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3
1월 17일(수)
왠수같은 수마를 이겨낸 우리는 드디어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서늘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타즈마할을 향해 걸어서 갔다. 여명에 희미하게 윤곽이 드러나는 타즈마할 입구는 환상적인 자태를 보였다.
입장료가 엄청나게 비싸다. 자그마치 750루피였다. 일본에서도 보지 못한 입장료다. 얼마나 멋진 건물이기에 그러는지 보자며 벼르고 들어갔다. 아침 9시가 되기도 한참 전이건만 일출과 함께 감상하려는 관광객들을 입장시켜 주고 있었다. 검표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돌아서니 두 번째 입구가 나오는데 여명을 받은 그 문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희끄므리한 웅장한 건물을 보고는 숨이 막혔다.
사진에서 보는 타즈마할을 보고 뭘 그리 호들갑이냐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와서 전체 윤곽이 눈에 들어 오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한동안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감탄사도 작게 중얼거리듯 나올 뿐. 아마도 모두가 넋을 잃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뭔가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언어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고고함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갖다 붙일만 할까. 이따금씩 돔 주변으로 독수리 가 몇마리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를 더한다.
타즈마할은 무굴제국시대 황제이자 건축광이었던 샤 자한이 아기를 낳다 죽은 자신의 아내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무덤으로 1632년부터 22년동안 지어진 건축물이다. 인부 20만명, 코끼리 1,000마리 동원, 총공사비 사천만 루피였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훨씬 웅장했다. 당시 필요했던 어마어마한 양의 대리석이 인도산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대리석을 외국에서 수입하여 제국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결국 보다 못한(?) 아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시키고 자신이 등극했다고 한다.
더욱 슬픈 사연은 아우랑제브의 샤 자한에 대한 학대는 살아있는 동안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샤 자한이 유폐되어 있던 아그라성에서 이 타즈마할이 보인다고하는데 그 곳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구경한 관계로 보지 못했다. 만일 그곳에서 보았다면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슬프게 보이지 않았을까싶다.
좌우 양 옆으로는 보조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잘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관건물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보조건물에서 내다보며 찍은 사진
다시 나가면서 되돌아와 보는 관문은 본관을 보느라 쳐다 볼 여가도 없었던데다 날이 밝은 뒤 보는 방향이 달라서 그랬는지 이 것 또한 그냥 보아 넘기기에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나오기가 아쉬워 담너머 보이는 것도 찰칵!
아무리 봐도 실증이 나지 않는 곳이었지만 감덩은 감덩이고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없으니 한참을 보고 해 뜬 뒤 숙소로 돌아와 근처 엉성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는 서둘러 파테푸르시크리로 가는 버스를 주워 탔다.
파테푸르시크리는 무굴제국시대 악바르황제가 잠시 수도로 삼았던 곳이라고 한다. 물이 부족해 결국 수도로서의 기능은 14년만에 끝났다나. 1시간 50분이 걸려 도착한 종점 파테푸르시크리에서 내려 회교사원으로 가는 길은 말도 못하게 더럽고 지저분했다. 이 멋진 풍광 아래는 완전 쓰레기더미다. 겨울인 지금도 이정도면 여름엔 정말 장난이 아니겠군.
그 곳으로 가는 길은 가축의 배설물이 길 한가운데를 흐르는 등 드물게 더럽고 지저분했다. 관광객이 다니는 이 길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개념 없군 ㅡㅡ;
잡화점
열심히 신문을 보시는 이 아저씨 가게는 뭘 파는 가게랑가?
과일가게
길가다 만나 경은이가 찍은 아기들 쌍동이인가보다.
나도 하나만 줄래? 그랬더니 인상쓰고 쳐다본다.
가는 길에 경은이가 찍은 그곳 주민아가씨?(소녀?)들.
