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09 네팔

네팔여행9(룸비니)

코렐리 2009. 8. 6. 10:23

2009.7.14(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여행사를 겸하는 숙소 사장을 통해 전날 미리 구입해 둔 룸비니행 버스표(450루피)를 들고 터미널로 갔다.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은 숙소에서 터미널로 가는 길까지 그리 비싸지 않은 금액을 제시하며 자신의 차를 이용하길 권했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가려다 혹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생겨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늦는 일이 생기느니 확실한 교통편이 낫다싶어 그리 하기로 했다. 터미널은 공항을 왔다갔다 하면서, 자전거 타고 남쪽으로 갔다 오면서 이미 몇 번 본 곳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정면을 보니 바로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드물게 보는 설산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태워다 준 기사는 바로 아래 사진의 버스가 룸비니행이라며 올라타란다. 엉? 어제 사장이 사진으로 보여준 안락한 신형버스와 달리 로컬버스였다. 우리는 이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심쩍은대로 일단 버스에 올라탔다. 페인트로 엉성하게 써 놓은 것이긴 했지만 좌석은 표기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컬버스에 표기된 좌석버스는 전혀 의미가 없어서 우리같은 외국인들이나 찾아 앉을 뿐 현지인들은 아무데나 앉았다. 나는 찬바람과 뜀도령더러 짐은 내가 볼테니 나가서 설산이나 보고 오라고 했다. 두 사람이 나가서 사진을 몇 장 찍고 금방 돌아왔다. 이상하리만치 일찍 돌아오길래 좀 더 보지 그랬냐며 나도 나가서 설산을 보려고 했더니 곧 떠난다고 한다. 7시 15분 차인데 아직 6시 45분밖에 안되었다. 설마 지금 떠나랴. 엉? 부르릉! 털털털... 부우웅...! 어? 진짜 떠나넹? 이거 정말이지 좋은 버스 예약해 놓고 후달버스 타는거 아닌지 의아했지만 지금도 사실여부는 모른다. 다만 늦게 떠난다면 몰라도 일찍 떠나는 차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으니 이 차가 아닌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버스가 출발하고 우리는 버스 안에서 전날 아침거리로 사 두었던 물과 빵을 꺼내 아침을 해결했다.

 

내자리 뒤쪽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로 구성된 세 사람의 여행팀이 앉아 있었다. 말씨로 봐선 독일계였던 것 같다. 여자는 거의 말이 없는데 두 놈의 사내들은 주둥아리에 모터라도 달았는지 한시간이 훨씬 넘도록 쉬지도 않고 두다다다 주절거리는데 입이 안아파 보이는게 신기했다. 타고 있던 낡은 버스 엔진에 버금가는 소음이었다. 얘네들 남자 맞어? 한참을 가다가 뒤에 앉아있던 그들 일행인 여자가 일어났다. 덩치를 보면 체급상 헤비급은 얼추 되어 보였다. 버스 기사에게 뭐라고 말하니 곧 세워준다. 곧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려 절벽으로 막힌 곳의 반대편으로 도로를 건넌 덩치녀는 큼직한 덩치살을 덜렁거리며 길 옆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지나니 다시 달려 나온다.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다시 올라탄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는데 현지인 아줌마가 그녀를 붙잡고 하체를 가리켜 뭔가를 알려 줬다. 배와 다리를 비롯한 하체에 새까맣게 몰려붙어 기어다니던 개미들은 60-70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볼 일을 보던 중 개미집이라도 건드린 모양이었다. 남자인 나도 경악을 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는 아직도 많은 개미들이 들러붙어 있건만 신경도 안쓴채 그때까지도 수다를 떨고 있던 남자친구를 비집고 창가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많은 개미를 보고 한 번 놀란 나는 별 신경도 안쓰는 그녀의 무표정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여자 맞나? 그 뒤로 이따금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세 마리나 때려 잡아야 했다. 대략 어이없음 ㅡ,.ㅡ;

 

이 곳의 버스와 트럭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의 대상을 그려 놓고 있었다. 마주 지나가던 차량 하나를 찍어 보았다. 버스회사의 사장이 불교 신자인가 보다.

 

차가 가는 길은 밤에 지나기 아까울 정도로 경치가 좋다. 왼쪽은 절벽으로 막혀있고 오른쪽은 절벽으로 허방이어서 여차하면 기냥 추락이지만 저 아래 흐르는 강물도 올려다 보이는 산도 무척 아름답다. 동영상을 찍어봤다.

 

아래의 것은 뜀도령이 찍은 동영상.

 

가다가 중간에 멈춰 시동을 끄더니 점심시간이라며 이 곳에 내려준 시간은 11시정도였다. 이 시간에 점심을 먹으라구? 기사아저씨가 아침을 굶었던 모양이군. 아닌게 아니라 기사는 소담스럽게 담아 푸짐하게 내놓은 달밧을 탐욕스럽게 먹고 있었다. 밥생각도 없고 이미 한 번 먹어봤지만 별로 감동이 없었던 달밧 외에는 다른 메뉴도 없어 보였다. 나는 화장실부터 가고 싶어 이 식당의 뒤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힌두 사원이 하나 보인다. 문이 잠겨있었다. 그다지 개성있어 보이는 사원도 아니어서 걍 밖에선 함 흘려 보고 지나쳤다.

 

화장실을 찾다가 없는것 같아 야외에서 해결하기 위해 수풀로 들어가 보았다. 강 건너에서는 죽은이를 메고 장사지내러 가는 모습이 보인다.

