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1 일본 the 3rd

간사이 또왔냐 4-4(나라)

코렐리 2011. 8. 12. 17:24

2011.7.18(월) 계속

나라국립박물관은 도다이지에서 나오면 바로 우측에 있다. 시간이 나면 들러보겠다는 쉰소리는 했지만 사실 그럴 시간은 없었다. 웬만한 박물관도 제대로 보려면 최소 4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그 시간동안 서서 다니다 보면 다음 여정에는 시간도, 체력도 남아나지 않는다(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서 문 열 때 들어가 거의 닫을 시간에 나온 걸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따라서 박물관은 하루를 온전히 쏟아야 하지만 이 곳에선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음 코스인 고후쿠지로 바로 넘어가기로 했다.

 

고후쿠지로 가는 길 역시 나라의 다른 길 못지 않게 고전적 운치가 있어 걷기에 좋다. 비가 오는 관계로 우산을 쓴 채로 카메라를 조작하기는 불편하지만 무더위를 식혀주니 이도 나쁘지도 않았다.

 

 

고후쿠지를 향해 쭐레쭐레... 뭘보나 이사람아 가던 길이나 가지.

 

도다이지에서 멀지 않은 이 곳이 바로 고후쿠지(興福寺)다. 거대규모의 5층 목탑이 인상적이다. 남도 칠대사(南都七大寺) 가운데 하나인 고후쿠지(興福寺)는 699년 당시 호족세력이었던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중병에 걸렸을때 그의 부인이었던 오오키미가 남편의 쾌유를 기원하며 교토 근교 우지(宇治)라는 곳에 세운 야마시나데라(山階寺)가 그 기원이라 한다. 부인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복해 중병을 앓던 후지와라가 병석에서 벌떡 일어났는지, 아님 부인의 정성도 아랑곳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지는 가이드 책자에 나오지 않아 모른다. 715년 현재의 지점에 정비되어 후지와라씨의 사원으로 번성했다.  1046년 12월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 바 있고, 그 후 재건되었다가 1180년 다이라씨(平氏)의 남도 토벌에 또 한 번 소실된다. 카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번영을 누리다가 거듭되는 화재와 지원마저 끊긴데다 메이지 유신때에는 폐불정책으로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의 오중탑은 730년 고메이(孝明)왕후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수차례의 소실 후 6번째 재건된 것이라 하니 운명도 기구하지만 끊임없는 재건도 실로 집요하다.

 

 

이 오중탑은 높이 50미터로 교토 도지(東寺: 못가봐서 모름 ㅡ,.ㅡ;)의 오중탑 다음으로, 일본에서도 두 번째로 높은 탑이라 한다.

 

건물 한 개 달랑 있고, 탑 하나 달랑 있다. 내 보기엔 바깥에서 보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건불 내부 입장은 입장료(500엔)를 내야 했다.

 

안이 엄청 궁금했다면 봤을테지만 우리는 밖에서 보는걸로 만족했다.

 

 이 곳을 나와 일단 사루사와이케 방향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운치있어 보이는 이 곳이 찻집인지 뭔지 모르지만 일단 함 들어가 보기로 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다시 나온 사루사와이케다.

 

사루사와이케의 바로 옆에는 흥복사의 일부 시설이 있어 함 들러 봤다.

 

큰 볼거리는 없어도 함 들러볼 만은 하다. 돌멩이에다 빨간 치마는 왜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원처럼 조성해 놓은 아늑한 분위기가 푸근한 느낌이다.

 

이 때도 비는 어지간히도 뿌려댔다.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호객하는 인력거꾼.

 

우리는 나라역 주변의 골목을 한군데도 빠뜨리지 않고(아마도) 누비고 다녔다.

 

그만큼 나라의 골목골목은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뜀도령도 나라의 골목을 좋아했던지 열심히 돌아다니며 열시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케이드 시장을 발견하고 목을 축이자며 마트를 들러봤다. 시장 안 소규모 마트가 이렇게 운치가 있으니 이 것 역시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워미? 그땐 몰랐는데 이 쪼꼬만 마트가 창업 110년? 작은 허우대에도 불구하고 어깨 으슥거릴만하다.

 

우리가 찾던 맥주 진열대. 도대체 뭘 먹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더라는... 이 곳에서 미니어처 기린맥주 2캔을 뜀도령한테서 선물로 받았는데 공항 검색대에서 뺐겼다. 100밀리가 안돼는줄 알았는데 130밀리였던가... ㅡ,.ㅡ;

 

시장에서 게다(1,000엔)도 한 켤레 샀다. 유타카만 사면 왠지 짝이 안맞는 것 같아서였다. 도쿄에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것이 2만엔인가 얼마였던걸 생각하면 거저인 셈이다.

