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페루 3-2(삭사이와망/탐보마차이/푸카푸카라/켄코)
2012.2.1(수) 계속
어느 여행지를 가나 하루 일정이면 숙소로부터 가장 먼 곳부터 가서 가까운 곳으로 역순 방문하는 것이 내겐 일반적인 방법이다. 여행 전체 일정에서는 첫 날 도착 도시가 회항할 도시인 경우 가장 먼 도시부터 갔다가 역시 역순으로 방문한다.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방법은 나와 달랐다. 나라면
탐보마차이 → 푸카푸카라 → 켄코 → 삭사이와망→ 코리칸차 의 순이었을게다. 여행사에선 달랐다,
코리칸차 → 삭사이와망 → 탐보마차이 → 푸카푸카라 → 켄코 의 순이었다.
내가 먼곳부터 다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까운 곳부터 들러 멀리 가서 되돌아 오면 길이 멀어 피곤할 때 불리하다. 마지막에 가장 먼 곳을 시간 문제로 놓치고 온 뒤 그 방향으로 다시 갈 일이 없다면 그 곳은 영원히 못가는 곳이다. 재수 없으면 막차 놓치고 멀쩡한 숙소 놔두고 돈들여 외박하거나 총알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나 먼 곳부터 다니며 가까운 곳으로 돌아오면 시간 부족으로 드를지 못하는 곳은 가장 가까운 곳이다. 다음 날 시간 절약이 가능하다면 그 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행사에서 어떤 순서로 다니든 상관은 없다. 까이꺼 델꼬 다니다 때 되면 집 앞에 내려 주니 거꾸로 가든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피삭에서 삭사이와망으로 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삭사이와망 입구에서 검표원 아저씨가 올라왔다. 세트표에 포함된 곳이다. 이 아저씨가 쓴 모자를 보고 뜀도령과 나는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한국에서도 맘먹고 구할려면 먹고 죽을래두 없는 태극기 모자를 이 아저씬 어떻게 구했을까. 우리가 웃자 이 아저씨도 우리가 한국인이란 걸 눈치챘는지 웃어 보인다.
사진에 찍히고 돈받을 모델들이 야마를 데리고 진치고 있다. 슬쩍 찰칵.
이 곳 역시 돌로 쌓은 건조물이 길게 설치되어 있고 주변은 잔디를 깔았다.
하단에는 거석을 이용했는데 멀리서 보면 그런가보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제 멋대로 생겨 먹은 거석을 일일이 깎아 정교하게 쌓았는데 오늘날의 기술로도 이게 가능할까.
뜀도령의 글을 퍼왔다.
(이 곳의 성벽들을 쌓는데 쓰인 돌은 세 가지라고 한다. 맨아래층의 가장 큰 바위들은 그 맞은편의 로다데로(Rodadero)언덕의 돌과 똑같은 쑥색 섬록암들로 이 부근의 돌을 캐내서 사용한 흔적은 없지만 이 곳에서 쉽게 발견되는 돌을 사용한것을 보면 채석장이 그다지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것을 추측하게 해주면 탑을 쌓는데 사용했을 검정색 안산암은 이 근처에 없는 돌로 가장 가까운 채석장이 각각 15km와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고하니 운반을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을테고 나머지 회색 석회암은 유까이 골짜기에서 가져온 것들이란다.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놨을텐데 침략자들이 쿠스코 성당이나 건물을 짓기 위해서 가져가서 사용했다고하니 정말 몹쓸짓을 한게지. 그러니 두고두고 욕을 먹는거고...)
과장 조금 보태 말하자면 바위를 깎아 맞댄 이음새를 보자면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바위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정교하다. 그 가운데 돌이 생겨먹은 모양새는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 더욱 멋지지만 이런 건축방식은 정말 처음 봤다. 이런 정도의 고도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200명도 채 안되는 피사로의 사적인 군대에 의해 수만명의 군대가 유린당하고 잉카를 집어 삼키는 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의아하다. 그렇다고 잉카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던 민족도 아닌듯한데... ㅡ,.ㅡ;
여기서 또다시 가이드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듣는 이들 모두가 진지하다. 우리도 진지하고싶지만 뭘 알아들어야 진지해지지. 그래서 결론은 하고싶은데까지 철없어 지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이들이 이러고 놀 때
뜀도령과 나는 역시나 각개전투를 하고 있었다. 나중엔 일행이 어디 있는지 뜀도령이 어디에서 각개전투를 하고 있는지 찾아야 할 정도였다. ㅡ,.ㅡ;
잔디가 끝도 없이 깔렸다.
