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또왔냐 4-3(나라)
2011.7.18(월) 계속
빙 돌아 다시 그자리에 서서 더 멀어진 도다이지(東大寺)를 바라고 다시 걷자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 곳 나라에서는 버스가 뜸하다고 했는데 얼마나 뜸한지부터 알아보기로 하고 코 앞 버스 정거장으로 가봤다. 운이 좋았는지 곧 버스가 도착했다. 마침 도다이지 앞으로 가는 버스여서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탔다. 교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뒤로 타서 앞으로 내리는 줄 알고 뒷문으로 가 버텨봤지만 문이 열리질 않았다. 눈치 빠른 뜀도령이 앞문으로 타는 것 같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문이 열려 있고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는 이미 버스를 타고 있었다. 여기 한국인가? 바로 옆동넨데 뭐가 이리 통일성도 없어 사람 헷갈리게 만드냐고. ㅡ,.ㅡ; 막상 버스를 타고 가니 우리가 걸었던 거리가 별 거리가 아니었음은 가스가타이샤 입구를 다시 지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 땐 그게 왜 그리 멀게만 느껴졌을까. 도다이지도 가스가타이샤를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도착했다. 이름은 거창하게 '나라'지만 규모는 거짓말 좀 보태 '동네' 수준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도다이지 방향으로 접어들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길거리 사슴이 동네 개보다 많았다.
뿔난놈, 뿔 안난놈, 녹각 달고 있는 놈, 녹용 달고 있는 놈이 여기저기서 노닐고 쉬고 겉으로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인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인간 못지 않게 닭살 커플의 애정표현을 과시하는 애들도 있는데 이럴 땐 정말 인간을 닮았다.
"우리 어디 음침한 곳에 가서 풀이나 한 포기 뜯을까..?"
"근데 왜 음침한데로 가? 정말 풀만 뜯는거지? 이상한 짓 안할거지?"
평화로워 보이던 얘네들의 고요함을 깨고 쟁탈전의 장으로 돌변하는 순간은 누군가 먹을 쥐고 희롱할 때였다. 한 젊은 여자가 먹을 것을 들고 한 두 놈한테 주기 시작한 것이 개떼같이 달려드는 상황이 된 것 같다. 우르르 몰려와 먹이쟁탈전을 하는 애들을 이 여자분은 어지간히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 딸로 보이는 아이는 동물이 무서워 거의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도다이지의 첫 문인 남대문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 문은 752년에 만들어졌다가 12세기 후반 태풍으로 크게 파손된 것을 승려 초겐(重源)이 중국 송나라의 기술을 도입해 건설했다고 한다(으째 조금 덜 일본스럽다고 했지...) 기둥의 높이가 무려 21미터라 하는데 이러한 목재를 구하는 것만도 엄청난 작업이었겠다.
문 양쪽에는 목재로 만들여진 것으로 보이는 금강역사상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있다.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이 아형은 높이가 843센티미터이고
입을 굳게 다문 아형은 836센티미터로 거대하다. 이는 1203년 7월 24일부터 그해 10월 3일까지 불과 69일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새들이 멋대로 들어와 똥을 싸고 나가는지 망을 쳐 놓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연못과 섬을 형성해 만든 멋진 정원 있고
또 하나의 문이 나온다.
그 안으로 너머다 보이는 도다이지의 대불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문 안으로 들여다 보며 찍은 대불전.
그 좌우에 있는 두 개의 인왕상.
매표소와 출입구는 좌측으로 돌아야 있다. 매표소를 향해 열심히 걷는 뜀도령.
표를 사 안으로 들어가면(500엔) 정면이 아닌 측면 각도에서 대불전을 볼 수 있는데 건물이 더욱 멋지다. 도다이지(東大寺)는 나라(奈良)가 일본의 수도였을 무렵 이 절이 헤이조코의(平城京: 나라의 옛 이름)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도다이지의 전신은 금종사였고 후에 금광명사라 이름하였는데 쇼무왕(聖武王)의 뜻에 따라 대불(大佛)을 본존으로 하는 대건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문(中門), 금당(金堂), 강당(講堂) 등을 일적선으로 배열했고 인근 사찰인 고후쿠지와 더불어 대단한 권세를 떨쳤다고 한다. 1180년 12월 다이라노 시게하라(平重衛)의 남도토벌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나 1567년 전란으로 또다시 대불전이 소실되고 현재의 것은 1709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도다이지는 호류지와 더불어 일본으로 이주했던 우리 선조들이 지은 것이라는 사실이 역사학자들의 의해 밝혀지고 있다고도 한다.