 

아케이드 시장 안에서 번쩍 눈에 띠는 이자카야. 그러잖아도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 나오면 한 잔 하자고 벼르던 차였다.

 

안쪽으로 안내하려는 걸 마다하고 바에 앉았다. 그 안에서 요리하는 열기 때문에 약간 덥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한 잔 하기에는 이 곳이 좋았다.

 

어쨌든 메뉴판을 보니 값들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았다. 아래 사진의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사케 값도 천차만별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추천을 부탁했다. 싹싹한 그녀가 좋아하는 술이라며 추천한 사케는 아래 사진의 槪羅(개나: 일본어 발음으로는 어찌되는지 모르겠지만)라는 술인데 워낙 휘갈겨 써 놓은 상표라 내가 찾아낸 한자가 맞는지 모르겠다. 물론 통째로 주는건 아니고 잔술이다. 묘한 표정의 뜀도령과 환한 웃음의 여직원.

 

막잔에 따라 준 이 사케는 데우면 900엔, 차게 마시면 500엔이다. 그녀는 이 사케는 찬게 더 맛있다며 500엔짜리를 권했다. 왠지 우리의 주머니와 체면을 배려한 것 같은 세심함이 느껴진다.

 

자리를 잡고 주문했던 쇠고기 안주는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래 사진은 하루에 한 장씩 뜯어 내는 한국에선 오래전에 사라진 형태의 달력으로, 표지와 맨뒷면 마분지까지 포함하면 총 367장이 걸려있다. 하루하루 뜯어낸 종잇장은 용처가 거의 만능에 가까웠다.

번데기 장수의 손에 들어가면 번데기와 국물을 담아 주는데 썼다. 원뿔 모양으로 돌려말아 번데기를 넣고 국물을 몇 스푼 넣으면 종이 틈새를 밀봉하는 효과를 내 국물을 담는데 손색이 없었다. 번데기 장수는 코흘리개 고객들을 위해 여기에 국물을 몇 숫가락 더 부어 주는 인심도 잊지 않았다.

가게방에 가면 갯수 단위로 팔던 과자나 눈깔사탕을 담아 주는데도 썼다. 

개구쟁이들 손아귀에 들어가면 딱지 접는데 썼다. 워낙 종이에 힘이 없어 딱지를 접기 위해서는 여러장을 겹쳐야 했기에 며칠씩 기다리는 끈질김도 필요했다. 자원이 부족하던 시절이니 그럴만도 했지만 이 종이로 딱지를 접으면 몇 번 치는 동안 힘없이 접힘이 풀려버리는 통에 신문지로 접은 딱지와 함께 가장 대접 받지 못하는 애물단지에 속했다.

뒤집으면 인쇄내용이 훤히 비춰지는 이 얇은 종이도 메모지로서의 역할을 당시에는 훌륭히 수행해 냈다. 

배아픈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화장지로 돌변했다. 젊은 세대라면 그걸 어떻게 화장지로 쓰느냐고 할테지만 물자 부족하던 시절에는 몇 번이고 구겼다 펴면 이 달력 종이는 물론 신문지도 훌륭했다.

일본엔 아직도 이러한 달력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추억때문에 즐거웠고, 동시에 뜯어낸 종이는 어디에 쓰일까 궁금해졌다. 분명한 건 이 집 화장실엔 두루말이 화장지가 놓여져 있으니 손님한테 그걸 쓰라고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기본 서비스 안주로 나온 것들이 맛도 좋지만 시각적으로도 무척 뛰어나다. 아래 사진의 안주는 연두부를 표면만 바삭하게 튀겨 소스를 얹은 듯하다. 바삭거리는 표면에 달작지근한 소스를 뿌려 놓으니 안팎에 부드러움을 강조했지만 안과 밖의 부드러움과 그 맛은 완전히 달라 묘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안주이지만 1인당 1개씩 밖에 제공되지 않아 감질난다. 감질나는게 일본문화의 특징인 것도 같고...