어쨋든 이 곳에서 회교사원과 왕궁을 보았다. 길에서 무우를 깎아 팔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날이 더워서였는지 한국에선 안먹던 무우를 먹고싶어 하나 사 보았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아주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한국의 무우보다는 아주 가늘어 한 입에 베어 물기에 아주 좋다.
이 사원의 장로쯤 되는 분들인 것 같다. 한쪽 구석에 휴식중인 노인들.
가운데 대리석으로 된 작고 흰 건물은 무슬림 성자 살림 치스티의 무덤이다. 악바르 황제가 후사를 걱정하던 중 그의 예언 후 3명의 아들을 얻었다는 그 수피 성자였다 한다.
살림 치스티 무덤 내부. 이 곳에 들어가려면 남자는 회교식 모자를 써야만 한다. 나도 쓰고 들어갔다.
이 곳에 들어 가니 이 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우리나라로 치면 신학생정도 되려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내부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섰다. 돈을 요구할게 뻔해 거절했더니 자기는 단지 학생이며 이 곳의 가이드도 수업의 일부란다. 한 번 속아보자고 그와 함께 다니며 나 혼자 안내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구경하다가 다시 모이기로 했다.
비가 오면 지붕으로부터 기둥 내의 관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쏟아내면 다시 지하의 저수탱크로 들어간다. 물이 부족했으니 한방울이라도 버리지 않으려 한 노력이 보인다.
안내가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사원 한 귀퉁이에 노점에 데리고 가더니 자기 친구가 하는 가게라며 물건을 좀 사달랜다. 나는 원하는 물건이 여기에 없을 뿐아니라 너의 안내는 목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분명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극구 하는 변명은 그런 뜻은 아니었단다. 그랬더니 가게 주인은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엠피3를 갖고싶어 뭐든 갖고 가도 좋으니 달랜다. 여행기록을 위해 갖고 다니는 엠피3를 팔면 여행 기록을 포기한단 의민데 내가 미쳤냐. 역시 지금 사용하고 있다며 거절했더니 당신은 한국에 가면 또 살 수 있으면서 뭘 그리 비싸게 노냐고 한다. 그래서 대꾸했다. 이거 미화 200달러나 하는 물건인데 당신 물건중에 그런 고가 물건이 있는지 되물었더니 조금 놀라는 눈치다. ㅋ 나를 안내해준 이 친구는 결국 내게 뭔가 요구를 했다. "너를 만난 기념으로 보관하고 싶으니 한국 돈을 좀 달라"고 한다. 잔돈이 있을리 만무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000원을 주었다. 50루피 가까운 돈이니 관광 가이드 경비로 적은 돈은 아니었다.
이 번엔 이 곳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지어진 왕궁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아그라로 돌아오는 길도 차창 바깥 시골 구경에 지루한 줄 몰랐다.
찝차를 추월중인 우리의 뽀오쓰. 달려라 달려.
다시 아그라로 돌아온 뒤 오토릭샤 두 대로 나누어 타고 역시 무굴시대 황제 악바르가 지은 유서깊은 아그라 성으로 갔다.
그런데 매표소에 아그라포트 매표소에서 내려달라고 했는데 릭샤왈라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엉뚱한데 내려 주었다. 우리는 입장은 포기한채 까칠자매(은정, 은영)와 용재를 찾아다녔다. 입구를 찾아 돌던 중 사이클 릭샤왈라 한 사람이 자기의 릭샤를 타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면서 따라다녔다.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며 애써 외면했지만 그는 집요했다. 거의 15분 가까이 따라 다니다가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다.
결국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어차피 문닫을 시간이었음) 바깥에서 성을 잠깐 본 뒤 우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세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밥먹을 시간엔 호텔로 돌아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타즈마할이 내려다 보이는 특별한 식당에서 럭셔리하게 먹을 참이었다. 배고파 미칠 지경이건만 느즈막이 밥먹고 셋이서 즐기다 왔다나? 솔직히 세사람 모가지를 확 꺾고싶었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길래 경찰서에 실종신고까지 해야되나 말아야되나 고민하며 그렇게도 걱정하던 내가 그들의 무사귀환과 함께 희희낙낙하는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근데 이건 또 무슨 심뽀지? 밥도 대충먹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다니 억울해 잉! ㅡㅜ 기차역은 많은 사람들로 혼잡해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앉은 모습들이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냐. 전쟁북새통에 피난열차 기다리는 그 모습이 이랬을까.
