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2 페루·네덜란드 the 2nd

오락가락 페루 5-1(쿠스코)

코렐리 2012. 5. 18. 15:35

2012.2.3(금)

흔치 않게 편안히 늘어져 아침 09:45까지 늦잠을 잔 이유는 전 날의 여정이 힘이 들어 지쳤던데도 있었지만, 이 날은 쿠스코 시내만 둘러보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었는데 시간이 그다지 많이 걸리지 않는데다 마지막 여정인 이 날은 좀 더 여유 있게 보낼 생각이기도 했다. 아침 10:00까지가 아침식사 제공시간이어서 데드라인에 간신히 로비로 내려가 마지막 아침식사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메뉴는 항상 똑같다.

 

뜀도령과 나는 바로 근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외 유적지로 돌아다니느라 찾지 못한 12각의 돌부터 찾아 가기로 했다. 전에도 감탄했지만 이들 골목의 돌 이음새는 완벽 그자체여서 이 때도 놀랐고 여행기 정리하느라 다시 이 사진을 들여다 보면서도 놀란다.

 

12각의 돌 찾다 말고 이 위대한 유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부터 한 컷.

 

에걔? 이건 또 뭐야? 너무 심하다. 나중에 흙과 돌로 보수한 모양인데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난다. 돌틈으로 스테고사우르스 3마리가 동시에 어깨동무한 채 들락날락 해도 될 것 같은 틈새가 경악스럽다. 시간 여유도 있어 급하게 찾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쉬엄쉬엄 골목 자체를 즐기며 고대인들이 남긴 유산을 천천히 살펴 봤다.

 

어딜 가나 순수하게만 보이는 아이들이 놀이. 오른쪽 잘생긴 이 녀석이 골목대장인 모양이다. 고것들 이쁘게 생겼다.

 

드디어 찾아낸 12각의 돌. 사진으로만 보고도 경악을 했던 그 돌이다. 어렵게 찾아낸 것도 아니었지만 이 것을 찾아냈을때 우리는 약간의 감동과 약간의 흥분을 했다.

 

도대체 철도 없던 시절에 이걸 어떻게 했을까. 생각할수록 수수께끼다. 이들이 남긴 유적의 아름다움 중 하나는 돌의 생김새를 최대한 이용해 균일하게 깎아 나머지를 버리는 낭비 없이 썼다는 점인데 규칙적인 배열로 인한 단조로움을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가미했으니 그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틈새를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맞췄다. 오늘날의 퍼즐이 이만큼 완벽했던가? 얼마전 신문에서 본 내용이다. 어느 학자가 이렇게 완벽하게 돌을 깎기 위해서는 돌과 돌 사이에 미세 모래를 넣고 계속 마찰시켜 간격을 맞췄다고 주장하고는 이걸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실험을 했다. 결과는 조또 대실패. 설사 그게 성공했다 해도 서로 맞닿는 두 개면은 해결된다지만 나머지 면은 워치게 헐껴? 이걸 계속 다른 면에 맞출 면을 대상 돌에 다시 모래로 비벼 이런 식으로 작업한다면 기존에 깎아 놓은 면에 변화가 생길텐데? 그럼 이게 그렇게 맞겠어? 여기에는 공간적 감각과 수학적 감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건 불가능혀. 직육면체로 한다면 모를까 오늘날 한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는 못할걸?

이 12각의 돌이 있는 곳은 잉카 로카의 궁정이 있던 곳으로 왕의 일족 12명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과 1년의 각 달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고한다. 우리는 이 돌을 찾느라고 돌아다니며 몇 번을 이건게벼 저건게벼 하며 설레발 쳤는데 막상 각을 세어보면 10각 짜리가 대부분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서자마자 뭔가 생각났는지 뜀도령이 내게 물었다.

"형 혹시 바늘 있어요?"

아무리 짐을 줄이고 다니는 나지만 상비약과 바늘실은 항상 갖고 다닌다.

"있어 왜?"

