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3
어쨌든 노래를 잘해서 주위의 부러움을 샀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었지만, 나는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았고 여기저기서 걸핏하면 노래를 시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사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예술적 재능을 키워줄 여건이 당시의 우리 집안으로선 없었던 탓에 나의 재능은 천천히 잊혀져 갔다.
3학년이던 1973년에는 이현의 "잘있어요"가 크게 히트했다. 나는 이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남들 앞에서 부르는건 부담스럽지만 혼자 부르는 것은 즐겨했던 나를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방과후의 어느날 교실 청소도 다 끝나고 학우들이 돌아간 뒤에도 당번이었던 탓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최종 청소상태를 확인 받은 뒤에야 교실을 떠날 수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교길에 오르기 위해 복도를 걷던 중 가사에는 있지도 않은 반주까지 입으로 넣어가며 이 노래를 불렀다.
잘있어요 잘있어요. 품빠라붐빠 품빠라붐빠
그 한마디였었네. 짜라붐빠 짜라붐빠
잘가세요 잘가세요. 으짜라붐빠 으짜라붐빠
인사만 했었네.
달빛 어린 호숫가에 앉아
내님 모습 나홀로 새기면
또다시 오겠지 또다시 오겠지 기다립니다....
노래를 부르며 걷던 중 나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5학년 형아들 반은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아 선생님이 내준 문제를 숨죽이고 풀고 있는 모습이 열린 교실문 안으로 들여다 보였던 탓이다. 그럴만큼 그 층의 복도는 쥐죽은듯 조용했으니 순간 수업이 모두 끝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고 발걸읆을 조용조용 도둑 걸음을 걸었다. 쥐죽은듯 조용히 까치발을 하고 가던 나는 역시 열려있던 앞쪽 문에 의자를 놓고 걸터 앉으신 그 반 담임선생님하고 눈이 마주쳤다.
"너 이리 와봐."
'에고 죽었다 이제...'
그 선생님은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나는 오다가다 그 선생님을 보고 열심히 인사했지만, 5학년이 돼더라도 절대 저 선생님 반엔 들어가지 않을거라며 다짐할 정도로 무서웠던 분이었다.
"가방 이리 줘봐."
"예?"
"가방 이리 내 놓아 보라구."
무심결에 가방을 내 놓으며 선생님께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형들 누나들 아직 공부하는줄도 모르고 떠들어서요. 앞으론 안그러겠습니다."
"아냐 괜찮어. 너 노래 잘하더라. 형들 누나들 앞에서 그 노래 다시 한 번 해 봐."
"허걱! 선생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아니야. 네 노래 좀 듣자니까 그러네."
당황해서 가방을 주워들고 내뺐던 기억이 지금도 엊그제같다. 하라면 안하고 아무도 관심 안가지면 하고... 옛말 그대로다 하던 짓도 멍석깔면 안한다는...
다음해인 1974년에는 신중현이라는 낮선(?) 가수가 "미인"이라는 노래를 들고 나왔다. 이 노래는 엄청난 인기를 불러 모았고 2주인가 3주인가 인기차트 1위를 차지했었다. 어린 시각으로 봤을 때의 느낌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전엔 한 번도 보지 못한 이 가수는 전자 기타를 들고 나와 딴따라를 치며 노래를 부를때 입도 삐뚤어지고 고음처리를 위해 몸도 뒤트는게 신기하고 이상한 모양새로 노래를 했다. 지금에 와서야 뮤지션으로서의 신중현의 위대함이 회자되고 있지만 신나면서도 낯설고 신기하지만 괴이쩍기도 한 묘한 가수요 노래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TV에 그가 나왔을 때 콧구멍이 큰 인형이 손목에 조종 철사를 단 채 기타를 치는 모습을 신중현 연주 영상과 번갈아 방송을 내보냈었다. 그 인형의 모습이 하도 우스워 나와 어머니는 한참을 웃었고, 동생들은 방 안을 어지럽게 돌아 다니며 기타치는 인형의 모습을 흉내냈다. 주지하다시피 이 노래는 계면조 5음계를 이용한 전통 우리가락과 곡조를 이용해 락에 완벽하게 접목한 걸작중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바로 얼마 뒤 신중현은 대마초 사건으로 잡혀 들어 갔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엔 대마관리법 제정 이후 사상 초유의 법 소급집행이라는 이상한 조치를 정부가 취한 통에 멀쩡한 연예인들이 법 제정 이전의 범죄(?)때문에 잡혀 갔지만 그 부당하고 불편한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정부는 이 법의 제정과 소급적용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의 해악을 다루는 다큐먼터리를 자주 송출했다. 이걸 본 다음 날이면 이 다큐먼터리를 본 친구들과 충격 받은 소감을 주고 받았고, 보지 못한 친구들은 미치도록 궁금해 했다. 방송내용은 이랬다.
