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07 캄보디아

(씨엠립8)쁘레아 꼬→바꽁→롤레이→씨엠립시내→인천

코렐리 2007. 8. 31. 20:05

어줍잖은 식사를 마친 우리는 슬슬 시내를 걷다가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맛사지를 받기로 했다. 지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쉬지 않고 털털거리는 툭툭을 타고 종일 쏘다니고 저녁마다 술을 마시는 등 짧은 기간동안의 강행군은 장기여행 이상으로 피로가 누적되었다. 게다가 배탈까지 났으니...

 

전신마사지는 이미 두 번 해 보았으니 이 번엔 발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이 곳에 나란히 앉아 발마사지를 하는데 나를 마사지해주던 아가씨가 눈만 마주치면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미소짓거나 웃곤 했다. 이 언니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 착각을 하며 왜 자꾸 웃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턱으로 뜀도령을 가리키며 "니 남자친구니?"라고 묻는거였다. 어이가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곳 전통의상을 사서 둘이 똑같이 입었고 게다가 약속은 안했지만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은 것도 똑같았다. 게다가 검정 모자도 똑같았다. 그제서야 영락없는 커플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갑자기 쪼발려지넹.

 

그것도 좋다 치자. 도대체 어딜 봐서 내가 여자 역할을 할걸로 봤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 나는 그래도 여지껏 나름대로 남성미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좀 유식한 말로 터프가이! 다리에 시커멓게 털난 여자도 있냐? 수염 시커먼 여자도 있냐? 거 참 언짢네. 뜀도령도 암상스럽게 생기지 않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어쨋든 지친 몸과 마음이 많이 가뿐해졌다. 역시 들어간 경비는 4달러였다. 첫 날 사기 당한게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다.

 

좌우당간 롤루오스(Roluos)마을의 유적군으로 이동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쁘레아 꼬(Preah Ko). 신성한(Preah) 소(Ko)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왕가의 화장터 겸 장례전이었다고 한다.

 

879년 인드라바르만 1세때 지어진 힌두교사원으로 시바신에게 봉헌되었다고 한다. 보수를 하느라고 격자 형태로 보수틀을 세워놓고 있었다. 우리 외에는 10명 정도의 일본인 청년들이 우리와 동시간에 이 곳을 둘러볼뿐 다른 관광객은 보이지 않을만큼 한적해서 여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이 사원은 다른 유적들에 비해 오래된 편이다. 그래서 그럴까 다른 유적들에 비해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받는다.

 

개개의 탑은 조상의 무덤으로 세워진 것인데 그 안에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고 다만 역대 왕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일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 곳에서의 감흥은 솔직히 그냥 그런정도였다. 내가 좀 무뎌서 그런가...

 

그나마 이 조각이 약간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후면

 

바꽁(Bakong)으로 이동하는 코스는 적당히 비가 뿌려져 쾌적했고 경치가 아주 좋았다.

 

바꽁사원 주변에는 어김 없이 해자가 둘러져 있는데 해자를 건너는 다리의 난간도 역시 어김없이 나가를 소재로 하였다. 얼핏 보니 사람의 손 같기도 하다.

 

해자 주변의 경관도 하나의 큰 볼거리였다. 이 곳을 나올때 한바탕 스콜이 지나갔는데 비가 갠 직후 먹구를 낀 하늘과 주변 경관은 신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 것은 스콜이 지나간 직후 해자를 다시 건너 오면서 찍은 배경사진.

 

 

해자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면 전면에 나타나는 사원의 위용이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만큼 큰 규모는 아니어도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윤곽을 볼 수 있는 그런 사원으로 가장 볼만한 유적 중 하나였다. 881년 역시 인드라바르만 1세때 지어진 힌두교 사원으로 시바신에게 봉헌되었다.

 

 

특히 가장 높은 단에 위치한 중앙성소의 위용이 이 사원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15 미터의 거대 외벽이 하리 하랄라야 도읍 시절에 지어진 뒤 앙코르와트 시절에 중앙성소탑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중앙성소 탑의 전면 좌우를 지키는 사자상이 유달리 위엄을 더해주는 느낌이다. 이 곳에서는 유독 대만인들이 많았다. 중년기의 아저씨들이 부탁하길래 사진을 찍어주고 약간의 대화도 나누었다. 한국인이니래니까 연방 한궈른 쩐더 하오(한국인 정말 좋아요)를 외친다. 중국과 수교한 이래로 대만과는 단교되어 국민감정이 좀 거시기했던 것으로 아는데 속내 밝히기 싫어하는 중국인(대만인)의 말이 진심일까? 

