기했던 바로 그 보물이니 감회가 새롭다.

 

 

 

구조와 각 부분별 명칭에 대한 해설을 달아 놓았다.

 

앞에서 본 것이 무개 마차에 인물상이 입상이라면 후자는 유개마차 위에 올라 앉은 좌상이다. 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과 마차에 달려있는 장신구와 마구 등은 섬세하기 이를데 없다.   

 

 

명마용이 든 무기와 마구 장식 등이 발굴당시 대부분 없었다고 하는데 도굴꾼들이 대거 들어와 철쪼가리들을 대부분 집어다 엿을 바꿔먹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이게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이기서는 박물관의 여직원이 앞 서 본 마차의 우산인지 양산인지 하는 물건의 어떻게 설치되고 어떻게 분해가 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내용은 별거 없건만 듣는 사람들은 사뭇 진지하다.

 

클린턴 할배 가족이 왔을 때는 직접 내려가 봤던 모양이다. 이거 여기다 왜 달아논겨? 내려가서 사진 찍고 싶으면 대통령 쯤 되서 오라는겨? 잘라따.

 

'배낭여행 > 10 중국어학연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어학연수16-1(시안)  (0) 2010.11.09
중국어학연수15-3(시안)  (0) 2010.11.09
중국어학연수15-1(시안)  (0) 2010.10.27
중국어학연수14-2(시안)  (0) 2010.10.26
중국어학연수14-1(시안)  (0) 201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