젊은이들이 모여서 휘황번쩍 몽환적인 불빛 속에 모여 춤을 추더라. 분위기는 졸라 퇴폐적이더라. 춤추던 찌질이들이 모여 앉아 이상한 걸 담배처럼 말아서 피우더라. 남녀 할 것 없이 헤롱거리더라. 자동차가 복잡하게 오가는 도로의 영상과 완전 맛 간 청년이 간뎅이가 부어 장난감처럼 만만하게 보이는 자동차를 잡으려고 메뚜기 잡듯 손을 내밀어 덮치는 영상이 겹쳐지더라. 육교 아래 폐인이 다 된 젊은이가 거리에 쓰러져 있고 일부 행인은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몇 몇은 걸음을 멈추고 동정의 뜻을 내비치며 어찌해야 하나 구경만 하더라. 등산길에 오른 젊은이들 중 맛간 친구 하나가 절벽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며 광기의 미소를 짓더니 이내 아래로 뛰어 내리며 비명을 지르더라. 놀란 친구들이 추락지점에 달려 내려가 보니 흥건하게 케첩을 흘리며 누워 있더라.
무지한 대중은 TV영상을 보고 사실로만 받아들였고 잡혀간 연예인들에게는 혀를 찼다. 신문에서도 여러차례 다루었다. 어려서 현관 안으로 배달소년이 신문을 던져 넣으면 가장 먼저 반갑게 집어 드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신문 본댔자 이해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으니 기사 내용을 본 것은 아니었고, 단지 1면에 나오던 김성환 화백의 4컷 만화 "고바우 영감"의 열렬한 팬이었던 내가 먼저 보고 안방으로 들이곤 했다. 김화백의 4컷 만화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제 1컷: 신중현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제 2컷: 무대 위로 방망이를 든 채 경찰이 달려오며 소리친다. "대마초!"
제 3컷: 수갑 찬 채 잡혀간다.
제 4컷: 감옥 건물 철창에서 노래가 흘러 나온다. "한번 피고 두번 피고 자꾸만 피고 싶네..."
후에 중학생이 되면서 팝송을 듣게 되었고 가요는 일체 듣지 않았다. 직장생활이 어느정도 자리잡을 때까지도 클래식, 재즈, 블루스, 락 등만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신중현의 미인을 라디오에서 우연히 다시 듣고 그의 기타사운드에 충격을 먹은 나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당시엔 CD만 모으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재발매가 이루어지지 않은건지 기출반분이 소진되었는지 도통 손아귀에 넣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75년도에는 김정호의 하얀나비가 크게 히트했다. 우수에 찬 감성이 많은 사람들을 매혹했고 나도 역시 그러한 김정호 특유의 매력에 빠져 든듯하다. 이 시기에 나는 프라모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생일이나 어린이날만 되면 나는 어머니를 반 협박(?)해 조립식 장난감 즉 프라모델을 사다 만들어 전시해 놓고는 흐믓해 했지만 학교 간 사이 동생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공을 들여 만든 모델은 남아나지를 못했다. 아무리 꼭꼭 숨겨 놓아도 어떻게 그리도 귀신같이 찾아 내는지 무사히 보존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가 없었다. 당시 가요 톱10 1위곡으로 하얀나비가 선정되어 출연한 김정호는 무대가 아닌 관중석 한가운데 서서 노래했다.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시선은 45도 땅에 꽂은 채 노래하던 그의 모습과 우수에 찬 목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프라모델을 이따금 즐기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김정호와 우수 깊은 그의 하얀나비가 떠오른다. 바로 TV에서 그 때 보았던 그 장면과 목소리가 말이다. 김정호의 이 노래를 들으면 역시 프라모델이 생각이 날 정도로 프라모델과 하얀나비는 나의 추억에 깊게 얽혀 있다.