기차역에서... 이런 짐빙얼. 역에서 세시간 가까이를 기다렸넹. 이런거 다반사랜다. 기차에 대한 안내 방송도 없고 플랫포옴에 대한 야그도 없고 언제 올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예정시간도 안됐는데 와갖고 대충싣고 대충 떠나는 싸가지 없는 경우도 있단다. 오죽 여행하기 어려우면 인도가 배낭여행 선수들의 마지막 귀착점이라고 할까. 한국 여학생 두 명이 열차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어찌할거나 11시간을 자면서 가야 되는데 좌석이 없으면 노숙자들하고 구석에서 새우잠 자야 되는디. 참 가슴아프다. ㅜㅡ 그래서 인도 배낭여행은 여행사에서 핼퍼를 따라 붙이는구나 싶었다.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데 인터넷 어딜 뒤져도 패키지 배낭여행에는 헬퍼가 따라 붙는다고 표시되어 있다. 왜 그러나 했다. 그들의 임무는 이곳 도시 숙소에서 다음 도시 숙소로 여행객을 계속 인도하는 것. 나중에 항의라도 할까봐 그런지 여행사 직원이 하는 말이 재밌다. "미리 알고 가십시오. 인도에서는 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안되는일도 없습니다." 젠장! 맞는 말이군.
우리의 헬퍼 가으럽이다. 인도 최고 선망의 직업이 여행가이드이고 가장 또이또이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랜다. 근데 약간은 맹한 구석이 좀 있어서 기차 좌석을 잘못 찾는 실수로 인해 고객으로 하여금 엄한 사람하고 자다말고 실갱이하게 만들고... 어줍잖게 배운 한국말을 써먹어 보려고 무쟈게 노력하는데 내가 듣기엔 꼭 외국어같아 알아듣기 어려워서 말했다. "걍 영어로 하셔" 어쨋든 디게 착한 사람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근데 영어도 알아듣기 어려워서... ㅜㅜ
1월 18(목)
어쨋든 아침에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숙소인 Hotel Regard는 도로변에 있는 호텔이었지만 방은 후면에 있어서 조용한 편이었다. 방 분위기가 우중충한 것은 어딜 가나 똑같다. 좌우당간 식사는 가든에서 한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아침식사때 감격했다. 이제까지 먹어 본 아침으론 최고였다. 음식은 고만고만�지만 가든에서의 아침식사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꾸질꾸질한 호텔이었지만 가든은 운치가 넘치고 웨이터는 신사였다. 웨이터 사진이 없는게 좀 아쉽넹.
좌로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은정, 용재, 나, 가으럽, 경은이 엄마, 은영. 그리고 경은이는 사진 찍느라 여기 없다. 어쨋든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환전을 하기 위해 은행부터 찾았다. 가까운 은행으로 갔더니 환전하는 은행이 따로 있다며 그 은행 직원이 친절하게도 약도를 그려준다. 다시 약도를 보고 졸라 걸었다.
바라나시에서의 일정이 만 이틀인 관계로 그리 볼 것도 없는 사르나트 지역에 가기로 했다. 인도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다. 그리고 티벳음식인 뗌뚝과 뚝바를 꼭 먹어보고 싶었다. 오토릭샤 두 대로 나누어 타고 기냥 갔다. 바라나시고고학박물관에서 불교 유적을 보았는데 그중 석가모니의 예술작품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 왔다. AD 5세기 부처 반신상인데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완벽한 석상의 곡선이 어찌나 유려하고 아름답던지 지그시 감은 눈을 금방이라도 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참을 들여다 보고 나왔다.