한참 걷다 뒤돌아 보니 우리팀 일행도 브리핑 듣기를 마치고 각개전투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만 거의 끝으로 보이는 구석까지 가봤다.
그 덕에 방목중인 야마까지 만났다. 얘들은 털도 안깎았다. 주인을 알아볼 이들은 낯선 이방인의 접근을 그리 반가와하지 않았다. 눈 한 번 맞춰보려 해도 고개를 돌리고 가버린다.
이리저리 피하는 애들 슬슬 달래가며 근접촬영하느라 애먹었다. 어이! 안녕하쇼? 댁의 패션이 아주 걸출하구려. 물에 적셔 자빠뜨려 끌고 다니면 청소는 식은죽 먹기겠소.
이 곳의 돌 이어 붙인 곳을 돌아다니며 본 중 가장 인상깊은 곳이다. 각각의 돌의 생김새를 이렇게까지 활용하다니 놀랍다. 개성없이 똑같이 잘라 이어 붙이거나 쌓은 건축물들만 보다가 이 곳을 보니 그야말로 자연스러움이 밴 아름다움이 아닌가 연신 감탄사가 나온다. 당연히 틈은 없다. 비가 오면 물이나 샐까 의심스럽다.
뜀군의 블로그에서 또 퍼왔다.
(이 곳 삭사이와망...
망꼬 잉카가 스페인군을 맞이해서 전투를 벌일때 수없이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 그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그 시체들을 뜯어 먹으려는 매들이 몰려들어 포식했기에 유적지의 이름이 삭사이와망, 즉 '배부르게 먹은 매'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주장과 쿠스코가 푸마의 모양대로 지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유적지작 푸마의 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삭사이와망은 삭사우마, 즉 '점박이 얼룩무늬 머리'라는 말의 변형이라는 주장도 펼치고 있단다. 아, 그리고 이곳에서 스페인놈들과 싸울때 밤에는 싸우지 않는 잉카의 전통을 이용해 잉카의 병사들을 몰살했다고 하는데 스페인놈들이 똑똑한건지 망꼬 잉카가 어리숙한건지 어쨌든 소수의 침략자 스페인군들에게 목숨을 잃은 그들은 누가 위로해줘야하나. 어느나라 어느시대이건 지도자의 능력이 중요한 대목이기도 한데 페루의 기본적인 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래 이 건축물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쿠스코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은 요새 또는 성곽이란 주장이 우세했지만 1980년대의 발굴에서 제관들이 미이라가 발굴되면서부터 이곳이 종교적인 중심지였으리란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잉카인들이 종교적인 건물과 군사적인 건물들을 구분하지 않고 살았다는 주장이 우세하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실 확인은 역사학자들의 일로 남겨두고...)
계속되는 펌질
(성벽의 길이는 366m, 맨아래층에는 22개의 톱니같이 튀어나온 부분이 있고 벽의 높이는 약 6.5m, 그 위의 두 번째 벽의 높이는 약 5m, 맨 윗벽의 높이는 약 2.8m라고 하니 아래쪽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치켜들어야 윗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위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맨 아래층의 성벽에는 길이 11.6m, 높이 5.5m, 두께 2m에 달하는 바위가 사용되었고 8.5m의 높이에 약 360톤의 무게가 나가는 돌을 사용했다는데 이래서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보는것과 직접 두 눈으로 현장에서 보는것의 감흥이 다르다는것을 느끼게 해준다. 비싼돈 들여서 간 보람이 있는게지)
아래 사진의 문을 통해 들어가 높지 않은 언덕을 넘어가면 쿠스코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인단다. 이 곳을 올라가 보긴 했지만 거기까진 안가봤다. 뜀도령의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다시 올라가 본 이유는 우리팀 개개인에게 부여된 시간이 이제 끝나가기 때문이었다.
