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1 스페인·포르투갈

하이 이베리아6-1(세비야)

코렐리 2011. 3. 8. 15:27

2011.1.22(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경을 넘으며 8시간 30분을 달린 버스는 스페인 시각으로 04:30에 세비야에 도착했다. 자다 말고 부스스 일어난 채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눈꺼풀은 뻑빡하고 무겁기 짝이 없었다. 헤롱거리며 승차장에서 벗어나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가 봤다. 화장실부터 찾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대합실 내 information center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지나니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고 누군가 물었다.

"화장실 쓰게요?" 

약간은 나이 든 관리인이 information center 부스 안으로 들어가 열쇄를 들고 나왔다. 문을 열어주고 내가 볼일 본 뒤 나오자 다시 잠궜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난 이미 볼 일 봤으니 아무 생각 없었다. 졸려 죽겠는으니 호텔 잡아 자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밖에는 이따금 승용차나 택시가 간간히 새벽의 적막을 깨며 바람을 가를 뿐 고요하기만 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약간의 조명만이 도로를 비추는 이 도시는 마치 영화속에 나오는 유령도시 같아 그다지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어느 도시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대합실 벤치에 앉아 가려고 했던 숙박지로 전화를 해봤다.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없는 번호가 어쩌고 저쩌고 했던 것 같다. 할 수 없이 가이드북을 뒤져 어느 곳으로 갈까 고민부터 새로 해야 했다. 그 때 한국인 처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이 잠겼어. 죽겠네 이거!"

오지랍 정신을 발휘해 내가 살짝 참견했다.

"이 근처에 청색 작업복 점퍼 입은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열어 주실거예요." 했더니 같은 한국인이라며 반가와 한다.

사실 나도 내심 반가웠다. 가이드북에서 숙소를 지금 골라서 찾아낸다 하더라도 잠깐 자자고 이 밤을 체크인 하자니 억울한 생각이 드는 시점이었고 그렇다고 그냥 버티자면 세비야의 새벽은 혹독하게 춥고 졸립기까지 해서 일단 숙소부터 잡는게 상책이라는 생각이었다. 까다롭기로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호텔이면 믿고 가도 좋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 이들이 그런 숙소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고 막막한 이 상황에 동지의식도 느껴진 탓이었다. 그들은 이미 숙소를 정해 놓고 있었지만 지금 가서 체크인 하자면 학생들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패스트 푸드점이나 커피숍으로 가서 추위나 녹인 뒤 날이 밝으면 그 때 함께 문제의 호텔을 찾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들도 모두 그게 좋겠다고 했고 함께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 시간에 문을 연 카페테리아나 커피숍은 눈씻고 봐도 없었다. 무심한 나이트바만이 요란하게 영업중이어서 그 앞을 지나갈땐 이따금 술취한 젋은이들이 헤롱거렸고 안에선 쿵작쿵작 흔들어대기 좋은 음악만 시끄럽게 흘러 나왔다. 결국 문제의 호텔을 당장 찾아가 날이 밝을때까지 프론트에서 쉬고 체크인 하기로 했다. 택시를 한 대 잡아 네 명이 올라탔다. 기사는 젊은 친구였는데 캐톨릭 신자인지 차 안에는 묵주, 십자가. 성모상 등이 매달리고 붙여져 있었다. 누군가 가지고 있던 주소를 그에게 보여 주었고 그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짐을 실어 주기까지 한 뒤 출발했다. 적지 않은 거리를 간 것 같다. 나는 세비야가 그렇게 큰 도시인가 의아했다. 나중에 이 도시를 떠날때 다시 터미널로 가면서야 이 인간이 뺑뺑이를 돌려 바가지를 씌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걸어서도 그리 오래 걸리는 거리가 아니었다. 먹고 살기 더럽게 어려운 놈이었던가 보다. 차 안에 성물까지 잔뜩 모셔 놓고 사기치는 꼬라지 하고는... 처자들에게 사주기로 했던 커피 대신 10.2유로를 택시비로 지불했다. 주소를 보고 찾아주기까지 한 데다 처자들의 짐까지 내려 주니 성의가 고맙다며 팁으로 2유로를 더 주었으니 진짜 웃기는 일이다. 잘먹고 잘죽어라 이 더덩넘아. 하지만 그렇게 바가지를 썼어도 큰 돈도 아니었던데다 쉽게 호텔을 찾아 추위와 졸음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니 크게 억울할 일만도 아니었다. 택시를 타기 전에 누군가 원하는 곳으로 14유로에 데려다 준다고 제안했다면 그 제의를 덥썩 받아들였을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깜깜한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이들이 찾던 Living Roof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아래의 사진은 오전에 해뜬 뒤 체크인 하고 짐을 챙겨 나오면서 찍은 거라 밝게 나왔다.

