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여행/군바리시절

후보생의 추억(복종으로부터 필승까지)

코렐리 2008. 5. 29. 14:19

1. 복종
진해의 교육사령부에 처음 입소해서 어리둥절하던 우리가 피복을 지급받으면서부터 뭔가 지겹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을 때 느낀 극도의 긴장감이 지금도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다.
입대전 즐겨듣던 사이먼과 가펑클의 "Sound of Silence"라는 노래의 제목에 말같잖은 소리라고 치부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침묵에도 분명히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체험했다.
침묵의 소리는 해가진 천지관(식당) 앞에 조명을 받으며 초긴장의 열중에 놓인 동기들의 숨결 조차도 우리의 귓가에 맴돌도록 주변에 깔려 우리의 심리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피복을 지급받은 첫 날 구대장이었던 하용문 선배의 지명으로 이대명이 사관후보생 3중대 초대(?) 해병중대장이 됐다.
해가 지고 난 천지관 앞에서 인원보고가 맞지 않는다고 하선배는 대명이를 어지간히도 팼다.
처음부터 인원보고가 맞을 턱이 없다. 인원수를 하선배는 이미 알고 있고 우리는 동기가 몇 명이나 들어 왔는지 모르는데 알지도 못하는 인원 수를 엊그제 대학생이었던 놈들이 어떻게 정확하게 맞추겠냐.
어쩌면 예하 소대장들이 처음 해보는 인원보고를 틀려 대명이의 합산이 안맞았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경례구호는 "복종"이었다.
목청껏 소리높여 인원보고가 정확할 때까지 소리를 질러대던 대명이의 목은 잠깐새 완전히 갔다.
"복종! 3중대 인원보고 총원 어쩌고 저쩌고..."
그때 대명이의 극도로 쉰목소리가 질러대던 경례구호와 하선배가 인원보고를 받으며 했던 쇳소리 섞인 구령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2. 단결
일부는 학생운동에 경도되었다가 대학을 졸업해 기고만장한 우리의 기를 죽이는데 교육사령부가 제공한 복종이라는 경례구호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강도높은 훈련과 한계점에 닿을듯말듯한 심리적 위축, 온갖 인격적 모욕에 기가 죽어 노예같은 근성이 생겨버린 우리에게 새로이 주어진 경례구호는 "단결"이었다. 사제물이 빠지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뭉치는 법을 가르치려 했던 것 같다. 근거가 있는 이야긴지 아닌지 몰라도 당시 사관후보생을 6개월간 키워 실무에 투입하기까지 500만원이 깨진다는 말을 한 동기로부터 주워들은 것도 이 때였던 것 같다. 당시 대기업 신입초임이 20만원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6천만원 이상의 가치는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 기간 중 잊지 못할 일 중 하나는 토요일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더운 여름날 작업복 위에 항공점퍼를 입고 그 위에 내피까지 달린 야전점퍼를 입고 다시 그 위에 우의를 입은 뒤 단독군장으로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교육사령부 영내 최외곽을 무려 5바퀴나 구보로 돈 적이 있다. 당시 당직구대장은 하용문선배. 얼마나 더 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3바퀴면 되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4바퀴째 돌기 시작하면서 절망으로 바뀌었다. 설마하는 기대마저 배신하지 않았는지 5바퀴에서 끝났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당시 입고 있는 옷들을 생각하면... 순진했던 우리는 미련 곰탱이모냥 그걸 죄 다 입고 달렸다. 희안한 것은 하나하나 벗으면서 보니 다른 옷들은 전부다 그저 눅눅한 정도였고 젖지는 않았지만 우의는 더 이상 땀을 배출을 하지 못하고 배출경로가 막혀 내부에서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무척 신기한 현상이었다.
단결주에는 부모님과의 첫 면회도 있었다. 부모님과의 첫 면회때 눈을 붉게 물들이며 나를 찾아내고는 눈물을 왈칵 쏟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자마자 정신교육을 받은대로 신고를 하려던 나도 울먹이느라 제대로 신고도 못했다. "단...겨...어..ㄹ! ...잉! 엄마~~~"

 