또 퍼옴. 막 퍼옴
(맨 아래층의 문을 따우뿡꾸(Tiupuncu), 모래문 이라고 하는데 내가 본 곳의 문은 이 곳 밖에 없으니 맞는듯 하고 두 번째 성벽의 문은 이 문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아까와나의 문(Acahuanapuncu)이라고 부르는데 왜 못본거지? 아니 봤는데 몰라봤을수도 있겠다. 그리고 세 번째 문은 뷔라꼬차의 문(Viracochapuncu)이라는데 이 문 역시 못봤거나 봐도 몰라봤다는...쯧쯧,,,)
문을 통해 원주민 가족이 언덕으로 올라간다. 우리와 다른 아이 업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아이를 등에 업는 방식은 같지만 자신의 허리에 아이의 다리를 벌려 두르는 우리와 달리 이들은 다리를 벌리지 않고 비스듬하게 업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손주인듯 한 가족의 모습이다.
정겨운 이들을 앞에 가서 슬쩍 찍어봤다. 생업에 이를 많이 쓰는지 아님 영양의 문제인지 젊은 여인의 앞니가 하나도 없다.
역시나 쿠스코 시내가 죄 다 내려다 보인다. 좌측에 아르마스 광장도 내려다 보인다.
내려다 보이는 시내 전체를 찍어봤다.
(세 개의 문을 지나 맨 꼭대기에 올라오면 건물터들이 있단다. 그래 분명 있었다. 읽었던 책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아서 용도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여행후기를 쓰면서 확인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세 개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무유마르까(Muyumarca;둥근마을)로 지름이 22m에 달한다니 그저 놀라울뿐이고 이 탑안에는 수로로 연결된 샘이 있어서 물이 흘러 나왔고 이 물을 모으는 저수지가 있었다는데 페루는 어느곳을 가든지 물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물을 확보하는 능력만큼 그들이 가진 여러가지 역사와 기술을 후대까지 남기는 작업에는 등한시하는 의외성을 느낄 수 있다)
나만 늦어 기다리는 추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두려워 사진 몇 컷 찍고 일행이 타고 있을 버스를 향해 냅다 내달렸다. 허겁지겁 도착해 보니 일행은 그 때 막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아낙네들이 이따금 관광버스에 다가와 물건을 내민다. 아줌마 아니 아가씬가? 어쨌든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인형과 당신 많이도 닮았소. 아주 많이
이동한 곳은 탐보마차이(Tambomachay).
도착해서 입구로부터 걸어들어 가는데 살짝 바람도 불고 쌀쌀한 느낌이 든다. 태양이 자리를 이동해 강렬함을 잃고 내려 앉을 궁리를 시작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 곳에서도 그들이 쌓은 돌의 정교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뜀글
(이 유적지의 이름이 땀뽀 마차이(동굴 땀보)는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는데 그래서 스페인 이름인 바뇨 델 잉카(잉카 목욕탕)로 불려지기도 한단다. 이 곳은 제사를 지내기 전 상징적으로 몸을 닦던 곳으로 이 샘물은 1년 내내 같은 양의 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우리나라 샘물에 담긴 전설처럼 이 물을 마시면 아기를 낳게 해 준다는 미신도 있다는데 한 잔 마시고 올걸 그랬나? 그리고 페루의 맥주 쿠스께냐가 맛있는 이유가 바로 이 일대의 물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데 따지고보면 우리나라 물맛처럼 좋은곳은 없는듯한데 맥주는 왜 니맛도 내맛도 나지않는걸까? 하긴 현재로는 꼴랑 두 회사가 한국맥주 시장을 꽉 잡고 있으니 노력할 필요성을 못느끼는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맥주는 뭘까? 아, 어설픈 맥주매니아로서 딱 이거다라고 이야기할게 없네없구려...)
대충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남는시간을 얼렁대는 우리 일행. 뜀도령은 골초 여인 하나가 쉼없이 담배 피운다고 궁시렁 궁시렁...
