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엠립2)쁘라삿끄라반→쓰라쓰랭과반티끄데이→따쁘롬→따깨오→톰마논
첫번째로 들른 곳이 쁘라삿 끄라반(Prasat Kravan). 이 사원은 어느 귀족이 921년 하르샤바르만 1세 시대에 축조한 소규모 힌두교 사원이라고 한다. 비쉬뉴신과 락시미여신을 모신 곳으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곳은 벽돌을 쌓아올려 축조한 사원이다.
중앙 성소탑의 부조들
위로는 사각으로 점점 좁아지다가 천정은 없이 뚫려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곳을 떠나 쓰라 쓰랭(Srah Srang)으로 이동했다. 원두막같은 형태의 매점이 길게 5-6개정도 늘어서 있었다.
쓰라 쓰랭은 왕실연못이라는 뜻으로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900년대 중반에 왕실휴가 전용으로 만들어졌고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한다.
인공호수 치고는 매우 규모가 큰데 전체적인 호수의 모양은 사각이었다. 특이한 점은 건기가 되어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충분히 깊게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이 곳 난간도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머리 아홉달린 뱀신(나가)으로 되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느 유적을 가나 난간은 전부 나가를 테마로 하고 있었다. 이 곳을 보고 나오는데 한 어린 여자애가 기념품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며 무언가 사주길 요구했다. 땡기는 물건도 없지만 사도 여행 마지막 날에나 사는 나로선 어지간히 좋은 조건이 아니면 잘 안사는 습관이 있으니 첫 날 살리도 만무했다. 잘 안넘어가 주니 팔찌를 하나 선물이라며 주고 간다. 돌려 주려니 쳐다도 안보려고 휙 가버린다. 내가 미안해 할 줄 알았나보다. 고도의 상술이다. 나도 고도의 거절술로 그 애가 쳐다볼때 바닥에 내려 놓고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속으로 그랬겠지. '아니, 저놈이!'
바로 건너편에는 반띠아이 끄데이(Banteay Kdei)가 길건너편으로 건설되어 있었다.역시 자야르바르만 7세의 작품으로 불교유적이다. 성채의 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승려들을 위해 건설된 곳이지만 용도는 미상.
사암으로 건설되었으며 미소짓는 얼굴은 자야르바르만 7세의 것이라는 설도... 편안한 미소가 그야말로 백만불짜리다.
입구에는 지뢰 희생자들이 전통음악 연주를 하며 CD를 팔고 있었다. 처음엔 흥미가 있어 연주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연주단체가 있어 식상해지곤 했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손이 없는 사람은 양금을 연주하되 손이 없는 팔목에 두드리는 금속막대를 둘러묶어 고정시켜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을 잘 모르는 나로선 팔다리를 잃고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을 연주가 그리 뛰어날까 의심이 들었다. 다리를 잃고 앉은 채 단독으로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다. 엉성한 발음으로 '아저씨! 지뢰'라며 손을 내밀기도 한다. 얼핏 들으니 중국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붕괴와 훼손이 심해 온전한 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조각들은 섬세하다.
많은 풍화작용에 시달리고 이끼도 많이 끼어 있었다. 이끼는 유적을 보존하는데 별 도움이 안될테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에는 배가된다.
반띠아이 끄데이에 모셔진 불상
곡선이 유려한 압살라 부조
외부에 노출된 기둥이었지만 부조의 보존상태가 거의 온전하였다.
크고 작은 돌을 쌓아 올린 뒤 조각한 독특한 이 건축물은 붕괴를 막기 위해 철사로 얽어매는 임시방편의 어이없는 보존법을 취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의 '액자사이에 끼운 난간기둥'같은 독특한 장식이 이 곳 씨엠립 유적에서는 가는 곳마다 흔하게 눈에 띠었지만 실증이 나지 않았다.