 

아직 체크인이 가능한 시간이 아니어서 직원의 동의를 얻어 프론트에서 남은 새벽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프론트는 훈훈한데다 투숙객들을 위한 소파가 워낙 안락해 편안하게 부족한 잠을 더 청했다. 아침이 되자 체크인도 아직 하지 않았건만 친절하게도 투숙객들에게 제공되는 아침식사를 허용했다. 이 곳에는 우리 외에도 한국인 처자 한 명이 더 들어왔고 체크인 할 때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배정받았다. 이 후에도 나는 이들 외에도 이 호텔에서 한국인 처자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게다가 이 곳은 여성 배낭여행자들만 바글거리고 남자 투숙객은 나를 비롯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있으면 여자친구한테 이끌려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1:00가 되어 체크인을 하자 마자 샤워부터 한 뒤 같은 방에 배정받은 처자들과 저녁때 플라멩코 공연을 같이 모여서 보러 가기로 하고 나 먼저 숙소를 나왔다.

 

세비야는 로마시대부터 번성했던 도시였다. 서고트왕국 시대에는 수도이기도 했던 세비야는 8세기 이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색채가 더욱 독보적이고도 강렬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 카스티야의 왕 페르난도 3세가 레콘키스타 시기중인 1248년에 이슬람 세력 지배하의 세비야를 탈환했다. 그후 해양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세비야가 스페인에게 있어서는 아메리카 대륙 개척의 거점이 되었다. 말이 개척이지 식민지화다. 어쨌든 신대륙을 개척하고 그 신대륙으로부터 많은 물자들이 들어오면서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비아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바로크 회화의 거장 무리요,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 아르타네스 몬타녜스, 조각가 후안 데 메사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비제의 카르멘 같은 오페라의 배경이 바로 이 곳 세비야이고 안달루시아의 집시음악인 플라멩코도 바로 이 곳이 중심인 만큼 음악적으로도 기름지고 풍부한 땅이다.  

 

숙소를 나와 가장 먼저 가 본 곳은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과달키비르 강변에 세워진 이 탑은 12각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제까지 본 건물에 차입한 도형 중 가장 각이 많은 형태이다. 13세기 전반부에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탑으로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된 망루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탑의 상층부가 황금색 도기로 뒤덮여 있어 황금의 탑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강건너에는 은의 탑이 있어 양쪽 탑에 쇠사슬을 연결하고 침입하는 적선을 무력하는데도 동원되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내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아 그냥 통과!

 

이 곳에도 관광용 교통수단인 마차가 늘어서 있다. 이집트에서 이미 타 보았으니 관심 없음.

 

건너편에 호텔이 즐비한 과달키비르 강.

 

지도를 보고 마카레나 교회당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길만 헤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던 나는 그 곳은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보기로 하고 가까운 곳부터 챙겨 보기로 했다. 세비야 대학으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래의 건물은 방향을 바꿔 식사할 곳을 찾다가 눈에 띤 건물이 화려하고 몰만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뭔 건물인지는 나도 모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한가롭게 강변에 깔린 도로를 따라 산책을 해도 좋을듯했다. 하지만 난 그리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식사하기 위해 일부러 이 곳을 찾아낸 것은 아니고 우연히 가이드 책자에서 본 적있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시간이 13:00시가 다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식당 실내는 비교적 고급스러운 편이었고 음식값도 만만치는 않은 곳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안달루시아 지방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미리 정리해 간 자료 중 골라 보았다. 쇠꼬리찜이라 할 수 있는 Cola de Toro(18유로)와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딸려 나올 줄 알았던 샐러드는 없었다. 쇠꼬리가 세 덩이 나왔다. 푹익은 쇠꼬리를 달콤하고 향긋한 소스를 이용해 폭찹처럼 요리해 내고 바닥에는 감자를 깔았다. 양은 만만치가 않아서 먹고 나니 배가 그들먹했다. 와인 한 잔이 금방 바닥을 드러내 큼직한 잔에 맥주 한잔 더 주문해 마시니 살짝 알딸딸하기까지 했다. 

 

배가 그들먹해지니 아무 생각없이 소화도 시킬겸 도시의 운치를 즐길 겸 생각 없이 걸었다.

 

운치있는 도시의 골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기는 하지만 종종 트램도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을 본다.

 

곳곳에 광장과 분수대 같은 유럽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설치물들이 거니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숙소에서 가까운 카테드랄부터 가보았다. 이 곳의 카테드랄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입구를 찾기 위해 정면 파사드부터 찾았다. 닫혔다. 짐작이 틀리지 않느다면 이 곳이 승천의문(Puerta de la Asuncion)인 것 같다. 아마도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제단을 볼수 있는 곳이다.

 

다른 파사드를 찾았다. 역시 닫혔다. 파사드는 수많은 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섬세하기가 거의 경악 수준이다.