 

올라온 곳을 뒤돌아 찍은 사진. 십자로가 끝나는 가장 먼 부분이 해자를 건너는 다리다. 사원도 아름답지만 주변경관은 물론 주변과의 미적 조화도 단연 빼어났다.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가득하다. 게다가 주변은 밝으면서도 먹구름은 잔뜩 낀 희안한 날씨가 이러한 느낌을 더한다. 이 곳에서 바로 이 신비감때문에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날씨가 이럴 때 이 사원에 온 것이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라면... 오버인가?

 

 

스콜이 지난 직후 사원을 배경으로 나오면서 한 컷

 

이제 이 번 여행에서 마지막 방문 유적이 될 롤레이(Lolei)였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툭툭에는 포장을 친 관계로 우리는 비를 안맞았지만 툭툭운전자는비를 쫄딱 맞아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툭툭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공회당으로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비를 피했는데 비를 피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뜀도령은 어디로 뛰었는지 나와는 반대되는 방향이었는데 내가 피한 곳보다 좋은 곳이 없는만큼 아마도 적잖이 비를 맞았을 것 같다. 굵은 빗줄기는 마을 공회당 처마에 모아져 떨어지는 낙수.

 

이 곳에선 유적이 이 것 뿐이다. 실망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인공호수 인드라타타카(Indratataka Baray)를 건설했다. 그 아들 야소바르만 1세가 그 곳 한가운데 지어낸 최초의 수상 힌두교 사원으로 수상사원의 효시가 되어 동메본과 서메본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주변은 농지로 바뀌어 있고 이 곳이 호수 한가운데였다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워낙 보존상태가 좋지 않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롤레이 사원이 역사적인 의미 뿐 크게 볼거리는 없지만

 

오히려 지은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불교사원이 특이해 보였다.

 

다시 씨엠립 시내로 돌아와

 

우리가 들렀던 올드마켓이라는 곳의 이름 구분이 이 시장(뉴마켓) 때문에 생긴 모양이다. 궁금해서 들러 보려고 했는데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이 곳이 꿀렌 레스토랑. 우리가 들렀던 꿀렌 삐(2) 레스토랑의 본점인 모양이다.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떨어졌다. 날이 흐려 어차피 일몰을 볼 수는 없는 날이었지만 날이 좋았다 해도 털털거리는 툭툭을 타고 쁘놈바켕까지 가서 30분가량 경사를 오르는 강행군이 엄두가 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기회가 있을 때 일몰을 봤어야 하는건데 결국 일정이 맞지 않아 미루다가 결국은 못봤다. 어쨋든 쉬엄쉬엄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우리네와는 다른 분위기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다니다 보니 도로 복판에 불상이 있는데 이 곳에 불공을 드리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좋은 일자리를 빌었을까 아님 좋은 배우자를 빌었을까. 하늘에는 새까맣게 날아다니는 날짐승을 보고 왠일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박쥐였다.

 

 

역시 멀지 않은 곳에 불교 사원이 하나 있었다. 예불중인지 타악기소리가 요란했다.

 

입구를 들어서자 왼 쪽에 흰 코끼리상부터 눈에 띤다.

 

신을 벗고 사원의 테라스에 올라서서 오른쪽을 보니 안의 악기 연주자들이 금속성 타악기를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밝게 찍고싶었지만 플래시를 터뜨리면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냥 찍었더니 어둡다.

 

불상이 모셔진 실내로 들어갔다. 모셔진 불상이 두 개인 이유가 궁금했다. 금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힌 불상 뒤 오오라는 후면 전구의 조명을 받으며 두 개의 원판이 화려하게 엇갈려 회전하여 조금 어지러운 모습이었다.

 

향냄새 짙게 풍기는 이 곳에서 우리는 한국과 다른 예불 모습을 지켜 보았다. 우리의 불교 사당과는 달리 요란해서 엄숙한 맛은 덜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신앙적 분위기가 내게는 특별한 체험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이 안에는 승려가 한 사람도 안보였다. 신도들 뿐이었다. 승려들은 바깥에서 무언가 예식을 치르고 있었다.

 

나오면서 오른편을 보니(악기연주자들 앉은 맞은편) 다섯명 정도의 승려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신도들을 축복했다. 얼핏 보니까 가톨릭의 고해성사가  연상되었다. 

 

사원 주변에는 신도들이 예불때 바칠 꽃을 팔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콩나물밥집으로 가자고 내가 제안했다. 뜀도령도 속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죽처럼 폭삭 끓여 달라고 특별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동안 실내를 둘러 보니 도마뱀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밑의 테이블에선 남녀 커플이 아는지 모르는지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색깔도 그렇거니와 생긴 것도 그렇고 가만 멈춰 있다가 생각나면 잠깐씩 벽을 기어다니다 또다시 멈추는 모양이 앙증맞다. 이 녀석이 발을 헛디뎌 찌개로 다이빙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든다.

 

 

기다림 끝에 나온 반찬과 음식. 외국에서 먹는 한국음식 치고는 맛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매운 음식인줄 알았다면 탈난 속을 생각해서 맵지 않게 해달랄걸 그랬다.

