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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간이의 알이즈웰

코렐리 2011. 10. 14. 19:13

한국영화가 오랫동안 외면받던 시절이 있었다. 60년대 한국영화 초창기만 해도 마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해병, 오발탄 같이 지금 봐도 손색 없는 수작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영화의 수준이 유치해져 가기 시작하더니 80년대의 영화들은 못봐줄 수준까지 뭉그러져 구제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다행이도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영화의 만듦세가 많이 노련해지면서 눈부시게 발전하더니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를 밀어내고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아직은 해외에서의 지명도가 높지 않아도 향후 한국영화의 세가  더욱 발전할 것 같다. 이제 한국에선 한국영화가 아니면 헐리우드 영화가 대세다. 한국영화가 자국인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헐리우드 영화와 한국영화의 틈바구니에 제 3세계 영화가 발디딜 틈은 그리 넓지 않다. 좀 더 다양하고 수준있는 선택을 위해 제3세계의 영화들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활성화했으면 좋겠단 생각도 한 편 해본다. 이란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천국의 아이들", 스와질랜드의 영화 "야바" 같은 영화들이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지만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 영화나 한국영화와 비교하자면 실적은 초라한 편이니 여기서 그들이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믿는다. 이러한 영화들을 보기 위해 소수의 매니아들은 부산영화제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부산 영화제 이 번에도 놓치는군. 언제나 함 가보나... ㅡ,.ㅡ;) 인도 영화 "세 얼간"이도 그런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적잖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작품 자체에 비해서는 너무나 외면받는 영화라 생각된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적 요소가 있음. 영화 보실라우? 읽지 마셈)

첫 장면은 자신의 나름(?) 중요한 볼 일 하나 때문에 이륙하던 항공기를 멈춰 세우고 내려 어딘가를 찾아가는 조연 배우의 황당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첫 시작의 황당함은 기발함으로 이어져 감탄을 수시로 뱉어내게 만든다. 영화의 시제는 현재로부터 시작되지만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과거의 무대는 천재들만 간다는 ICE공과대학(이거 실존하는 대학인가? 난 뭄바이대학 밖에 몰라서... ㅡ,.ㅡ;)이다.

 

반나체로 치르는 공과대학의 전통아닌 신고식 전통에 반강제적으로 참가한 신입생 저마다의 캐릭터도 다양하다. 하고 싶은 마음이 절대 없지만 모욕감까지 참아가며 할 수 없이 참여하는 파르한과 라주는 교육제도와 체제가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에 끌려가는 이들을 대변한다. 선배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팬티바람에 나비넥타이를 맨 체 손가락으로 권총까지 만들어 007 흉내를 내며 선배들의 엔터테이너 노릇까지 하는 차투르는 이러한 교육제도와 체제에 순응해 성공의 길을 가는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선배의 공격을 기발한 방식으로 제압(?)하는 란초는 우리의 사회에서는 희대의 꼴통으로 불릴만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배려해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 영화는 틀에 박힌 교육제도와 체제를 비틀지만 교육 자체에 대한 가치에 대하여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학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인재들을 양성한다는 명목하에 '최고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펴며 제자들을 피말리는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스스로 결정한 프로젝트에 몰두하느라 제때 과제물을 제출하지 못한 학생을 규정에 의거 졸업을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살로까지 몰고 간 그가, 심지어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공학교육을 시키던 자식을 잃고도 그러한 결과가 자신의 독선 때문이었음을 알면서 애써 모른척 하는건지 아님 정말로 모르기에  쉬지 않고 최고가 되라고 쥐어 짜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개성을 말살하는 교육제도 자체이며 그 체제를 대변한다. 그의 독선에 희생된 이들은 이러한 교육에 좌절하는 낙오자들을 대변한다.