 

네모진 접시에는 무언지 알 수없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달작지근한 안주가 하나 더 나오고 새우 머리가 딸려 나왔다. 새우 머리는 일반적으로 잘 먹지 않는 부분이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부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비스로 나온 기본 안주가 더 맛있고 풍부한 느낌이 드는건 돈내고 주문한 안주에서 확인된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쇠고기 안주다. 다진 쇠고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촉감의 부드럽기가 비할 바 없을 정도다. 흥건하게 뿌려 놓은 소스는 일본 특유의 달작지근 짭짤한 맛이 고기의 향과 어우러져 풍부함을 더했다. 여기에 구운 가지와 양상추를 곁들여 내놓았는데 맛은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만만치 않게 비싼 안주지만 양이 무척 작다. 일본 직장인들이 퇴근 후 술 한 잔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여기서 실감하게 된다.

 

화장실에 다녀온 뜀도령이 한 번 가보란다. 갈 일 없다고 했더니 가서 손이라도 씻고 오란다. 뭔가 이유가 있으려니 해서 가봤다. 감동적이다. 좌변기 대신 의자를 놓고, 세면대 대신 책상을 하나 놓으면 이건 화장실이 아니라 영락없이 선비의 공부방이 따로 없었다. 화장실에서 마저 감동을 주는 이들의 정성어린 서비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래 사진은 화장실 방문기념 사진 한 컷.

 

여직원이 추천해 준 사케도 맛있었지만 이 번엔 다른걸로 함 바꿔 보기로 했다. 이 번엔 우리가 골라 봤다. 기억엔 처음 먹었던 것 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맛은 그만 못했다. 잔 술을 다시 따라 주는데 뜀도령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빠이, 이빠이!"

웃음 가득한 얼굴의 여직원이 따라 준 사케 술잔은 흘리지 않기 위해 첫 모금은 손대지 않은채 입을 대야 할 정도로 넘치기 직전이었다.

 

 간사이 지방에 왔으니 눈 앞의 큰 솥 안에 끓고 있던 오뎅을 시켜 봤다. 국물은 넙적한 그릇 안 바닥에 깔아서 주고 약간 간단하고 질긴 오뎅 하나와 무우를 준다. 이 정도면 한국에선 서비스 수준이다. 하지만 이 곳에선 이 것도 어지간히 비쌌다. 값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까지 먹어본 중 가장 비싼 무우 요리였다. ㅡ,.ㅡ; 

 

잔이 비교적 큰 탓에 사케 두잔에도 우리는 충분히 거나해졌다. 아니 세 잔이었던가? 남은 골목을 마저 돌아본 뒤 돌아간다며 다시 쏘다니기 시작했다.

 

뜀도령의 카메라 앞에 기냥 달려가 이상한 포즈 함 취해 봤다. 마지 뜀군이 못해 찍은 사진이... 이게 뭐냐. 젊지 않은 나이에...

 

철없긴 뜀도령도 마찬가지.

 

이 곳은 자그마한 신사인듯하다.

 

이 낭만적인 낙서는 일부러 장식적 요소로 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사실 여부는 모름.

 

교토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 역으로 갔다.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한글 안내는 여기저기에 흔하게 눈에 띤다. 2005년 처음 교토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철없는 뒴도령의 귀여운(웩!) 포즈.

 

돌아가던 길에 전철 안에서 내다 보니 조명을 받은 고전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 건물은 뭐였기에 불을 밝혀 놓았고 가이드책자에는 나오지도 않았을까 궁금했다. 이 걸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 봤다. 묘하다.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로 들어 온 문제의 건물과 유리창에 비친 차량 실내가 동시에 찍혔는데, 희한한 것은 유리에 비친 카메라 렌즈와 조명 받은 건물이 겹쳐져 재미있는 사진이 나왔다. 목적했던 대로 카메라에 건물을 담긴 담았다. 이거 아무나 찍을 수 없는 예술 사진이 나왔다.

 

교토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탑. 조명을 받으니 환상적인 분위기다.

 

그냥 자기는 섭섭하지. 나라에서 한 잔 했으니 자기 전에 먹을 밤참거리를 샀다.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버스를 기다리며 짐(대부분 먹거리)을 내려 놓고 흐믓해 하는 나.

 

차려놓고 나니 푸짐하다. 이거 다 먹고 잤다.

 

무슨 내기를 했더라...? 뜀도령과 만원 내기를 했다. 결론은 나의 패배. 그게 뭐였더라...? 생각이 안나네...

 

나라에서 게다를 샀으니 그 전에 사 두었던 유타카와 맞춰 입고 신어봤다. 아무리 봐도 이 유타카는 집에서 쓰는 용이지 외출용은 아닌 것 같다.

 

장근석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기는 있는지 쇼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쇼 프로그램 내용이 별거 없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듯하다. 일본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 것 말고는 한류라는 것 자체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아직도 대중매체에 걸핏하면 나오는 걸 보면 우리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것을 믿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만 재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