사르나트 유적군에서는 다맥스투파라는 건축목적이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상하고 불균형한 건축물이 있었다.
쓰레기 비닐이 날아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이곳의 허름한 복장의 사람들은 종잡을수가 없다. 그냥 천 하나 몸에 두르고 머리와 수염은 안깎고 묶었길래 수행자인가 싶어 예의를 다해 인사하면 돈달랜다. 여기 뿐 아니라 다른 곳 어딜 가서도 그런 사람들은 흔히 보게 된다. 도대체 거지와 수행자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이 곳에서 스님 두 분을 만났다. 한 분은 여자 한 분은 남자분인데 먹는 거라며 이상한 풀을 주길래 맛보았다. 어렸을 때 먹던 싱아 맛이다. 중국어를 하시길래 그러잖아도 배운 중국어를 써먹기 위해 상해로 가려다 말고 이리로 왔으니 생각잖은 기회다 싶어 어디서 오셨는지를 물었다. 생각지 않게 중국어로 질문하자 무척 반가와했다. 인사 나누고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 주소를 교환했다. 사진을 꼭 보내겠노라고. 용재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내 사진을 같이 보내려고 아직 못보냈다. 용재야. 니 사진파일 빨랑 내놔라.
시계 방향으로 두 분 스님, 까칠시스터즈의 모자쓴 뒷모습, 전통의상을 입고 폼잡은 나, 경은엄마의 모습
경은엄마는 어줍잖은 영어에 어줍잖은 중국어까지 구사(?)하는 날 보고는 대단하다며 감탄하신다. 크크.. 알고 보면 실속 없구만. ㅡㅡ; 어쨋든 나도 한 번 개폼 좀 잡아 보세. 방방 뜨는 것 같구만.
이 곳을 떠나 불교 사찰인 물라간다 꾸띠비하르도 좀 들러 보았다. 이 곳에는 싯다르타가 득도하던 나무의 3세라던가 하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거대한 나무가 그 문제의 나무라 여기고 낙엽 한 개를 주워 왔다.
점심식사를 위해 문제의 티벳식당에 찾아 갔다. 사진은 식당 출입구.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에서 찍은 창문이 재미있다.
뗌뚝(우리나라의 수제비같은 음식은데 풋내가 상큼하다. 뚝 떼어서 만들었다고 뗌뚝인가?), 뚝바(국수같은 음식인데 역시 상큼한 풋내가 좋다), (티베트식 만두)를 먹고 있는 경은, 은정, 은영, 경은엄마 그리고 용재. 나는 사진찍는 중이라 안보임. 면과 수제비는 찰기가 없지만 국물은 일품이다.
먹고 나서 다시 갠지스강으로 갈 참에 가게 위 담며락에 여유롭게 걸터 앉은 원숭이가 재미있다.
이시키! 누굴 내려다 본다 이거! 눈 안깔어? 쥐삘라. 갠지스 강으로 가기 위해 다시 오토릭샤를 탔다. 갠지스강의 다샤스와메트가트(그 많은 가트 이름 중 이름 외우기가 가장 그지같은 곳이다-가트 : 힌두교도들이 목욕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갠지스강에는 상당히 많은 가트가 있다. 원래는 빨래터라는 뜻. 편집자주 띵!) 도착해서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었고 왠 각국의 잡다한 관광객들이 개떼같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인도 음악에 관심이 많은 만큼 인도 전통악기 연주 공연을 보러 갈 참이었다. 어차피 공연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으니 뭐하는건지 모르겠지만 구경이나 하자싶어 주저 앉았다. 만일 시간이 없어서 그곳을 떴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이 장엄한 예식이 어찌 여행책자에 안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6명의 힌두교 사제들이 나와 각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제단으로 각각 올라가 자리를 잡자 바로 후면 힌두 사원의 탑에 불이 켜지고 그곳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제사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생음악이다.