대불전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눈 앞에 16미터에 달하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거대 불상은 747년에 시작해 2년만에 주조되었으며 그와 병행해 건설된 대불전에는 목재, 금속 관련 기술자와 노동자가 자그마치 26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대사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숫자는 당시 일본 인구의 반이나 되는 수라고 하지만 이건 뻥인 것 같다.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의 기록에 대불 주조에 사용된 동이 499톤, 주석 8.5톤, 도금에 사용된 금과 수은이 각각 440kg과 2.5톤으로 일본 각지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개안공양회에는 승려만도 1만명이 참여했다고 전해지는데, 개안식 그 후에도 공사는 몇 년동안 더 진척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전란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모습은 1709년 재건의 결과인데 그 크기면에서는 2/3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대불전에 들어서는 순간 이 건물을 거의 꽉 채우는 불상의 크기에 압도된다.
왼쪽으로 돌아들면 금도금된 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다. 대불상에 비하면 무척 작지만 이도 어마어마한 크기다.
두루말이와 붓을 쥐고 계신 어르신은 뉘신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대불 뒷면의 거대 기둥 하단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하는데 이 때는 몰랐던 관계로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구멍은 불상의 콧구멍과 같은 크기라 이 곳을 통과하면 행복해진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통과를 시도한다고 한다. 사진으로 본 그 구멍의 크기로 보아 이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인생에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 몇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도 통과할 수 없는 크기인지 모르겠지만 논리대로 한다면 손대면 톡하고 부러질 말라깽이들은 무지하게 행복하고 뚱뗑이들은 100% 불행하단 소린가? 만일 이 구멍을 당시에 알고 발견했다면 난 아마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을게다.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말이다.
내부에는 도다이지의 전경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있다.
이 곳의 규모는 건물, 불상 등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크기이지만 둘러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이 곳을 나오고 나니 역시 약간은 지친다. 이 곳에서 니가쓰도(二月堂)와 산가쓰도(三月堂)까지 봐야만 도다이지를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출구를 나와 왼쪽 방향으로 10분만 걸어 가면 니가쓰도와 산가쓰도가 나오지만 우리는 이미 몸이 살짝 지친데다 그 길이 살짝 가파른 오르막길이어서 어쩔까 망설여졌다. 뜀도령이 사진을 찍어 주던 한국 처자는 미련없이 가버렸지만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갈까 말까에, 뜀도령은 가면 가고 말면 말지 식이어서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했다. 동전을 꺼내 쉭 던져봤다. 앞면이 나오면 올라가는거고 뒷면이 나오면 그냥 가기였다. 던지면서도 뒷면이 나오길 바랐다. 동전을 막상 던졌을 때 나는 앞면이라고 생각했던 면을 뜀도령은 뒷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ㅡ,.ㅡ; 내 생각대로라면 올라가야 했고 뜀도령 생각대로라면 기냥 다음 행선지로 가야했다. 경사진 길을 올라가기 귀찮아했던 나는 내심 잘못 던졌다고 생각했다가 의견이 엇갈리자 내심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던질 기회가 온 셈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새겨진 우리 동전으로 했다면 아마도 앞뒤 논란이 없었을테지만 일본 동전에는 익숙지않았던지 이게 앞인것도 같고 뒷면이 앞면인 것도 같고 도대체 헷갈렸다. 우리는 앞뒷면을 규정한 뒤 다시 던졌다. 다시 던져 배꼽을 내보인 동전의 면은 역시 앞면이었다. 이러면 죽었다 깨나도 올라가야 했다. 아래의 사진은 오르막길 초입에 있는 금동탑. 어디서 사진으로라도 많이 본 탑인듯 하다. 데자 뷔(Deja Vu) 현상인가...?
경사가 조금 가파른 길인데다 심하게 꼬부라진 길이기까지 했지만 걸어야 하는 거리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종각.
종이 엄청 두텁고 무겁기도 엄청나 보인다. 가마쿠라 시대에 주조된 동종(銅鐘)이라 한다. 소리는 요란하지 않되 울림이 깊고 풍부한 한국의 종과 달리 일본의 종은 깽깽거린다고 들었다. 깽깽거리게는 생겼다. 에밀레종을 함 보여줘 봐?