"12각의 돌에 바늘도 안들어간다고 했거든요. 갖고 가서 함 찔러 보자고요."

"뭐? 여지껏 봐왔지만 이음새가 완벽한걸 보면 12각의 돌처럼 완벽하기로 유명한 돌에 바늘같은게 들어 가겠어?"

"잼잖아요. 직접 해보면 얘기꺼리도 생기고."

"어? 그래? 유치하지만 잼겠다. 좋아 호텔로 일단 돌아가자."

이게 40대 아저씨들의 대화라면 젊은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겠지...? 하지만 뜀도령과 내가 생겨먹은게 대저 이러하니 누가 말릴까. 나도 포기했는데.

 

다시 돌아가서 바늘을 챙겨나온 뒤 12각의 돌이 눈에 띠자마자 바늘부터 꺼냈다. 아래 사진의 손은 뜀도령의 손. 바늘은 내꺼.   

 

이봐 어때? 진짜로 안들어 가지? 완벽한 이음새를 가진 돌벽은 이미 계속 봐온지라 새삼 신기할건 없지만 연기 함 해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표정이 좀 그렇다.

'나이도 좀 먹어 보이는 애들이 왜이러냐 안쪽팔리나?'

뜀도령이 책자를 열어 보더니만 어이없는 소릴 했다.

"어! 바늘이 아니고 종잇장이라는데여?" 이런 ~~~ ㅡ,.ㅡ;

그래도 종잇장보다 바늘 넣기가 원래 더 어려운거 아닌가...? 어쨌든 실험했고 증명해 보였으니 됐다. 아 그런데 말이지... 

 

방금 찔러본 곳은 12각의 돌 오른쪽 상단이고 왼쪽 상단은 아래 사진과 같이 벌어졌다. 몇 차례 있었던 대지진이 벌려 놓은 모양이다. 여긴 바늘이나 종잇장이 아니라 더 한것도 들어갈 모양새다. 우리는 이 12각의 돌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골목 한가운데인 이곳에 한참을 머물렀다. 단순한 인간들 같으니.

 

이 번에는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안가본 골목 구석구석을 죄 다 돌아 다녀 볼 생각이었다.

 

골목 분위기는 가는 곳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과거 유적의 기본 바탕은 남겨 놓고 그 위에 식민지 건물을 세웠다는 점이다. 보수한 곳은 정말 엉성하다. 스페인 장인들이 건물을 헐고 다시 그 위에 건물들을 세우면서도 기술적 열등의식을 느껴도 엄청 느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문짝이나

 

벽에 표시한 상점 간판도 개성이 넘치고 운치가 있다.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전통의상을 입은 원주민들을 흔히 볼 수있다는 점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돌아다닌 골목 사진들.

 

 

 

골목 돌기를 마치고 다시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와 허구헌날 그 앞을 지나쳤던 카테드랄로 가봤다. 식민지풍의 대성당이다.

 

우선 바깥에서 요모조모 뜯어 본 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12:00)

 

이 대성당은 잉카시대 바라코차 신전 자리를 허물고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1550년 건축이 시작되었고 100년 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은 100톤을 이용한 주제단이 볼거리다. 지붕에는 1659년 주조된 남미 최대의 종이 있는데 그 깊이있는 울림(우리의 범종에 비하면 물론 땡땡거리는 수준이겠지만)은 40km 떨어진 곳까지 울려 퍼진다고. 대성당 안에 모셔진 갈색 예수상(El Senor de las Tem-blores)은 지진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단다.

