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여행/음악에 관한...

음악과 추억 그리고 추억의 음악 1

코렐리 2012. 10. 7. 10:57

취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이상하리만치 흔하다. 입사원서와 길거리 설문지는 물론 미팅을 나가도, 선을 보러 나가도 하릴없이, 뜬금없이 하는 질문이 취미에 관한 것이다. 취미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레포츠는 활동성을, 독서는 지적 수준을, 난이나 애완동물은 남에 대한 배려를, 예술은 섬세함을 떠올리며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시대 조류에 따라 추가되는 취미들도 많다. 컴퓨터 게임이나 어플앱도 취미로 등장한지 오래다.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앞도적으로 많은 것이 독서와 음악감상이다. 허, 이런... 대답이 뻔하기까지 한 취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함 따져 보자.

 

토씨까지 그대로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겠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취미란

"특정 사물에 대한 심미안을 즐기는 행위로서 비판적능력을 수반하는 ..." 뭐 이런 내용이었다.

피곤할테지만 조금 더 따져 보자. 이때의 기준이라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지. 자신이 가진 취미라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거의 전문가적 수준을 요구한 정도인 만큼 매니아들이 아니고선 그들을 포함한 헤아림에 포함시켜 주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클래식 음악으로 따지자면 말러 교향곡 8번을 듣고 말러의 다른 다른 교향곡과 비교분석을 하고 비평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크나퍼츠부슈의 연주와 슈리히트의 연주를 들어 봤다면 그들이 음악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기본 조건이었다.

독서라면 특정 작가 저작의 책을 여러권 읽고 그에 대한 문학사조와 변화를 읽고 비평을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 인터넷 국어사전을 뒤져 보면 그 의미는 상당히 퇴색되어 있어 새삼 다시 뒤져 보자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즐겨하는 일."

국어학자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변명을 지금에 와서 하며 후퇴하는 이유가 뭘까. "나도 취미가 있는데 그럼 내가 하는건 취미가 아니냐"는 볼멘 소릴 수시로 듣고 고심한 결과일까. 하지만 잡지 속의 패션 광고 따위나 들적거리면서 취미가 독서라 할 수 잆고, 청소기 돌리면서 틀어놓은 라디오 속에서 나오는 노래나 따라 부르면서 취미가 음악감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과거의 정의로 따지자면 나는 언제부터 취미를 가졌던 것일까. 정말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고 추억의 음악들이 있다. 음악에 관련된 추억담을 이야기 하려고 한 내가 이런 이야기들은 왜 꺼냈을까. 그냥 본론부터 꺼내면 괜스리 밋밋한 느낌이 들고 썰렁한 느낌이 들잖나. 나름 서론이라 봐주면 좋겠지만 서론 치곤 넘 길다. ㅡ,.ㅡ;

내가 처음 들었던 노래라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어머니가 불러주신 자장가였을게다. 하지만 기억력이 나빠서라면 할 말 도통 없지만 어머니가 불러주신 자장가는 기억에 없다. 그러면 좀 더 지나치게 거슬러 올라 왔으니 시간을 따라 기억이 닿는데까지 다시 내려가 보자.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어린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상암동이었는데 언덕으로 올라가면 House of Rising이요 언덕을 내려오면 Uptown이었던 구조의 동네였다. 어려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네 식구는 House of Rising Sun에 세들어 살았고, 그 집엔 중학생 쌍동이가 살아 쌍동이네 집으로 통했다. 여기에서 귀여운 여동생이 태어났다. 파상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여동생이 가족에 행복을 선사했다. 그 뒤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사한 집은 Uptown이었지만 역시 단칸방이었다. 주인집 처녀 이름이 세선이어서 동네에선 세선네 집으로 통했다. 1년도 되지 않아 역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이사한 집은 더 더 아래쪽 어느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대갓집이었다. 당시로선 방귀깨나 뀌던 사람들이나 몰던 시발택시도 가진 집이었고 희귀하던 TV는 물론 전축까지도 보유한 부르주아였다. 우리는 그 집 대문간 외양간을 고쳐 얼기설기 세를 내주기 위해 급조한 방에 살아야 했다. 여름엔 너무나 더워서 어린 내 머리에는 땀띠가 나고 그게 악화되어 수십군데가 곪아 수시로 어머니의 손에 잡혀 고름을 짜내야 했다. 고문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머니의 손아귀를 벗어나 바람같이 방을 뛰쳐나와 도망가면 어머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나를 잡으러 달려 오시곤 했고, 고문(?)이 두려웠던 나는 동네를 뺑뺑 돌며 어머니의 손길을 피해 결사적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다. 겨울에는 방안 주전자의 물이 얼어버릴 정도로 추웠다. 안집 안채의 천장을 이고 있던 서까래는 지었던 당시의 것 그대로를 간직한 대갓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돌이켜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시 이런 대갓집에서는 두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살 수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이 집에서 부모님의 실수로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귀여움은 독차지했다. 모두 여섯 식구였다. 아버지의 성실함은 다시 집안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 당시를 회상하곤 하지만 우리집의 형편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당시에도 너무나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야만 할 정도로 많은 빚에 시달렸다.