뜀도령은 책을 한 권 들고 다니며 책에 나온 사진을 현장에서 찾아 대조해 보며 무척 학구적인 관광을 하고 있었다. 수시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설치물이 나올 때마다. 책에 나온 역사적 종교적 의의와 건축법 등 설명을 곁들여 주니 왠만한 가이드 찜쪄먹는 셈이었다. 떠나는 날까지 훌륭한 가이드가 옆에 있었던 셈이다. ---> 이 말을 블로그에 꼭 써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더라는....(요 말은 뺐음 좋겠지? ㅋㅋ) 어쨋든 여행일정과 시간안배 및 식당 선정 등은 내가, 현장 가이드는 뜀도령이 하니 황금 콤비가 따로 없군.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이따금 임시변통으로 각목 한 두개 게어 놓른걸 보면 웃음이 나온다. 어떤 때는 지나가다 폭삭 무너지는 건축물의 밑에 깔리는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인도에서도 석조 건물은 많이 보았지만 건축양식이나 문양은 완전히 달랐다. 이 곳의 유적들은 외부 장식 조각이 대부분 인물이나 여신등의 부조를 상당히 많이 부각시키고 있었다.
가끔씩 이러한 숭배의 대상이나 도구가 놓여있다.
다시 자리를 옮겨
따쁘롬으로 왔다. 입구에서부터 유적까지는 500미터 정도를 걸어 들어가야 했다. 장애인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으며 들어가는 것도 역시 멋진 경험이었다. 역시 자야르바르만 7세가 축조한 불교건축물이지만 힌두양식이다. 그의 어머니를 위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안젤리나 졸리가 툼 레이더를 찍은 장소로 더 유명하다. 이곳의 더위와 습도는 장난이 아닌데 촬영에 고생깨나 했을듯싶다. 초입이 무척 불안해보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몰골이다. 이거 지나가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 밑에서 촬영하는 대만의 아가씨들. 이걸 사람 없이 찍고 싶은데 이 아가씨들 사진 찍느라고 좀처럼 떠나지 않아 그냥 찍었다. 이거 안무너질까? 글쎄? 거기 더 서있어 볼래?
무너진 부분과 푸른색 이끼가 묘하게 아름다운 분위기를 낸다.
상당부분이 무너진채로 방채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고 있었다. 과거 이 사원의 규모가 엄청 컸던 모양이다. 고위 승려 18명, 관리인 2740명, 보조원 2202명, 무희 615명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깜찍한 척 끔찍한 뜀도령.
유적을 짓누르는 이 나무와 건축물은 묘한 조화로 장관을 이루어 유명해졌지만 이 나무가 유적의 보존을 위협하는 가장 골아픈 존재인만큼 제거해야될지 말아야 될지 적잖은 고민에 시달리게 될 것 같다. 이 나무가 없어지면 갑자기 밋밋해질 것 같다. 누구 말대로 이보다 아름다운 폐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 곳이 가장 인기있는 기념촬영장소였다. 단체 관광객들이 줄지어 한 명씩 번갈아 사진찍고 있었다. 이 곳 배경을 찍고싶어 기다려 보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방금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나오려고 하면 기다리던 사람 들 중 하나가 바로 들어가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하기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한참 다른 곳을 구경하고 나서 떠나기 전에 다시 와보았다. 아까보단 아니어도 사람이 많았다. 배경사진은 불가능했다. 이 곳에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할 수가 없고 기다린 시간이 억울해서 나도 들어가 인물사진으로 한 장 찍었다. 폼이 어정쩡한게 별로다.
자리를 옮겨 따 깨오(Ta Keo)로 이동했다. 자야바르만 5세때 지어진 사원으로 사암만을 쌓아올린 건축물로 화려한 부조는 없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같은 형태여서 통일성을 갖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읍지 밖에 짓다가 만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선 흔한 부조가 여기엔 없거나 적었다. 얼핏 보기엔 규칙 없이 지어진 것 같지만 4면 어디에서 보더라도 같은 형태였다.