 

책에 있는 것만 가르치려는 교수들에 대한 반항으로 란초는 책 밖의 사실을 추론하고 새로운 논리를 펴는 가르치기 힘든 학생으로 등장하는데 1+1 이 어째서 2 가 되어야만 하는지 설명을 요구하던 에디슨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틀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단하게 만들지만 용케도 위기는 잘 빠져 나가는 그가 완고한 학장으로 하여금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초만능의 인물로 설정된다. 위기의 순간마다 쏟아내는 아이디어는 실로 기발하기에 감탄이 절로 나오고 그의 여유와 익살 속에 학업상의 모든 장애물을 해쳐 나가는 모습은 얄밉기 보다는 이런 학생들이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에 비추어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가난한 라주의 부친이 병원에서 위독한 순간을 넘긴 뒤에야 시험장으로 달려간 란초, 파르한, 라주 세 사람은 30분이나 늦게 시험장에 진입하게 되고 남들보다 30분을 더 요구하게 된다. 늦은 시험장 진입때부터 이들을 인정하지 않은 교수가 자신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을 악용해 교수가 보는 앞에서 자신들의 시험지를 끼워 넣고 마구 섞고 난 뒤 도망치는 장면은 현실성이 조금은 떨어지는 설정이지만 영화제작자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인정할 만하다. 그에겐 주어진 모든 어려움을 이런 식으로 헤쳐 나가니 기발함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의 사고방식에 혀를 차게 되는데, 만일 돈키호테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다면 바로 란초(이하 수퍼맨)가 이닌가 싶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우리 교육의 현실은 이러한 학생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파르한은 그토록 갈망하던 사진작가의 꿈을 접고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그는 내려놓고 싶은 공학을 완고한 부친 때문에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파파보이 캐릭터인데 실제로 이러한 학생들은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다. 자식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교육을 마다할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출세가 보장되지 않고 고단한 길을 가야만 하는 길을 선뜻 허락할 용기있는 부모는 결코 흔치 않다. 저마다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이켜 볼 일이지만(부모 되 본 적이 없어서 이 부분은 자신 없음 ㅡ,.ㅡ;) 그러한 부모가 비난받을 이유도 한국적 정서에선 없다. 이 역시 우리의 용사 수퍼맨은 파르한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설득할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고 자신과 놀지 말라는 그의 아버지를 함께 찾아가 설득한 끝에 파르한의 꿈에 대한 납득과 허락을 이끌어낸다. 

 

가난한 가족을 돌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는 라주는 그 가난 자체 때문에 수시로 공부의 걸림돌이 된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학업을 그만 두고 아버지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지 아니면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을 자신의 입신양명으로 타개하기 위해 모든걸 희생시키고라도 학업을 마쳐야 할지 진퇴양난에 빠진 그는 누구 말마따나 두 건초더미 중 어느걸 먼저 먹을 까 고민하다 결국 굶어 죽는다는 당나귀 부르넬로의 처지가 따로 없다. 우리의 용사 수퍼맨은 그에게도 역시 용기를 주고 졸업에까지 이르게 한 뒤 그의 입신양명에 크게 기여한다. 죽음의 문턱으로부터 라주를 돌려세우는 수퍼맨의 초능력에 관객을 어이없게 만드는게 아니고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감독의 솜씨 역시 대단하다.

 

파르한과 라주에게 용기를 주는 란초는 항상 그들로 하여금 "알 이즈 웰"이란 주문을 외게 만든다. 이건 "All is well"의 인도식 발음이다. "다 잘 풀린다니깐!" 뭐 이런 뜻 정도 되겠다. c, k, p, q, t에는 된발음을 내고, a는 무조건 "아"로 발음하고, r은 받침식 사용이 없고 무조건 "르"로 발음하는 인도영어의 전형이다. 여행을 다니며 그들의 영어를 알아먹는데 애를 먹던 몇 년 전이 떠올라 이 부분에서 웃음이 난다.

 

이 영화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캐릭터가 바로 틀에 박힌 교육제도와 체제에 순응해 배운대로만 열심히 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차투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프리카 어느 나라인가에서 자란 탓에 힌디어도 잘 못하는 인물이다. 힌디어를 모르는 탓에 그는 교수들한테서 배운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해 무조건 외우는 인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물을 양산해 산업사회에 투입하기를 좋아함을 부인할 수도 없다. 힌디어를 알지 못해 란초로부터 골탕을 먹고 전교적인 망신까지 당한데다 학장과 교수들에게 단단히 찍히는 수모를 당한 그는 "너희 세 놈들보다는 더 큰 성공을 할테니 그 때 다시 보자"는 절지부심의 서약을 하고 이를 현실화시킨 뒤 세 사람의 기를 죽이고자 세 사람을 다시 찾는다. 문제는차투르가 두 사람을 불러내 자신을 과시하는데 성공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잠적한 란초를 찾아내기 위해 각기 다른 두 목적을 가진 라주, 파르한, 차투르 세 사람은 옛친구 란초를 찾아 나선다. 라주와 파르한은 자신들에게 용기를 주고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준 친구를 찾아내기 위해, 차투르는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바로 이 시점이 영화의 현재 시제인 셈이다.