 

내게는 듣기만 해도 이 어렵고 어렵던 시절의 추억이 떠올려지던 노래들이 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라디오에서 나오기만 하면 하던 일을 멈췄고 안집 TV에서 그 노래만 나오면 달려가 염치불구 안방까지 들어가 노래를 들었다.(안집 주인 아주머니는 무시로 내집 드나들듯 안방을 드나들어도 좋을만큼 나를 많이 이뻐해 주셨다고 어머니는 회상한다) 그 노래는 다름 아닌 차중광의 "내사랑 미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차중광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차중락의 동생이었다고 한다.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이 노래만 나오면 어머니는 "미나 나온다" 라며 어린 아들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나는 달려가 십분 즐기곤 했다. 아마도 음악을 좋하아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미나 빗속에 멀어져간 미나

미나 초라한 이 내 모습을

미나 그대는 모르고 있나

나 혼자서 외로워서 눈물 씻으며

너의 모습 그리워 울고 있는데

미나 빗속에 멀어져간 미나

미나 어디에 있나...

 

조숙했던 탓일까. TV나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불렀고 혼자 있을때는 무심결에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이 노래는 내가 여섯살이던 1969년에 발표된 곡이었다. 그 뒤로도 이 집에 사는 동안 추억을 떠올릴만한 곡들이 많다. 신중현 작곡의 "싫어" 역시 상당한 히트를 했던 탓에 내게도 상당히 익숙한 곡이었다. "싫어"란 곡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이 것이 이정화의 버전이었는지 아니면 펄씨스터즈의 버전이었는지는 기억에 확실치 않다. 어쨌든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혼자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여섯살짜리가 이런 노래를 읇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다.

 

이제 다시는 싫어 웃는것도 싫어졌네.

변해 버린 그대여 왜그런지 알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이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이제 다시는 싫어....

 

이 집에서 사는 동안 주인집 아주머니는 대청마루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 방송을 들으시며 집안일을 하곤 하셨는데, 그에 덤으로 나까지도 알게 모르게 본의 아닌 귀동냥을 하곤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아주머니가 매일 열심히 들으시던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이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희준이 불렀던 주제곡은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새겨졌다.

 

먹구름 가시면 별빛 더 맑은데

20년 풍운 속에 묻고 묻힌 사연들

비바람 흘렀단다

아 영욕은 무상해라 광복 20년...

 

하지만 오늘날 기회가 될 때마다 최희준의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을 찾아 봤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직은 조우하지 못했다. 이 당시 최희준의 노래는 참으로 기억에 많이도 남은 것을 보면 상당히 잘나가던 가수였나 보다. 당시엔 최희준의 "하숙생"이란 노래도 자주 들렸고 "팔도강산"도 그랬다. 사실 하숙생은 1965년에 발표된, 다시 말하면 내가 두 살이던 해에 발표된 곡이지만 대단한 히트곡이엇는지 이 때도 수시로 들을 수 있는 곡이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지금 돌이켜 보면 80년대 이후의 노래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이 당시의 노래들이 시적 표현도 감각적이었고 곡상에도 가난한 세월의 낭만이 들어 있었다. 정난기 많았던 우리 형은 중학생 시절 어디서 들은 노래를 다시 읊조린건지, 스스로 개작했는지 다음과 같이 바꿔 불렀다.

인생은 나이롱뽕 돈따러 왔다가 돈만잃고 가느냐

눈물을 감추고 나혼자 가는길에

돈일랑 생각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우리 형한텐 좀 안된 얘기지만 중학생이 이런 노래 부르는게 내 눈에 띠었다간 뒤통수부터 사서 맞을 터다.

 

한상일의 웨딩드레스 역시 비켜가기 어려운 낭만이 가득한 곡이었다.

 

당신의 웨딩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가 울었던 지난 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웠던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여섯살 당시부터 나는 이미 이런 노래들을 부르며 좋아했다. 지금 내가 그런 모습을 여섯살짜리 한테서 봤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올챙이 꼬리 떼고 내 과거는 잊은채 쬐끄만 시끼가 발랑 까져갖구 어른 노래를 파고 든다며 혀를 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엔 이탈리아 칸초네가 한국인들의 감성에 잘 들어맞아 번안곡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마리사 사니아의 Casa Bianca였는데 한국에선 "언덕위의 하얀집"이란 제목으로 발표가 되었다. 당시 동갑내기 절친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와 놀던 중 나도 모르게 바로 이 노래를 흥얼 거렸다.

"언덕위의 하얀집 하얀집은 우리집..."

방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내 친구의 부모님은 내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는 눈물이 나도록 웃으셨다.

"그 녀석 제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가 익숙해진 모양이네."

그랬다. 테너의 성역으로 노래를 하시던 내 아버지의 18번이기도 한 노래였다.

당시로는 지식인의 집안이었던 안집의 맏형은 카투사 군인이었던 탓에 병역 기간중 많은 것을 누리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비틀스의 Ob-la di Ob-la da를 자주 불러 지금도 생생하고 이 노래를 음반으로 찾아 듣는데는 그 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