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스에 얽힌 어린 날의 추억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구정권을 접수한 신흥군부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하던 사회를 찝쩍거리며 먹고살기 어려운 소시민을 괴롭히던 시절.
이 때가 바로 내가 팝음악에 처음 빠져들기 시작한 청소년기였다.
이 시절 내게는 그 이름만 들어도 닭살이 돋고 혼미해지는 정신을 감당 못해 쓰러질 만큼 흥분하던 그룹이 있었으니 그 이름의 의미 조차도 요령부득인 비지스(Beegees)였다.
굳이 수위를 표현하자면 비지스는 내게 있어 아사하라 쇼코를 바라보는 옴진리교도의 찬양에 다름 아니고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하는 전체주의 치하의 독일 시민에 다름 아니었으며
아바지 수령을 먼 발치서 보고 질질짜며 절규하는 북한주민에 다름 아니었다.
이 때 비지스의 공연을 내가 직접 가서 볼 기회를 가졌다면, 틀림 없이 나도 질질 짜다말고 정줄놓 꼬꾸라졌을게 틀림없었다.
어릴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꿈을 꾸며 실현 가능성까지 점치는 성향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언젠가 내가 크게 성공하면 비지스를 내 손으로 초청해 공연을 벌이겠다는 맹랑한 공상을 하며 내 눈을 멀린 착각을 즐기곤 했다.
당시엔 유독 해체하는 그룹이 많아 공상 속에서나마 속까지 졸이며 그 전에 비지스가 해체하면 안된다는 순진한 설레발을 치곤 하던 것도 이제는 멀고도 아련한 추억이다.
토요일밤의 열기가 개봉되고 비지스가 주도한 2장짜림 음반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Spirit Having Flown 앨범이 발표되면서 음반가게 마다 이들의 음악이 자주 흘러 나왔다.
검은 교복을 입은채 하교길에 나서며 들고 있던 가방의 무게를 순간만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허벅지로 툭 밀면 속에서 짤그락거리며 빈 도시락을 건드리는 젓가락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도, 어느 음반 가게에서 비지스의 음악이 나오면 끝날 때까지 떠나지 못하고 귀를 세운 채 서 있곤 했다. 몇 장 출반되지도 않은 비지스의 음반을 하나라도 손아귀에 쥐기 위해 라이센스고 빽판이고 못보던 판만 나오면 걸신들린 먹깨비모냥 집어들기 바빴다. 없는 돈에 비지스의 음반을 사기 위해 문구점 칼을 사는 대신 형의 면도기에서 날을 꺼내 종이로 말아서 쓰다 얻어 터지는 등 수전노의 경전을 따르던 나는 비지스를 좋아한다는 사람만 만나면 50년지기를 50년만에 만난 것 이상으로 반가와하며 그와 수다를 떨고싶어 했다.
학교에 가면 비지스에 환장하던 친구가 나 말고 두 명이 더 있어 그들과는 적지 않은 친분관계가 유지하고 있었다. 음반과 오디오를 집에 두고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 했지만, 내가 듣던 비지스의 노래를 싫어했던 나의 형은 고자가 죽어 귀신이 되면 이런 소릴 낼수 있다고 했고, 어머니는 이 앓는 소리 또 트느냐고 놀리셨지만 당시 내게는 오로지 오로지 오로지 비지스였다. 결국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없었고 2005년 의리없게 혼자 왔다고 외면한 로빈깁의 공연이 지금도 후회로 남는다. 모리스의 죽음 이후 얼마 전에도 로빈이 떠나고 노쇠한 베리만 남았으니 이젠 비지스의 이름도 서서히 빛바랜 추억만을 남기며 팝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니 나의 어린시절 추억도 그와 함께 희미하게 아련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