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여행/음악에 관한...

레코딩의 역사

코렐리 2007. 4. 20. 15:50

이 글은 나름대로 오래 전부터 여기 저기서 읽은 많은 자료로 부터 기억해서 쓴 것과 모아 둔 자료를 참조해서 쓴 글이며 나의 사견이 약간 들어간 터라 자료 출처는 밝히기가 불가능하다. 가장 많이 인용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몇 년전 세계를 움직인 명반들이라는 기사에서 나온 녹음의 히스토리, 그리고 성음에서 출시한 50장짜리 박스세트의 매뉴얼 책자이다.

 

1. 개발초창기

 

1877년 통신기사였던 토머스 에디슨은 모르스 신호의 기록장치를 개량하던 중 그 모르스 신호가 기록된 원반에 재생침을 대고 고속회전을 시키면 리드미컬한 소리가 재생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해 8월 부하직원인 존 크루시에게 설계도면을 주고 만들게 한 것이 축음기(포노그래프)였다. 회전중인 실린더를 음의 진동에 따라 수직으로 커팅(종진동방식)하여 만들어진 골을 따라 재생침이 긁는 소리가 곧 재생음이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를 최초로 취입하였는데 쇠뭉치에서 재생되는 노래를 듣고 크루시는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에디슨은 이 재생장치를 포노그래프라고 명명하고 특허를 받았다.

에디슨

 

에디슨이 최초로 개발한 축음기 틴 포일

 

그러나 이 것이 최초의 재생장치 발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875년 프랑스인 레온스코트의 포노그래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은바 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레코드 산업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에디슨의 발명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 때부터 개발과 개량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빅터사 사장 존슨은 태엽식 모터를 축음기에 부착하는 획기적인 발명과 진전을 이룩하였다.

 

벨, 틴터 등은 기존 원통형 음반에서 원반식 음반으로 개량하여 특허를 받았다. 여기서 다시 1887년 에밀 베를리너는 종진동 방식을 횡진동(재생침이 좌우로 진동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음을 개량하였는데 이는 기존 종진동 방식의 경우 음이 찌그러지는 현상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밀 베를리너

 

 

1890년 에디슨은 다시 전기 모터를 이용하여 원터치 녹음방식을 개발하였다.(이전에는 원반을 손으로 돌려 녹음하였음) 1890년에는 바늘에 보석(사파이어)가 처음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해에 그 유명한 컬럼비아사가 설립되었다.

1901년이 되자 에디슨은 스템퍼(오늘날의 스템퍼 기술에 비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지만)를 이용한 대량생산을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어 여러개의 회사가 경쟁하고 있었다. 베를리너 밑에서 일하던 존슨이 12인치 레코드를 발매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10년에는 원반형 음반과 경쟁하던 실린더형 음반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원반형 음반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당시에도 축음기는 급속히 개량되고 있었지만 축음기 한 대의 값은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하니 대중화는 요원한 셈이었다.

 

2. 음질의 개선과 레코드사의 약진

 

1925년 미국 빅터사는 전기녹음 방식을 채택하여 전기녹음 레코드를 발매하였으며 영국 그라모폰, 그 뒤를 이으면서 SP(전축)의 시대가 열렸다. 1926년대가 되자 다이내믹 레인지(Dynamic Range)가 개선된 전축이 축음기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카루소의 목소리를 더욱 카루소답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애호가들은 기존의 축음기로선 당시 신제품이었던 전기녹음 디스크를 재생하면서 제 음색이 나지 않아 결국 전축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영국에서는 이시기에 영국 그라모폰(HMV : His Master's Voice)과 컬럼비아사(Columbia)가 합병하여 EMI(Electric and Musical Industry)를 발족시켜 업계 최대의 회사가 되었다. 이 때 데카(Decca)사는 이제 막 출범하는 마이너 레이블이었다. 독일에서는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이 최대의 회사였으며 엘렉트롤라(Electrola)와 텔레풍켄(Telefunken)이 그 뒤를 이었다. 미국에서는 RCA가 빅터 토킹 머신(Victor Talking Mashine)사를 흡수하여 RCA Victor사가 되었으며 미국 컬럼비아가 그 뒤를 잇는 메이저 회사였다.

 

3. LP의 등장

 