1976년에는 로보트태권브이라는 극장판 장편 에니매니션이 등장했고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은 안 본 아이들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영화를 본 놈이나 안 본 놈이나 주제가를 부를 줄 모르는 놈은 바보 아니면 방금 남파된 간첩이 부록으로 데려온 아이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개봉상영관이 지나고 근처 2차 개봉관(광명극장)에 이 영화가 왔을때 나도 영화 보여 달라고 어머니 앞에서 떼를 썼지만, 그 땐 13평짜리 우리 집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식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형편은 절대 아니었다. 다음날 하교길이었는지 아님 놀다 돌아 오는 길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생들이 아래층 현관 초입에서 나를 보자 뭐가 그리 반가운지 달려와 떠들었다.
"오빠, 엄마가 오빠 오면 로보트 태권브이 보여준댔어. 빨리 가아!"
동생들이 내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 동생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도 아니고 아홉살과 여덟살이던 동생 둘이 뭘 잘 못 듣고 오해가 생길 일은 아닌 것 같아 동생들을 뒤로 흘린채 냅다 줄달음 쳐 3층에 있던 집으로 들어서며 어머니께 다그쳤다.
"엄마, 엄마, 정말이야? 로보트 태권브이 보내 준다는거?"
"그래, 동생들 데리고 갔다 와."
전날 그리도 무섭던 엄마가 갑자기 천사로 보였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보내 주는 어려운 결정엔 조르다 찐빵 먹은 전날의 내가 가여웠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영화는 엄청나게 재미가 있었다. 로보트 태권브이가 적을 킥으로 걷어차면 깡통 두 개 부딛히는 소릴 낼만큼 음향기술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어이가 없었지만 어린 우리 세대에는 환상 그 자체였고 극장에서 만화영화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다시 없이 짜릿했다. 훈이가 조종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영화 말미에 승리를 안고 우주를 날아 돌아오는 장면에 주제가가 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질러가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정의로 뭉친주먹 로보트태권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두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무적의 우리친구 태권브이
주변에 앉은 애들에게 '나 이노래 아노라' 우쭐대려고 둘러 보았다. 이런 젠장. 다 들 따라 부르잖아 이거. 보통 실망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들과 태권브이를 공유해 왔다는 사실에 왠지 억울하고 심한 박탈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이 노래 가사 외워 멋지게 부르려고 영화 본 놈들한테서 가사 동냥을 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그런 쓸데없는 허탈감도 잠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극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과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나왔다. 지금 와서 이야기지만 이건 생김새를 보나 항공기를 탄채 머리에 올라 도킹한 뒤 로봇을 조종하는 방식이나, 로케트 주먹이 발사되어 적을 발라당 넘겨뜨리는 아이디어나, 신체 여기 저기서 빔을 쏘아 공격하는 컨셉은 분명 일본만화 마징거Z의 아이디어를 도용했건만 아직도 이를 인정하는 사람도 부인하는 사람도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애니매이션이었던 만큼 이걸 굳이 격하시킬 필요가 없다는 묵계였던 듯하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안됐지만 로보트 태권브이가 아닌 신동우 화백의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홍길동"이었다. 작품성으로 보자면 이 작품들이 훨씬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려서부터 형과 방을 같이 썼던 나는 그 후로도 형이 듣던 라디오를 통해 가요를 접했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가요는 없었던 듯하다. 중학생이 되어 어느날 팝송을 접하게 되면서 나는 점차 매니아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제 중학교로 넘어간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