 

카테드랄 내부는 1개의 메인 채플과 10개의 소규모 채플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정면에 눈에 띠는 것은 대제단이었다. 은 300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중앙 3층 좌우 4층으로 제단을 꾸몄다. 아기예수의 탄생과 성가족 등이 주테마로 제작되었다. 좌우에는 성요셉과 성마리아 등 성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식민지 개척당시 건설된 성당을 짓기 위해 스페인 최고의 장인들이 척박하고 위험한 이 땅에 무리해서 왔을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2~3류의 장인과 예술가들이 왔을게 틀림없다. 화려하고 거대한 스페인의 카테드랄에 비해 볼거 없는 모양새를 보면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하지만 제단은 예상 외로 잘 만들어졌다. 걸려 있는 성화들은 눈길을 전혀 끌지 못할 수준이었다. 대제단의 뒤쪽으로 돌아들면 목각 성인상이 높게 설치 안치되어 있고 중앙 3층 좌우 3층으로 구성했다.십자가에는 과연 전술한 갈색 피부의 예수가 십자고상에 매달려 있다.

 

성화는 400여점이라고 하는데 이 곳의 성화들은 유럽에서 본 그것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성이 떨어진다. 회화에 있어서 빛에 대한 표현기술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중 재미가 있는 것은 메스티소 화가 마르코스 사파타(Marcos Zapata)가 그린 대형 성화 "최후의 만찬"은 쿠스코의 명물 음식 중 하나인 쿠이(모르모트 구이)가  식탁에 올려져 있다는 점.

건축방식은 외부에서 보자면 코린트식 기둥도 설치되어 있고 본적 없는 단순한 장식도 눈에 띠었다. 내부에는 르네상스풍의 장식과 천장이 보이고 도리아식 기둥을 세워 놓았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거의 없었는데 이는 고딕 양식을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모습인 것 같다. 어쨌든 종합선물세트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게 식민지 풍이래. 그런갑다 허는거지뭐.

 

역대 주교들이 입던 의상들도 전시되어 있고 40대 전시공간은 비어 있었다. 현 주교가 40대인가...?

카테드랄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은 남겨 올 수 없었다. 외부 사진만 찍어 올 수 밖에. 스페인의 어마어마한 대부분의 카테드랄은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이 곳은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

 

같은 종교도 나라마다 다르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등에선 어디에서도 이교도가 모스크에 들어갈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이교도의 출입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페스의 오래된 모스크 내부가 보고싶어 무슬림인 척 하며 진입을 시도하다가 뽀록난 적도 있었다.

"회교도는 항상 쿠란을 갖고 다니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거 아니냐 어디 함 꺼내봐라."

"호텔에다 두고 왔는디요."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 안돼! q#%x9p@!n"

세계의 노동자들이 다 모이는 카타르에서는 더 헷갈렸다. 누군가 통제를 하지 않으니 나도 덮어놓고 한 모스크에 들어가 둘러 보았다. 지친 다리를 쉬느라 바닥에 앉아 있으니 한 명 두 명 다르게 생긴 나를 보고 신기했는지 다가와 곁에 앉아 이것 저것 물어본다. 대여섯명이 내 주변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두가 부자나라인 이 곳 카타르에서 돈을 벌려고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이었다. 그 때 난 두바이에서 구입했던 천과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 나도 무슬림인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캐톨릭 신자임을 밝히고 나서 내가 이 곳에 들어오는 것이 혹시 문제가 되느냐고 물었다. 대부분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중앙아프리카에서 온 한 무슬림은 날 보고 '무슬림도 아니면서 여긴 뭐하러 들어왔느냐'는 말을 하면서 불쾌해 하는 그의 똥씹은 표정이 기억난다. 가는 곳마다 개방 정도가 다른 것이다. 스페인의 어마어마한 카테드랄 내에서 고딕건축의 아름다움과 무리요, 엘 그레코 같은 거장들의 진품 성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감동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이 판국에 식민지풍의 성당내부와 왠지 엉성해 보이는 성화의 사진을 찍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억울할 것도 없었다.

 

이 곳에서의 십자가에는 예수가 매달려 있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한다. 천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이유가 뭘까. 이 곳 카톨릭만의 문화인건지.