나팔로 집음하여 직접 커팅했던 어쿠스틱 방식(Accoustic Recording)에서 마이크를 거쳐 증폭하고 커팅머신에서 녹음했던 전기 녹음 즉, SP시대로 접어들어 상당기간 이러한 방법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948년 6월 21일미국 컬럼비아사는 뉴욕 소재의 아스트리아 호텔에서 LP(Long Playing Record)개발에 성공하였음을 공식 발표했다.그 첫번 째 신호탄으로 밀슈타인(Nathan Milstein)과 발터(Bruno Walter)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MI4001)을 출시했다. 1931년 RCA에서 이미 LP생산을 시도하였으나 비닐의 마모성과 잡음의 문제로 실패한 바 있었다. 세계 제 2차대전으로 비닐생산 기술은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고 그제서야 LP생산에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후발주자였던 데카사는 유럽 최초로 LP를 생산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이크를 통해 들어온 음을 증폭시키는 방법은 SP의 방식과 같았으나 스튜디오 안에서 잔향이 짧아지는 문제를 인위적인 잔향과 함께 녹음함으로써 해결하고 녹음테이프를 만들어낸 뒤 마음에 들지 않거나 틀린 부분에 대하여 재녹음을 삽입하는 등 편집을 가하여(이 부분이 원음이니 조작음이니 하는 시비거리가 되었다) 마스터 테잎을 만들어 냈다. 마스터링이 완료되면 레커판(Lacquer : 마스터 테이프의 음의 진동에 따라 커팅할 판을 말하며 커팅 후에는 이 판을 재생시키면 똑같은 음이 재생된다)에 다시 정밀 기술을 요하는 커팅작업을 한 뒤 잡음을 줄이기 위해 거친 표면을 도금을 하였다.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다시 프레스용 스템퍼를 만들어 내고 비닐을 넣어 레코드를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이 것은 종전 방식에 비해 매우 복잡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커지고 월터 레그(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남편이었음)의 경우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누렸으며 오늘날에도 레코딩의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새로운 매체의 이름처럼 재생시간이 엄청 길어졌다는 것이었다. 한 편 유럽에서는 잠수함 청음기술을 도입한 데카가 LP개발도 되기 전인 1945년 ffrr(full frequency Range Record)을 개발하여 그때까지만 해도 최대 7,800Hz였던 주파수 범위를 12,000Hz 이상으로 확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주파수의 음을 모두 처리함은 물론 그 이상의 음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타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음질로 데카는 단숨에 메이저로 급부상하였다. 

 

4. Stereo 기술의 개발

 

1957년 미국에서 스테레오 기술이 개발되면서 레코드업계는 다시 한 번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원리는 카드리지의 바늘이 음반의 음골을 지나가면서 접촉하는 양쪽면에 같은 음을 커팅했던 모노 레코드와 달리 스테레오는 각기 다른 음을 커팅하고 카드리지가 2개 채널의 음을 동시에 인식하는 원리였다.

일반적으로 LP의 황금기(Golden Decades)는 1955년부터 1965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때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수 많은 거장들이 활동 하던 시기였을뿐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최고조에 달해 그 이전의 녹음도 그 이후의 녹음도 이에 필적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60년대 후반부터 트랜지스터 기술이 적용됨에 따라 기존 진공관앰프를 이용한 녹음과 비교하자면 음의 풍부함과 섬세함에서 이 시기의 녹음에 필적하지 못함은 부인할 수 없다.

 

5. CD의 등장

 

1978년 필립스에서 11.5cm 크기에 60분 분량의 음악용 콤팩트디스크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필립스는 소니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었게 되었다. 이에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사장은 카라얀에게 디지털 녹음이 아날로그 녹음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정치적 계산이 빠르고 시류를 타는데 능했던 카라얀이 이 것을 놓칠리가 없었다. 1979년 빌리 보스코프스키가 이끄는 빈필 신년음악회가 최초로 디지털로 녹음이 되었고 1980년 카라얀은 이후 자신의 녹음은 디지털로만 할 것을 천명했다.

1981년 4월 15일 부활음악제가 열리던 짤쯔부르크에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소니사 사장 모리타 아키오, 필립스 수뇌진은 CD최종 규격을 발표했다. 그 규격은 12cm의 지름과 74분 2초(682메가바이트)였다. 최초 규격에서 확장된 이유는 카라얀의 입김이 컸다. 이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연주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한 것인데 이보다 규격이 작아 음반을 중간에 갈아 넣게 되면 음악감상의 흥취와 열기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 그 논리였다.

이 기자회견에서 카라얀이 녹음한 "전람회의 그림"의 피날레부를 시연하기까지 하였다. 1982년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음악CD 규격인 CD-DA라는 규격을 제정하여 상품화에 성공하였으며 이듬해 ISO의 인가를 받아 ISO-9660'레드북'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레드북이라는 이름은 ISO-9660 규격서의 표지가 붉은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음반매체였던 LP보다 재생시간이 길고 레이저로 정보를 읽어들이는 디지털시대의 매체인 CD는 LP의 시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CD는 LP가 가진 잡음이 없이 아주 깨끗한 소리를 재생하였으며 LP의 가장 큰 적이었던 먼지, 지문, 흠집, 습기에 모두 강할 뿐만 아니라 휴대하기에도 간편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결정적인 흠으로써 대두되는 것이 디지털신호에 의한 음의 재생 특성상 음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결정적인 문제다. 그러나 16비트로 제한되는 음역은 20비트로 개선되고 이후 다시 24비트로까지 확장하기에 이르지만 역시 음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후 음질을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영상매체로만 인식되었던 DVD가 새로운 매체로 등장할 것처럼 보였으나 최근의 극심한 음반업계의 불황은 이러한 사업에 회의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MP3의 개발은 CD조차도 휴대하기 불편한 물건이 되게 하였고 인터넷의 발달과 불법 음악파일의 난무로 음반을 구입하는데 돈을 쓰는 일은 적어지게 되었다. 최근 음반업계의 불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2007년 4월 소니사는 물론 EMI사까지도 50장짜리 박스세트를 7만원 안팎에 내놓는 출혈까지 감수하고서라도 불황을 타개해 보려는 몸부림이 그 것이다.

향후 음반이란 물건이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시대가 머지 않아 올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