이들이 도시와 시설을 만드는데 있어 중시하는 수로와 그 지혜를 볼 수 있다. 기술적 우수성은 말할 것도 없고.
또다시 이동시간이다. 시간이 남아도 싫고 더 보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면 역시 짜증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개인행동 짤없고... 이게 패키지다. 이쨌든 쭐레쭐레 이동!
있던 바위도 최대한 이용하되 그 어울림과 조화가 일품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푸카푸카라. 도착 기념 한 컷.
푸카푸카라에는 뭐 별거 없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게 다다. 만일 개별여행으로 왔다면 굳이 시간과 돈과 체력을 소모해 가며 굳이 찾아 올 곳은 아니다. 누군가 교외를 둘러 보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빼먹을 곳을 묻는다면 적극 추천할만한 곳이다.
그래도 내려다 보는 경치 하나는 끝내 주지만 이런 경치는 쿠스코 근교만 나가면 지천에 깔렸다.
뜀글이다.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길 하나 건너니 뿌까뿌까라다. 이 곳은 붉은 요새라는 뜻으로 아래쪽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라고들 하는데 그 규모가 작은걸로 보아서 군인들이 거주했거나 망루의 역할을 했던것으로 추측 된다는데 붉은 벽돌이라고 느끼기엔 어려움이 있는듯 하고 망루의 역할을 한것이 맞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는거다. 뻥 뚫린 곳에서 느끼는 그 바람의 맛은 언제나 좋은거다. 단, 추울때는 제외)
역시 입구에는 어김없이 원주민들이 민예품을 들고 나와 깔아 놓고 관광객과 눈이 마주치길 기다린다.
다음으로 들른 곳이 켄코(Qenco). 이 날의 마지막 코스였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이다. 껜꼬라? 이곳 유적지는 길 아래쪽에 있는 바위인데 위쪽에 있는 바위가 껜꼬, 훨씬 아래쪽에 축대가 쌓여 있는 꼭대기에 풀이 나 있는 바위는 껀꼬 치꼬(Quenco Chico:작은 껜꼬)다. 껜꼬는 지그재그라는 뜻으로 껜고 바위 위에 있는 지그재그형 홈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어서였을까? 지그재그인지 그냥 돌덩인지 분간할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책에서 본 그림은 윗쪽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우리는 그냥 돌덩이 앞에서 바라봤으니 제대로된 확인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집중해야함인데.)
이 곳이야 말로 볼 거 없고 왜 왔는지 모르겠다. 공부한게 없어서인가?
이 곳도 역시 근교 방문지 중 시간없을 때 빼먹을 유적 강추지다. 만일 이걸 미리 알고 갔다면 굳이 패키지 이용 안하고 탐보마차이와 삭사이와망만 들르면 족할 것 같다.
그래도 관광버스는 쉼없이 관광객을 실어와 뱉어내고 시간 지나면 다시 쓸어 담아간다. 볼거 없어도 지나치자니 허전해 그냥 들르는 곳인갑다.
뜀글 계속
(이곳 껜꼬는 바위 밑의 갈라진 틈에 의외로 큼지막한 공간이 있고 잘 다듬어 놓은 제단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아니 의자로 보이기도 했다만 어쨌든 왕을 위한 의자란 설과 수술대 혹은 희생의식용 제단이란 설이 난무하고 있다는데 이 돌덩이 밖엔 6m가량의 커다란 돌이 기념비처럼 세워져 있다. 이를 퓨마형상을 한 것으로 해석한다는데 그들의 눈과 마음은 어떻길래 퓨마로 보는건지 이럴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하면 될 듯하다) --- 옳소!
이게 바로 의자인지 아님 제대인지 하는 그 바위인 모양이다. 젠장 앉기도 불편하겠고 게다가 똥꼬가 시려워 치질 걸리기 딱이다. 불편함과 궁색함을 즐기는 왕이라면 의자로 사용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제물 바치는 제대라 쳐도 좁아 터져 제물이 굴러 떨어지겠다. 제사 받는 신 드실거 떨어뜨리면 열받지. 일부러 만든 꼬라지는 역력한데 용도는 내가봐도 오리무중이고 전술한 두 용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패키지 관광에서 필수적으로 들러야 하는 곳. 바로 여행사와 짜고 들르는 기념품 가게다.