타블라와 콩가, 인도식 하프(이름이 뭐였더라), 그리고 남자 목소리의 노래였다. 어둠이 깔린 신비로운 갠지스강가에서 강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사제들의 모습은 음악과 어우러져 종교 여부를 떠나 경건하고 장엄한 광경에 크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에 Y자형태로 끈을 달아 설치된 것은 종이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도석에서 이를 쉴새 없이 규칙적으로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은 신비한 소리로 들렸다.
횟불을 들고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의 모습
의식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갠지스강가로 몰려나가 나뭇잎으로 만든 조각배에 불을 붙인 초를 담아 띄웠다. 그걸 구경하려고 따라 내려가자 한 소녀가 열심히 하나씩 내주더니 내게도 하나를 내준다. 돈을 요구할 것은 뻔하니 안받으려 했다. 그래도 굳이 손에 쥐어 준다. 첨엔 사원의 자원봉사자인가 했다. 그걸 강물에 띠우고 인도인들에게 축복을 빌며 되돌아 나오는데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얼마냐" 물었더니 50루피랜다. 어이가 없었다. 1,000원이 넘는 돈인데 이건 여기선 엄청 큰돈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어린 도둑에게 소리를 쳤다. "뭐? 50루피라고?" 그러나 어찌하랴. 도둑에게 문을 열어 놓은 것은 나인걸. 어린아이한테서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껴보긴 첨이었다.
그 곳을 떠나 아야르 카페라는 곳을 찾아 갔다.아니 강가로 가면서 이 곳이 우리 저녁먹기로 예정되 있는 곳이구나 하고는 위치를 확인해 두었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북부에 해당하는 이 곳에 남부 음식점은 이 곳 외엔 거의 드문 모양이다. 우선 밖에서 보는 식당의 운치가 여간이 아닐쎄.
이게 바로 남인도의 음식이다. 맛살라라고 부른단다. 원래가 유명한 집이지만 졸라 담백하고 졸라 맛있다. 아침식사라면 몰라도 저녁에 먹기엔 왠지 모르게 2% 부족한 느낌.
웃기는건 이집 주방은 2층에 있어서 음식이 2층에서 내려온다. 2층에서 음식쓰레기를 머리에 이고 내려오는 아저씨가 아주 귀여웠다. 키는 반바지요 왕방울만한 눈에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음식쓰레기가 가득 담긴 쇼트닝 통을 머리에 이었는데 흘러 내리는 국물을 피하기 위해 파란색 비닐봉지를 모자처럼 머리에 뒤집어 썼다. 꾀재재한 옷에 앞치만지 뒷치만지 분간도 안가는 걸 두르고 있었다. 내려 오느라고 머리는 정면을 향하되 눈은 아래로 내려 깔고 조심스러웠으며 쓰레기가 무거운지 팔은 후둘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힌디어로 종업원인지 그집 아들인지 하는 애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영어로 통역하길 사진을 찍어 달란 소리랜다. 포즈는 이미 잡고 있는데 무거워서 팔을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영 안쓰럽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 소년은 얼른 달려가 그를 안고 함께 포즈를 취했다. 웃음이 나오는걸 참고 찍어 줬더니 쓰레기통을 내려 놓고 다가와 사진을 보며 마냥 신기해 하는 모습이었다. 더 웃기는 건 바로 앞사람의 표정이다. 애교가 넘쳐서... 어윽. 웁! ^^
집으로 돌아와 맥주 몇 병하구 청포도(엄청나게 싼데다 씨도 없어 먹기 편하고 맛은 최고다)를 잔뜩사서 호텔로 돌아와 먹고 마셨다. 와서 보니 가으럽의 동생이 와 둘이 함께 있길래 불러다 함께 먹고 마셨다. 동생은 고작 한국어를 5개월인가 배웠다는데 언어의 천재인가 유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