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10 중국어학연수

중국어학연수15-1(시안)

코렐리 2010. 10. 27. 17:18

2010.7.9(금)

전날 저녁 11시쯤 잠자리에 들면서 잠은 부족하지 않게 자기로 했다. 새벽녁 잠결에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졸린 나의 눈을 갸름하게 띄워 놓았다. 비몽사몽에 보니 내침대 바로 위 비어 있던 자리로 새로운 투숙객이 들어왔다. 내 침대 앞에서 손에 든 짐을 바로 위층으로 올려 놓고 어깨에 진 배낭을 내리려 부시럭거리는 젊은 처자의 눈이 부시시한 졸음 함박의 내 눈과 마추쳤다.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어쩌다 내 잠을 깨운 것이 미안했던지 어둠 속에 비친 그녀의 표정이 좀 그렇다. 대충 눈인사하고 다시 뒤집어져 몇 시인지는 관심도 안가진채 자던 잠만 계속 잤다. 잠결이지만 왠지 움직임이 좀 더 조심스러워진게 느껴진다. 암, 그래야지. 매너 쓸만하구만. 지금도 주말이면 오전 11시까지 늘어지게 잠자기를 즐기는 나지만 여행만 떠나면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일찍 일어나 싸돌아 다닌다. 하지만 이 때는 나도 어지간히 피곤했던가보다. 이 날은 멀찌기 떨어진 병마용과 화청지를 가기로 한 날이니만큼 하나라도 제대로 보자면 이러고 뭉그러져 있을수만도 없었다. 이만큼 잤으면 부족하나마 그럭저럭 잘 잤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시계를 들여다 보니 8시 30분.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 나 먼저 샤워를 하려고 상의를 주워입고 수건 목에 두르고 칫솔 입에 물고 비누 하나 달랑 든 채 방을 나섰다. 샤워실로 들어가려고 보니 2층 세면장에 있는 2개 샤워실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2층 난간에 기대 샤워실 하나 비워지기를 기다리다 보니 새벽에 내 위층 침대로 새로 온 젊은 처자가 그 곳 난간에 역시 기대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얼굴이 한국인 같아 보였다. 무슨 확신이 들어서였는지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새벽에 들어온 학생 맞져?" 

물론 말을 걸던 내 머리는 침대 바닥에 눌리고 짓이겨져 떡이 되고 일어나 두피가 들여다 보이고 부시시하게 개기름낀 얼굴에 논꼽까지 달은데다 면도한지는 보름을 훌쩍 넘겼으니 상종하기 유쾌할리 만무했다.

"저 한국말 모르는데요." ㅡ,.ㅡ;

중국어였다.

"중국인이시군요. 학생이세요?"

"네."

잠이 덜깬채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뭔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엽게 생겼다는 것과 여행중에도 키우던 달팽이 두마리를 아크릴 집에 담아 데리고 다녔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생각 안난다.

그 처자는 나에 대한 기억으로 지꺼분하다는 인상 외에는 없었을게다. ㅋㅋ

 

씻고 나서 그 때까지 자고 있던 두 악당을 깨웠다. 부시시 일어난 그들이 씻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간 곳은 전 날 갔던 바로 그 식당이다. 값 저렴하고 맛 좋은 이 식당 말고는 당장 기억나는 곳도 달리 없었다. 주문한 메뉴는 전날과 똑같다. 넙쩍이 국수. 이거 말고 다른 메뉴도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래 사진은 국수 위에 고명을 예쁘게 얹어 놓은 모양새다. 간장에 볶은 두부, 간을 해서 볶은 부추, 소스를 뿌려 볶은 약간의 고기, 간을 해서 볶은 토마토 소스가 고명으로 얹혀졌다. 맛? 쥑인다. 나도 이거 집에서 함 멩거봐?

 

점심을 먹고 난 우리는 10시 30분경 버스 정거장으로 가 기차역으로 가는 46번 버스를 탔다. 화청지와 병마용으로 가는 버스가 그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버스 나 지하철을 타면 가끔씩 주변사람들에게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교양이라고는 흔적도 없고 비스므리한 냄새도 안나는 인간들이 있다. 우리가 탄 이 버스 안에 탄 한 아저씨는 아예 통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리까지 고래고래 질러댔다. 차 안에서 끝장을 볼 심산인 것 같았다. 쫓아가서 철썩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그들의 나라이니 할 말도 없었다. 게다가 뭐 저런 이상한 아찌가 있나 하는 반응은 우리 뿐인 듯 했다. ㅡ,.ㅡ; 

 

이런 사람이 옆에 앉거나 뒤에 앉으면 나는 대개 이를 감내하거나 참지 않는다. 우선 의식적으로 사람을 뻔히 쳐다본다. 대부분 생깐다. 어떤 이는 나를 의식하고 대충 마무리한 뒤 곧 전화를 끊지만 드물다. 두 번까지 뻔히 쳐다보며 의식을 준다. 이 대목에서도 대부분 의식하지만 모른척한다. 세번째 가서 나는 반드시 입을 연다. 