종각 뒤로 이어지는 길에는 기념품점이 몇 집 있고 이를 지나면 석등을 늘여세운 완만한 경사의 돌계단이 나온다
어? 이게 뭐야? 석등과 비석이 줄지어 늘여 세워져 있고 녹지를 배경으로 높이가 제각각인 지대에 기와지붕을 가진 누각들이 변화무쌍하게 자리잡았다. 어주 분위기 죽이는데... 이거 안와보고 나중에 남의 사진을 봤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대불전은 그 어마어마함이 관전의 포인트라 한다면 이 곳은 고즈넉함, 우아함, 고풍스러움이 관전 포인트였다.
대불전 뒤에 천불전과 같은 작은 건물들을 두고 있는 한국의 사찰들처럼 동대사에 그런 개념으로 부속된 건물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이 곳이 같은 높이의 지대에 변화없이 건물을 나열했다면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건설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늘어선 비석과 니가쓰도 건물 안쪽으로는 적지 않은 수의 사슴들이 모여 있어 자연과 하나됨이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좀 똑똑한 녀석들은 나무 아래로 들어가 비를 그을리며 앉아 있고 어떤 놈들은 비가 오는 잔디 위에 배를 깔고 엎디어 그 비를 다 맞고 있으니 멍청함을 일깨워 줄 방법은 없고 예쁘지만 안쓰럽기만 하다.
니가쓰도로 올라가면
탁트인 나라 시내가 기분 좋게 펼쳐진다.
멀리 펼쳐진 시내를 내려다 보는 것도 기분 좋지만 바로 아래 늘어선 크고 작은 기와지붕을 내리는 빗속에 담아 내려다 보는 재미 역시 무척 쏠쏠하다.
이 곳 역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모습이 보인다.
비는 쉬지않고 내려 멀리 보이는 시내는 뿌옇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운치는 그만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땐 아름다웠지만 3D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은 사진은 그닥...
니가쓰도의 한켠에는 휴게실이 있는데 어렸을때 본 공회당이나 교실을 섞어 놓은듯한 그런 분위기다.
한 쪽 벽면에는 여러점의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붓끝이 노련한게 어린애 장난은 아니지만 왠지 천진한 분위기를 내는 그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이 한 곳에 모이니 이 역시 볼만하다. 한 사람이 그린 작품인 것 같은데 왠지 탐이 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도 공짜 차가 제공되는데 공짜라고 우습게 볼 차 맛은 아니었다. 이 곳에 앉아 걸려 있던 그림과 차 맛을 음미하며 지친 다리를 쉬기엔 더 없이 좋다. 뜀도령의 셀카에 나도 올라타 봤다.
차를 마시고 나면 셀프로 찻잔을 닦아 사용하지 않은 잔 거치대에 올려 놓는다. 그러면 닦느라 나의 손때 뭍은 찻잔을 다음 사람이 쓰게 된다. 착하게 열심히 설거지하는 나.
지붕을 얹은 운치있는 계단이 걷기에 기분이 좋다. 운치가 있어서인지 세 사람의 남녀가 계단끝에 모여앉아 담소중이다.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와 다시 올려다 보는 니가쓰도의 멋은 오르기 전 올려다 본 것돠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 것은 주변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그 위에 건물을 얹고 계단을 여러 형태로 놓은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비맞는 사슴과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사슴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이 곳을 나와 바로 옆 건물로 가면 산가쓰도다. 이 곳은 니가쓰도와 달리 평지에 잇어 왠지 모르게 비교적 밋밋한 느낌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산가쓰도를 기웃거리는 아기사슴의 모습이 무척 귀엽다.
산가쓰도 입구에서 담소중인 여스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실례를 무릎쓰고 도촬했다. 깨끗한 피부의 안경쓴 흰 얼굴과 검은 승복, 그리고 받쳐든 새빨간 우산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꼭 카메라에 담아 오고 싶었다. 원하는 위치에서 원하는 각도대로 찍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사진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그러면 사진이 낫게 나왔을까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산가쓰도(三月堂)는 헤이조코(平城京)의 동쪽에 있던 도다이지의 전신 킨쇼오지(金銅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산가쓰도는 그 킨쇼오지의 일부로 8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유서깊은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불상이 전시되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600엔이나 되는 입장료를 내고 이 작은 건물에 전시된 전시물을 볼 가치가 있는지 곰곰히 따져봤다. 결론은 다음 행선지인 고후쿠지로 고고씽. 뜀도령이 찍은 아래의 사진에 여스님이 받쳐 든 빨간 우산과 찍을까 말까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이 함께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