짜고 치는 고스톱에서 광만 팔고 구경만 할건지 고했다가 독박 쓸건지는 각자의 의지에 달렸다.
그냥 구경만 하며 그들이 팔아주는 광(차 한잔)만 공짜로 마시며 물건 구경만 했다. 아래 사진은 체스판이다. 한국에선 장기를 두면 한나라와 초나라 중 연배가 높은 사람이 한을 선택한다. 동년배라면 고수가 한나라를 선택한다. 이유는 뻔하다. 초나라 항우가 한나라 유방한테 작살나고 망했으니 그런건데... 그럼 서양식 장기인 체스에 아타우알파와 피사로 군대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지? 피사로 군대를 선택하자니 페루에선 쳐잡아야 할 대상이고 아타우알파를 선택하자니 패망해 식민지가 됐고... 이거 참 고민된다. 오지랖도 병이라니깐.
다시 돌아와 아르마스 광장에 내렸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18:30
광장에는 가로등이 켜졌고
곧 어둠이 내렸다. 우리는 숙소에 잠깐 들러 대충 씻고 짐을 내려 놓은 뒤 중앙시장이란 곳을 가보기로 했다.
쭐레쭐레 걸어가다 보니 대로변 안쪽으로 간이 경기장에서 불빛 이 새어나와 들여다 봤다. 농구 경기가 한창이다. 대따 신기하다. 이렇게 산소 부족한 곳에서 저렇게 뛰고 날면 산소 부족으로 안쓰러지나? 나라면 지레 죽는다.
대로변에 멋진 벽화가 보인다.
구체적으로 무슨 장면을 형상화한 것인지 모르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 하나를 건설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같다.
기차역 부근에 설치된 분수에도 이런 조형물이 있다. 역시 멋지다.
문제의 분수.
그 건너편에 보이는 시장 입구. 엥? 이런 거였어? 고전적인 모습을 기대했으면 내가 넘 크게 기대한건가?
분위기로 봐선 우리네 시장하고 뭐가 다른가?
푸드 코드도 있넹. 여기서 쿠스케냐와 아레키페냐 미니어처 맥주도 눈에 띠었다. 뜀도령이 사려고 했다. 의사소통을 하려고 열라 노력하는데 우리가 에스파뇰을 모르고 이들은 영어를 모른다지만 이렇게까지 의사소통이 안 될 수가 있나. 가격 물어보고 대답 듣는데 한참 걸렸다. 안 샀다. 안사길 잘했다. 나중 가 본 리마에선 여기저기서 파는걸 볼 수 있었는데 값이 훨씬 쌌다.
시장에 특색도 없고 대부분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라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우리는 슬슬 다시 숙소 방향으로 올라 가다가 대형 마트 하나를 발견했다.
다음날 마추픽추에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기에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신선한 과일과 빵 같은 식료품이 즐비했다.
대충 장을 봤다.
매장에서 아래 사진처럼 장을 본 뒤 빵을 조금 더 사고 나서
식사를 하러 갔다.
역시 아르마스 광장에 접한 식당인데 안데스의 전통음악 폴클로레를 연주하는 곳이었다.
이들의 연주는 전 날 들렀던 식당의 연주자들보다 수준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에서 연주했던 이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국 지하철에서 연주했던 몇 몇 단체는 페루 최고의 수준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이러니하다. 그들의 현실이 그런지 몰라도 최고의 연주는 한국에서 듣고 본토에서 오히려 시원찮은 연주 밖에 들을 수 없으니 어이가 좀 없다.
우리에게 열과 성을 다해주었던 웨이터 양반. 우리는 스테이크로 식사를 하며 맛있는 쿠스케냐 맥주를 마셨다. 식사와 음료 그리고 팀브로 150솔이 깨졌다.
호텔로 돌아와 프론트에 근무중인 여직원에게 부탁해 새벽 04:30에 우리를 마추픽추로 향하는 기차역(오얀타이탐보)으로 데려다 줄 택시 수배를 부탁했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익일 새벽 마추픽추행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