 

 

남는 시간은 중앙시장에 가서 구경하고 쇼핑을 했다. 이 곳에서 전통의상 2장을 더 샀다. 더운날 집에서 입기에는 너무나 가볍고 시원해서 딱이었다.(사고 보니 한 장 더 샀어야 했는데...) 역시 2장에 5달러. 가게를 지키는 청소년(고등학생 정도?)이 10달러를 부른다. 두 장에 5달러에 샀다고 하니까 꼬리를 내린다. 전통음악 cd도 한 장 샀다. 이 곳에선 이게 정식으로 발매된건지는 몰라도 내 기준엔 모두가 정품이 아니었다. 3달러인가를 주고 사서 뜯어 보니 구운 씨디였다. 만일 정품이었다면 몇 장 더 샀을텐데 한장에서 끝.

 

다시 시내를 다니며 본 악어가죽제품 전문점 간판. 뒷골목에서 삥뜯으려고 만만해 보이는 애를 부르는 폼같다. "야 너 거기! 일루 좀 와봐" 코메디가 따로 없다.

 

22:00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8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툭툭이에겐 10달러를 주고 나서 팁으로 2달러를 더 주었더니 고마워했다. 공항에 도착한 뒤 탑승수속이 넘 간단해서 시간이 너무 남았다.

 

게다가 문제는 3시간 늦어진단다. 10시 비행기가 새벽 1시로 늦춰졌다. 기다리기 보통 지루하고 힘든게 아니었다.

 

 

피곤해서 집에 가 쉬고싶은 생각밖에 없는 이 순간에 고추가루 뿌리는 소릴 해도 유분수지... 

 

뜀도령은 나에 비하면 짱짱했다. 피곤한 기색이 별로 없어 보인다.

 

기내식을 먹으면서도 평소같지 않게 씹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먹고 난 뒤가 좀 문제였다. 배가 갑자기 거시기해져서 열심히 달려 화장실로 갔다. 카레(?)를 아주 약간 쏟았다. 이건 대략 난감이 아니라 졸라 난감이었다. 다행히 화장실 앞에 줄선 사람도 없고 안에도 사람이 없었다. 골목대장한테서 쫓기는 삐리리모냥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갔다. 안에서 온갖 궁상과 추잡한 짓은 다하고 나오니 몇 명이 줄 서 있었는데(줄을 세번째에 선 한 무섭게 생긴 아줌마가 눈마주치기 무섭게 재려보고 있었다) 철면피인 나도 졸라난감 마이쪼발림이었다. ㅡㅜ 그 담부터 체질에 안맞는 노팬티로 다녔다. 무지마이 쪼발림. ㅜㅠ

 

오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올라탄 김포공항행 버스는 나 혼자 탔다. 완전 자가용 버스였다. 마지막 마무리가 아주 뿌듯하다. 크크크...!

 

이 번 여행을 하면서 아쉬움도 많이 남고 어지간히 실수도 많았다.

일출은 몰라도 일몰을 보지 못한 것이 조금 많이 후회가 된다.

맛사지 센터에서 파자마 바지 하나 더 달라고 했다가 아가씨를 겁탈하려는 것으로 오해도 받고

같은 옷 입고 다니다가 가이(guy)가 아닌 게이(gay)로 오인도 받고

만나지 말았어야 할 여행사형 툭툭기사와 대판 싸우고

막판 뱅기 안에서 카레(?)도 살짝 흘려보고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오히려 재미를 배가시킨 사건들이었다.

미숙한것 투성이였던 이 번 여행은 나름대로 새로운 여행환경에 적응할 새로운 교훈도 남았다.

 

서글픈 내용도 알게 되었다. 아래 글은 뜀도령의 블로그에서 퍼온 이야기 한토막이다(뜀이가 읽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란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코- 관광객들은 3일짜리 앙코르와트 입장권을 사기 위해 40달러나 지불해. 하지만 그 돈은 앙코르와트를 위해 쓰이지 않아. 입장료 수익의 75%는 앙코르와트의 소유권을 가진 베트남 회사가 갖거든. 크메르 루주 이후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에 들어왔어. 교육받은 수많은 크메르 사람들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앙코르와트를 관리할 사람들이 부족해지자 베트남 사람들이 그 관리권을 갖게 된 거지. 그 후 현재까지 앙코르와트는 베트남 회사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데, 그들은 부패한 캄보디아 정부에 뇌물을 제공하며 지배권을 독차지 하고 있어. 결국 외국인이 내는 입장료는 앙코르와트나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전혀 돌아가지 않아. 캄보디아라는 나라 자체가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도 단 한 평의 땅조차 갖지 못한다니, 슬픈 일이야....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지음/넥서스BOOKS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