3. 극기
극기주에는 밥도 먹이다 말았다. 김명규 선배가 당직이던 날 먹는시간 10초만 준 적도 있었다. 직각식사로 10초 밥먹어봐야 잘하면 한 번의 밥숫가락과 한 번의 국숫가락이면 대단한 실적으로 봐야 했다. 다행이 그 날은 우리 3중대의 독도법이 있는 날이었다. 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도법이었더냐. 모처럼만에 훈련관들로부터의 탈출이었을 뿐 아니라 군것질을 최대로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먹다먹다 남아서 나중엔 포만감과 함께 먹거리 앞에 거만해진 우리는 금쪽같던 과자 던지기 놀이까지 했으니... 이날 저녁 천지관에서 밥먹고싶어하는 3중대 후보생은 아무도 없었다. 김선배가 그걸 감안해서 먹는시간 10초만 주지 않았나싶기도 하다. 1중대와 2중대 해군애들은 그날밤 배를 깔고 자야했다.
밤이면 밤마다 앰프 볼륨을 최대로 놓고 호각을 있는 힘껏 불면 수용인원 4명 또는 6명뿐인 작은 내무실마다 설치된 스피커로 부터 나오는 엄청난 소리에 세상 모르고 자던 후보생들은 경악을 하며 기겁에 일어났다. 나지막하게 저음으로 깔린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사관후보생 총원 비상소집! 복장은 팬티에 단독군장, 오른쪽에 군화 왼쪽에 운동화. 집합 5초전!" 이러면 그 다음부턴 난리가 났다. 그 때는 잠도 재우다 말았다. 전에도 안재웠지만 이건 강도가 아주 심했다. 다른 때는 이러고 나가면 보통은 2시간 이내에서 조뼁이 돌리고 재웠다. 극기주는 기본이 3-4시간이었던 것 같다. 극도의 졸음과 배고픔 속에 강도높은 훈련까지 이어지니 모두가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게다가 이때는 OCS 기수구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가 OCS80차(Officer Candidate School 80th)이니 그 거창한 교육사령부 연병장을 80바퀴나 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거 30 몇바퀴 돌았을 때 우리는 포항전지훈련을 갔다. 포항전지훈련을 끝내고 눈에 날이 서서 돌아온 우리를 보고 해군 애들은 긴장하는 눈치였다. 해군 애들은 우리가 포항전지 훈련을 간동안 80바퀴를 마저 돌았노라고 보는 애들마다 말하며 자기네보다 고생한 우리를 위로했다. 알고보니 해군 구대장들이 시킨 사기였다.

4. 명예
훈련의 강도는 전 못지 않게 강했지만 "명예"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부심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임관에 성큼성큼 다가가는 느낌이 있어 마음은 적잖이 해방된 상태였지만 긴장감은 역시나 팽팽했다. 그런데 이 경례구호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야 사관후보생임을 자각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우리를 자부심으로 인도했지만 큰 목소리로 외치기에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중대장을 했던 한 동기는 명예를 잘못 발음해서 "멍에"라고 발음하는걸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 이게 바로 멍에다. 이 것이 우리가 이 곳에 묶여 임관하는 그날까지는 지고 가야할 멍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것이 그 때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억지였다.

 


5. 필승
필승주는 우리가 마치 임관한 장교라도 된 것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해병대의 경례구호인 "필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서 이제는 귀관들에게 필승구호를 허락하게 되었다'는 구대장의 선물 주는 듯한 멘트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난 그 얘길 듣고 신병과 하사관들도 당연히 수료시부터 필승이라는 구호를 쓰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만 그런거네? 그러면 우리 후보생들이 신병이나 하사관만도 못한 신분이었단건가? 아 이런 사기당한 느낌이 있나.
이 시기에는 상륙면회도 나갔고 사은회를 통한 해묵은 감정 씻기라는 잊지 못할 행사도 있었다. 선진국 같았으면 멋진 제복을 입은 장교후보생들의 사은회에 여자친구들이나 아니면 영화에서 보듯이 젊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참가하는 환상적이고 신사적인 파티를 했을텐데 우린 푸짐하게 먹는데만 정신이 팔렸으니 사병이냐 뭐냐라는 생각에 속으로만 투덜거렸던 기억도 아련하다.
7월의 뜨거운 햇살아래 임관식 연습은 너무나도 지겹고 힘겨웠다. 임관하던날 가족이 와서 나를 보고 대견해 하리라는 기쁨에, 이제 처음으로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에, 이제 해병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8박9일동안 서울거리를 활보할 기대감에, 우리는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졸라 늠름한 경례구호를 외치며 진해를 떠났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