"실례합니다."

이러면 내가 왜 말을 거는지 알기 때문에 상대는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 보며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초긴장한다.

"댁의 사생활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데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말투는 지극히 공손하지만 내용은 있는대로 심사가 뒤틀린 나의 내심을 반영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러면 대부분 하던 일을 멈춘다. 입닫고 전화기도 슬며시 닫기 뭐 그런거 한다. 아직까진 그런 일로 싸워본 적은 없었지만

"당신이 먼데 남 통화하는걸 갖고 시비야?" ---> 여기까지는 안가봤으니 그런 일 생기면 그 뒤는 나도 모른다.

 

좌우당간 남의 동네에서 객 주제에 뭘 어쩌란 소린 못하니 걍 웃으며 간다. 이 아찌는 열이 받을대로 받았는지 창문까지 열고 바람에 이마까지 식혀가며 소리 지르며 가끔씩 허공에 삿대질까지 했다. 어이구 무스브라... 그래도 아마 우리 내릴 땐 끝냈던었가? ㅡ,.ㅡ;

 

어쨌든 버스에서 내려 유적지로 가는 306번 버스를 알아 보았다. 승차한 시간은 대략 11시정도.  

 

바로 옆 시안역도 무척 번잡했다.

 

가는 동안바깥구경 하기도 무척 재미가 있다. 화칭츨(華淸地: 화청지)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소요시간 대략 50분. 버스 1인당 6위엔.

 

입장료는 70위엔. 디따 비싸다. 나는 학생할인 받아 20위엔이었던가...

 

서안의 볼거리 중의 하나인 화청지는 임동현에 있는 여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화청지 일대의 해발이 500m정도로 의외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셈이다. 화청지하면  양귀비의 목욕탕쯤으로 일단 머리속에서 떠오르지만 화청궁(당나라 현종의 천보 6년(747)에 이곳에 궁전을 짓고 둘레에 성를 쌓아 화청궁(華淸宮)이라 하였고 화청지(華淸池)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온것이다)은 역대 별궁으로 사용되던 경승지로서 역대 제왕들이 온천욕을 즐기거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 찾은곳이란다. 이 곳은 겨울에 와야 좀더 온천의 정취를 느낄수 있다던데 온천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고...(뜀언)

 

한국어로 안내판까지 세웠으니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다녀가는지 짐작이 간다. 다 좋은데 매끄러운 글은 절대로 없다. 수동태와 능동태가 뒤집어지거나 혼용되고 번역은 골때린다. 

 

비가 흩뿌리는데다 안개까지 살짝 깔려 있어 운치가 있다.

 

인공호수에는 타일 장식이 물에 살짝 잠겨 있다. 무희가 이 곳에서 물을 밟으며 춤을 춘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미니어처.

 

 

고려인 사신이 조공을 바치러 온 모습이 디오라마로 꾸며져 있는데 이거 역사 왜곡 아닌가...?

 

 

 

 

 

양귀비의 석상이다. 이 석상은 인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사진을 찍곤 한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본 떠 만든 인형을 본적이 있는데 현종이 눈이 낮은건 아닐테고 당시의 미인은 머리가 크고 볼은 두툼한데다 얼굴은 컸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의 석상은 서양 미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 모양인데 언젠가 먼 훗날 당나라 관련 자료들이 소실되고 이 석상이 양귀비의 석상으로 밝혀지는 일이 생긴다면 이 석상이 양귀비의 가장 근접한 모습으로 오인되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해봤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종종 오인되고 왜곡되니까...

 

여기가 귀비탕이다.

 

양귀비가 목욕을 하던 공간. 물은 없고 관광객들이 던진 동전만 어지럽게 깔려 있다.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양귀비가 목욕을 좋아한 이유가 암내가 심해서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그녀를 사랑한 현종은 이로 미루어 축농증 환자였을 가능성이 높다던가 어쩧다던가... 야사까지 석썪이누만... ㅡ,.ㅡ;

 

 

 

태종 이세민이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온천을 했다는 성진탕(星辰湯)으로 당시에는 지붕이 없었다고 하는데 분위기는 좋았겠다. (뜀언)

 

 

이 곳은 천자의 식사를 맡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목욕탕으로 상식탕(尙食湯)의 바닥에는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것은 황제의 음식을 요리하는 요리사들이 손으로 자신의 발을 씻지 않고 구멍을 이용해서 발을 닦도록 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임금님이 목욕한 물이 성스러운 물이라고 생각해도 그건 심한것 같네.(뜀언)

그래 봐야 황제가 똥꼬 닦은 물 아니던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군.