 

친구와 주변인들에게 용기, 성취 그리고 화해를 남기고 떠났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랑하는 여자를 얻지 못하는 소위 "바리깡을 든 중" 신세였다. 란초를 찾는 파르한과 라주의 목적에는 란초의 사랑을 이루어 주려는 2차 목적이 있었고 차투르는 중요한 사업의 열쇄를 쥔 은둔 과학자가 란초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다는 이유도 갖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여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란초라는 인물을 두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영화는 행복한 결과를 맺게 되는데 141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다.

 

이 영화는 로맨스, 코메디, 뮤지컬을 한데 버무렸다. 감독이 여러 장르를 한꺼번에 욕심을 내면 네맛도 내맛도 아닌 이상한 짬뽕이 수시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나 갠적으로는 세 가지 모두에서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한데 사랑, 우정, 사제간의 정 이런 것들을 골고루 넣되 자연스럽게 버무렸다.

교육제도와 체제에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지만 교육 자체는 값진 것이라는 설명은 자연재해 속에서 난산을 겪는 학장의 딸과 태아를 주변에 깔린 과학의 원리들을 동원해 살려내는 장면은 교육의 위대함과 과학에 대한 찬사가 버무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교육을 바라보는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녹아있다. 그러한 시각은 란초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가까스로 찾아내 그가 하는 일을 관객에게 확인 시키는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다녀온 인도는 분명 심도깊은 정신문화를 가진 매력 강한 나라이지만 도시 구석구석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곳 투성이였다. 영화속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도시속에서 카메라가 잡은 앵글 속의 영상은 이 곳이 내가 다녀 온 인도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뛰어나다. 영상미학들 위해 가려 찍은 것이다. 어쨌든 영상미에서도 적지 않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싯타르, 사랑기, 타블라 등의 악기가 어우러져 내는 깊은 음폭과 변화무쌍한 음악의 맛은 깊고도 아름답다. 영화 속에서 간간이 그러한 음악을 선사한다. 뮤지컬 영화인 고로 인도영화의 특색 중 하나인 춤과 노래는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데 흥이 솓구친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한가지 더 점수를 주고싶은 것은 인과관계와 아이러니의 적절한 혼합이 센스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보아 감독이 주연과 똑같은 인간이 아닐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감독 역시 란초하고 똑같은 사람이라더군.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에 대하여 찬사만 늘어 놓는다면 코렐리가 아니지.

이 영화에 교육의 틀은 학생의 창의력을 옥죄는 현실에 처해 있지만 교육 자체는 값진 것이라는 감독의 생각이 깔려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찢어지게 가난한 라주도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인도의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지는 한 번 쯤 따져 볼 일이다. 종교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남의 문화의 깊은 세계를 보고자 노력하는 나지만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힌두교 사상에는 뿌리깊은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 불가촉 천민과 하층민들에게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고선 교육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기만 하다. 바로 그런 인도이건만 아름다운 면만 너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닌지 꼬집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영화 속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돌이켜 보면 비현실적인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하긴 이 영화는 비극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지 용서해 주자.

 

딴지를 좀 더 걸자면 영화 속에서 감동을 너무 자주 남발한다. 놀라운 반전들이 있지만 이도 역시 너무 많다.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활용하는 클라이막스의 효과가 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으로 나름 꼽아봤다. 하지만 감동도 많고 반전도 많으니 아무 생각 없이 보자면 마냥 즐거운 영화가 이 영화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인해 나처럼 까탈스러운 인간들에게는 반복되는 이러한 극적인 요소들에 식상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헐리우드 영화와 충무로 영화만 보느니 혼식을 장려하기 위해 한 번 쯤 권해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