 

 

성당 입구 상단부 파사드에 설치된 성상 중 하나다. 과거의 고위 성직자 중 한사람인 것 같다. 적잖이 나이든 성직자의 주름과 얼굴표정, 입고 있는 옷의 주름 등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이 것은 수많은 성상중 하나에 불과하다. 

 

카테드랄의 입구인줄 알고 들어가 보니 이 곳은 주일 미사를 집전하는 소규모 성당으로 한켠에 자리잡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화려한 실내와 성당의 좌우로 설치된 성상들과 장식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제단의 배경으로는 십자형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주검과 그를 둘러싼 이들을 부조로 섬세하게 표현했고 그 좌우에는 천사들을 배치했다. 배경은 황금빛이 찬란하다.

 

이 소규모 성당에도 좌우로 소규모 채플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 곳을 나와 건물을 배회하며 입구를 찾았다. 이 곳인가 했더니 이 곳은 입구가 아닌 출구였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입구를 찾는 것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 것이 그 유명한 히랄다 탑이다. 히랄다 탑은 카테드랄 바로 옆에 부속된 탑인데 그 양식은 상층부 종탑윗부분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모로코 양식의 미나레였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의 옥신각신을 암시하는 건축물이다. 가이드북을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카테드랄에 부설된 높이 98미터의 종루로 원래 이 카테드랄 이전에 있던 모스크의 미나레였다. 높이 70미터까지가 원형 그대로의 이슬람 미나레 양식이고 상층부의 종루는 16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얹혀진 것이다. 탑 정상에 세워 놓은 것은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는 청동여신상이다.  히랄다는 풍향을 가리키는 닭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단다.

 

다시 카테드랄의 주위를 뱅뱅 돌며 찾아낸 입구는

 

처음 도착한 정면 파사드로부터 왼쪽으로 돌면서 거의 한바퀴를 돌고 나서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반대로 돌면 쉬이 찾았을게다. 그러나 어차피 이 건물은 뱅뱅돌며 전체적인 모습을 봐야하는 중요한 건축물인만큼 헛일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드디어 매표소가 있는 입구에 도달했다. 역시 틀리지 않았다면 이 곳이 산 크리스토발(Puerta de San Cristobal)의 문인 것 같다. 아님 말구. 입장료는 히랄다 탑 입장권을 포함해 8유로. 어마어마한 곳임을 감안하면 그리 비싼 입장료는 아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카테드랄의 신랑, 정면에 보이는 메인 채플의 제단과 막으로 둘러쳐 놓은 성가대석이 눈에 들어온다. 난방대책이 없는 카테드랄 안의 공기는 차갑고 냉기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냉기에도 불구하고 조명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메인채플과 신랑은 보는 사람의 넋을 홀랑 빼놓기에 충분했다.

 

좌우에는 소규모 채플들이 자리잡고 있다.

 

줄을 타고 올라가는듯한 기둥은 뾰족한 모양으로 아치를 형성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섬세하고도 아름답다. 아래 사진의 테마는 예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숨어든 제자들과 성 마리아 그리고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난 성령인 것 같다.

 

어마어마한 파이프 오르간은 성가대석과 제단을 사이에 두고 설치되어 있고 목각으로 조각한 나팔 부는 천사들의 모습은 혀가 내둘릴만큼 섬세하다. 

 

메인 채플의 제단 앞으로 가면 황금색 찬란한 배경을 볼 수 있다.

 

이 천장은 교차랑의 중앙이었던 것 같다.

 

이 카테드랄은 전체적으로 단면도로 봤을때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이는 나중에 종탑으로 올라가 보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아래 사진은 십자가의 왼쪽 날개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곳은 성가대석이었던 것 같다.

 

메인 카테드랄의 제단에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신약성서에 근거한 조각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 한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그 주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아래서 미사를 집전하는 주교의 모습은 한없이 작고 작아 보일 것 같다.

 

봐도봐도 화려하고 넋을 놓기에 충분하지만 넋을 놓는 이유 중 하나는 넘 화려해서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온통 금칠이었다.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서 보자면 거의 경악수준이다. 그건 그렇고 이 곳에 켜켜이 쌓이는 먼지는 무슨 재주로 감당할꼬... 그러잖아도 쌓인 먼지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이 카테드랄은 원래 있던 이슬람 모스크를 헐고 1402년부터 약 100년간 건설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폭 116미터 높이 76미터로 지어진 이 카테드랄은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계 세 번째의 규모를 자랑한다.

 

이 곳의 성화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소예배실과 성구실에는 무리요, 고야, 수르바란, 발데스 레알 등 위대한 화가들의 성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어느 누구의 작품인지 기초지식이 적어 잘 모르겠지만 감상하는 재미 무척 짭짤하다.

 

종탑으로 올라가다 보면 당시 건설에 사용되었던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붕 쪽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면 삐죽삐죽한 고딕 양식의 탑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