 

카테드랄을 나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한 처자가 와서 우리가 사진찍는 양을 보더니 자기도 같은 위치에서 같은 각도로 찍어 달란다. 사진 찍는 장면은 뜀도려이 찍었다. 혼자 여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이 처자는 사진을 찍어 주자 고맙다며 우리에게 이 것 저것 말을 걸어왔다. 그 와중에

 

가족으로 보이는 대군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데 저마다 카메라를 하나씩 내게 내주며 내 카메라로도 찍어 달라는둥 쟤 카메라로도 찍어 달라는둥 하며 단체로 포즈를 취했다. 우리와 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던 그녀는 나는 남 찍어 주느라 바쁘고 뜀도령은 관심없는것 같고 뻘줌했던지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물다 자기 길을 갔다. 친구 생길 찬스였는데 날아갔다. ㅎㅎ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13:00 밥을 먹을 시간이었다. 이 번엔 어디로 갈까 하다가 가 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며 들른 곳이다. 아르마스 광장에 면한 식당인데 카테드랄 바로 근처였는데 식당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와인병을 이용해 천장을 장식해 놓았는데 제법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이집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주문을 마치고 밖을 내다 보는 뜀도령. 밖으로 카테드랄 한켠의 벽이 보이고 광장이 내다 보인다. 내다 보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다.

 

고기 요리도 식상해졌고 해서 생선 요리를 주문했다. 생선 위에 뿌린 소스 위에 얹은 홍당무와 시금치가 이채롭다. 구운 감자와 삶은 야채를 같이 내놓았는데 부드럽고 신선한 생선살과 담백한 소스, 살짝 데쳐 혀끝에 달게 느껴지면서도 씹기에 풍성함이 느껴지는 야채의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골목을 계속 누벼 봤다. 골목으로 들면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을 일부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이 라 콤파니아 헤수스 교회(Iglesia La Compania de Jesus). 잉카 11대 황제 와이나 카파크의 궁전이었던 곳에 세워졌으며 현재 세워져 있는 교회는 1650년 대지진 후에 재건된 것이라 한다.

 

이 곳을 들어갈 때 갑자기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만일 이 비를 마추픽추로 떠나기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우린 그 날 우산을 갖고 다녔을테고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이때서야 들었다.

 

교회 2층에서 내다 본 광장과 카테드랄이 내다 보인다.

 

 

내부 사진은 역시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뜀도령이 훔찍사진을 확보했다. 그 덕에 나도 올린다. 이 정도 제단 장식은 스페인 카테드랄에 비하면 아담한 수준이다. 중앙에는 7층, 좌우 각 6층으로 구성해 예수승천과 좌우 천사의 성화가 들어 있다. 이 성당도 열십자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다. 제단은 10자의 머리에 해당된다. 이 곳은 제단장식으 무척 웋흉한데 스페인 본토에서 제작해 보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듦새가 섬세하다.

 

 

다음으로 들른 바로 근처 기념품 백화점(?)

 

이 곳을 한동안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벽장식 하나를 발견했다. 여러개 살 참인데 하나밖에 없었다. 살만한 기념품 잘 안보이는데 가족들에게 선물로 주기에 이게 좋을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으니 더 갖다 놓을 수 있느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시간은 오늘 밖에 없고 다음날 아침은 리마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야 했다.

주인은 어디 갔는지 소녀가 상점을 지키고 있었다. 문 닫는 시간을 물어봤다. 못알아 듣는다. 손짓발짓 수첩에 적고 별짓거리 다해봤다. 

마다가스카르에선 불어 몰라도 의사소통 정말 잘되었는데 여기서 왜 이렇게 소통이 안돼냐. 영어를 한마디도 못알아 들으매 장사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건지...

어쨌든 간신히 문닫기 전에 돌아올테니 갯수를 확보해 달라 하고 나왔지만 제대로 알아 들은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들른 라 메르스드 교회 및 수도원(Iglesia y Convento La Merced: 15:30).

 

식민지풍의 종탑과 돔형 지붕을 가진 교회로 1534년 세워졌지만 지진으로 무너진 뒤 17세기에 다시 지어진 교회라 한다. 온쪽 입구로 들어갔는데 24개의 기둥과 아치로 둘러싸인 수도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