 

 

비싼 금박을 뒤집어 쓰신 이 분은 뉘신지.

 

우왕(하나라 개국왕)전이라는구려. 이 양반을 모신 사당인가?

 

부처님 계신데? 뜀영감! 여기 촬영금지라는데 사진은 왜찍었어?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오간청(五間聽)으로 이동했다. 그냥 다섯 칸짜리 건물이라는 뜻이라는데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과의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남경으로부터 서안으로 와 이 건물에 묵고 있던 장제스는 서안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출신의 장학량(張學良)은공산당 총사령부의 부사령관직도 겸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중앙의 내전정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의 호소를 지지하였다. 장제스는 장학량에게 감금되었고 장학량은 장제스에게 국공내전 종식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중국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남경에서는 즉각 장학량을 공격하자는 강경파가 있었는데 송미령(장제스의 부인)은 이를 무마시키고 서안으로 향했고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을 머저 소탕하고 나서 통일을 이룬다는 "선초공(先剿共) 후통일(後統一)"이라는 장제스 정권의 노선이 바뀌게 되었다. 이같은 원한으로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피신할 때 장학량을 끌고가 투옥했고 지금도 장제스가 묵었던 집무실 유리창과 벽에는 총알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뜀언)

 

장개석 사령관의 침실

 

장개석 사령관의 집무실 

 

시안사변 당시 총탄자국 영원히 보존하려는지 특수유리로 보호막을 쳤다.

 

회의실 

 

경호원실

 

비서실 

 

경호실장실 

 

경호원 침실 

 

또 총구멍

 

또 경호원 침실 

 

 

여기서 나와 병마용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편부터 알아보려던 차에 택시기사가 먼저 다가와 제안했다. 병마용까지 1인당 6위엔이란다. 우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택시를 이용할 참이었는데 저렴한 합승택시가 먼저 와서 컨택해 주니 오히려 고마을 지경이었다. 이 곳 택시도 승객석과 운전석이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중국어로 뭐라고 뭐라고 쏼라거리기는 하는데 무슨소린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일부 알아들을만 했지만 그가 구사하는 사투리가 심했다(ㅡ,.ㅡ; 이거 핑계같은데...) 대충 듣기로는 진시황릉에 들렀다가 이 곳을 먼저 본 뒤 이 택시를 타고 병마용으로 가자는 내용 같았다. 나는 싫다고 했다. 내가 못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진짜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심지어는 뜀도령과 찬바람도

"형, 이사람 영어하는거예요, 중국어 하는 거예요?" 하고 묻는다. 사실 나도 모른다. ㅡ,.ㅡ;

그는 혼자였고 우리가 세사람이니 합승으로 우리와 같이 다니면 이 친구는 경비를 엄청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코스대로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차례로 함께 다니며 택시를 타자는 거였다. 물론 우리가 동의하면 택시기사는 진시황릉을 다 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병마용부터 가고 만일 병마용을 충분히 보고 나면 돌아오면서 진시황릉을 볼 참이었다. 아쉬운 것이 없는 우리에게 백날 설득한다고 얻을 것도 없구만 이 사람은 좀 짜증이 나도록 집요했고 나중엔 상종도 안했더니 이해간 안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기했다. 일행이 느는 것도 싫고 말도 안통하는 사람하고 같이 다닐만큼 인내력 있는 나도 아니었다.  그는 진시황릉에서 내려 혼자 갈길을 갔고 우리는 병마용으로 계속 길을 갔다. 운전기사가 우리가 택시에 탈 때와는 다른 말을 했다. "병마용까지는 1인당 10위엔입니다." 내가 되물었다.

"6위엔이라고 했잖아요."

"아 그건 진시황릉까지고요. 병마용까지는 10위엔이라구요."

"우리 탈 때 병마용까지 6위엔이라고 했는데?"
나는 뜀도령과 찬바람에게 확인해 봤다. 내가 잘 못들은 건 아니었지만 기사는 우겼다. 나는 기분 좋게 10위엔씩 주자고 했다. 기사는 오히려 오해받기 싫다며 18위엔만 받고 돌아갔다. 의외로 쿨하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