입구에 들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긴 통로
이 곳의 계단 경사는 엄청나게 가파른 형태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려 올 때 가파른 경사에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 구르면 본인은 물론 그 아래쪽에 오르거나 내려가는 사람까지도 본전을 못뽑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게 될 앙코르와트의 꼭데기층은 이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급경사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손을 짚고 기듯이 올라 가는 행동이 신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꼭데기의 중앙 성소탑
이 곳에서는 무엇보다 급경사의 계단 위에서 올라온 곳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압권이다. 아래쪽에 간이 식당과 매점의 지붕이 보인다.
다시 자리를 옮겨 차우 사이 떼보다(Chau Say Tevoda)로 이동했다. 12세기 초 수르야바르만 2세때 지어진 힌두사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보수현장. 이 곳은 남겨진 것이 별로 없이 폐허란 말을 실감하게 한다. 툭툭이맨은 이 곳에 볼게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굳이 빼먹고 지나가고 싶지 않아 들러보았다.
방치된 사자의 얼굴은 떼가 버리고(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어딜 가도 사자의 얼굴은 온전한 것이 거의 없다. 도굴꾼들이 죄다 떼어간 탓이다)
어디에 붙어 있어야 할 지 모르는 이 조각은 훔쳐가기 좋게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길건너에 톰마논이 있었다. 수르야바르만 2세때 지어진 축조물.
풍화에 쓸려 훼손 정도가 심했지만 축조물의 전체 윤곽은 매우 아름답고 드문드문 살아있는 부조들의 곡선은 역시 유연하고 화려했다.
힌두교 양식의 이 사원에서 여신들의 부조를 보다 보면 조각의 깊고 섬세함, 자연스러운 곡선, 그리고 화려한 장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동양미가 넘치는 이 부조들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숏다리였다. ㅡㅡ;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씨엠립 시내로 이동하는데 앙코르톰의 동문을 들어가 남문으로 나갔다. 다리를 건너면서 찍은 사진의 전방에 보이는 동쪽 탑문과 다리의 좌우 난간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외곽만도 이렇게 아름다우면 내부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가 많이 되었다. 코끼리테라스와 왕의 테라스 등을 지나가면서 볼수 있었는데 툭툭이를 타고 지나가며 얼핏 보는 것도 상당한 감흥으로 다가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정해놓은 식당은 없었다. 유적군으로부터 씨엠립 시내가 멀어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으면 그 곳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툭툭이맨은 다시 시내로 왔다가 같은 곳으로 되돌아 가자면 기름값도 제딴엔 많이 들고 하니 근처 원두막같은 식당에서 먹으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굳이 시내로 나가겠다며 갖고 있던 책자에서 추천하는 식당 중 하나를 가려고 했다. 그는 뭔가 주워먹기 위해 자기가 알고 있는 식당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역시 거절했다. 그랬더니 내가 말한 식당 근처로 가서 내려 주고는 그 식당이 어딘지 모르겠다는거였다. 아무래도 이 인간 장난질치는 것 같았다. 후진국 여행에서 수시로 겪는 일이었다. 남들이 가는 식당만 가느니 안가는 식당을 가보는것도 괜찮겠다싶어 가보자고 했다. 와서 보니 적잖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 좋은 식당이라고 판단되었다. Anchor Meass라는 식당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치킨볶음밥과 야채요리 두 가지, 그리고 로스트비프를 시켰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야채요리는 달작지근했고 로스트 비프도 맛이 좋았다. 이 것도 캄보디아 전통식이 맞나? 사진에 보이는 젓갈 비스므리하게 생긴 것은 비프를 찍어먹는 용도의 치즈소스라 한다. 맛이 독특했는데 이 치즈소스는 캄보디안 전통향료가 맞다고 한다. 앙코르맥주가 밋밋한 맛이라 우리는 하이네켄과 타이거맥주를 마셨다. 식당 음식값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툭툭이맨이 데려온 손님들에게 들이미는 메뉴는 툭툭이에게 줄 팁까지 포함된 것으로 스스로 찾아온 손님과는 값이 다른 메뉴가 아니었까 의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