 

볼일 보고 돌아오니 아이들이 놀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장례식과 노는 아이들. 잠깐 사이에 본 두 정경이 대조적이다.

 

버스가 정차해 있던 중 지나가던 트럭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위태위태하게 올라탄채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보기엔 위태위태하지만 이들에겐 일상이다.

 

운전기사는 무척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밥을 다 먹고 나자 곧 떠날거라며 승객들에게 올라타기를 종용했다. 누군가 밥을 아직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음이 무척이나 급해질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옛 조선의 양반이었으면 제 배 부르다고 종밥 짓지 말라고 할 사람같다. 어쨋든 다시 떠났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버스에 장시간을 타고 털털거리며 가는 것도 보통 피곤한 일은 아니었다. 꼬불거리는 도로를 달리느라 버스는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좌로 밀었다 우로 밀었다를 반복했고 승객은 중심을 잡으려고 쉬지 않고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에 번갈아 힘을 주어야 했다. 그리 먼거리는 아니었지만 꼬불꼬불한 절벽을 달리는 버스가 속도를 내기는 위험천만이었다. 무척이나 긴시간이었다.

 

룸비니에 거의 도착했을 때 버스는 타이어 펑크가 났다. 역시 본전 뽑은 타이어인 것 같다. 적지 않은 시간이 또 흘렀다. 우리가 혼잡하기 짝이 없는 룸비니 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시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다면 녹아 없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는 생각부터 들만큼 룸비니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럼에도 정신없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 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한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파리가 드글거리는 스넥코너에 가서 앉았다.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였다. 뭘 주문할지 둘러보던 중 아까 버스안에 건너 좌석에 타고 있던 영국인 여행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에게 룸비니 사원구역에 갈 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같이 들어가자고 한다. 이 친구도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것 같다. 먹을 것을 좀 시켰다. 그녀도 동석했다. 아래의 사진에 튀긴 만두처럼 생긴 것은 이미 인도에서 먹어본 경험이 있다. 이 영국인 여행자는 주디라는 이름의 매력있는 아가씨였다. 영국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일년간 휴가를 내고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는 티벳을 거쳐 이곳에 왔고 룸비니를 들러 본 뒤 인도로 넘어가 그 곳에서 일주를 하고 나면 여행이 끝난다고 했다. 한국은 왜 빼먹었는지 섭섭해서 물어보려다가 이내 우문임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ㅡ,.ㅡ; 나는 밀크티를 곁들였고 뜀도령은 콜라를, 찬바람은 스플라이트를, 주디는 물을 시켰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이유는 저녁 먹기가 어정쩡하기 때문이었다. 식사 후 나눠 계산하기도 귀찮고 주디의 것까지 계산해 주었더니  

 

신세 지기 싫었던지 주디는 그 자리에서 디저트를 주문했다. 비싼 값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녀가 오히려 더 돈을 썼다. 아래의 디저트는 인도에서 역시 이미 먹어본 간식거리였다. 인도에서 먹었을 때는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달았지만 이 곳에서 맛본 것은 적당한 당도를 가져 먹기에 좋았다. 씹으면 촉촉하게 뭉그러지는 과자였지만 뭉그러지고 나면 굵은 입자를 씹는 맛과 우유의 고소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나는 주인에게 룸비니 가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며 옆에 있던 남자를 소개했다. 이 사람이 택시기사라며 싸게 데려다 줄거라고 한다. 이 경우 100퍼센트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가격을 알아보느라 얼마냐고 물었다. 700루피인가를 불렀다. 어차피 어느정도 요금을 생각하면 될지 감을 잡아보기 위한 질문이었으니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주디도 저 사람(택시기사)은 식당주인의 친구인 것 같으니 이용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단다. 그녀도 눈치 5단은 되는 것 같다.

 

적잖이 늦은 시간이어서 조금이라도 둘러보고 한국사찰이 문닫기 전에 골인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뜀도령의 제안으로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택시로 선회했다. 주디도 동의했다. 사원지역까지의 요금은 중구남방이었지만 싸게 불러야 500루피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450루피에 합의를 본 택시에 4사람이 올라 탔다. 적잖은 거리를 갔다. 기사양반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전화기를 집어들고 소리쳤다. "아들!"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기사는 통화하느라고 몰랐고 주디는 왜그러는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본다. '한국에서는 "아들!"은 "hey, my son!"이기 때문에 같은 한국에서 이같은 상황에서라면 아들하고 통화할 때만 쓸 수 있다고 했더니 싱겁다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우린 대따 웃겼는데. ㅡ,.ㅡ; 주디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숙소를 물었다. 그녀는 이미 생각해 둔 호텔이 있어 그리로 가고자 했다. 우리는 한국 사찰에 숙박시설이 있어 그리고 가려 한다고 했더니 전에도 사찰에서 묵어본 적이 있는지, 내가 불교신자인지 등을 관심있게 물었다. 물론 전부 아니다.

 

사찰 구역에 도착하자 주디는 호텔로 가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헤어졌다. 인사성 멘트였지만 한국에 놀러 오거든 연락하면 안내해 주겠다고 한 뒤 사찰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여자가 짐은 왜그리도 큰지...

 

입구로부터 안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과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뙤약볕은 우리로 하여금 지레 겁부터 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 ㄹ양 옆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길에서 우측으로 빠져 들어가 보았다. 원숭이들이 보통 많은게 아니었다. 우리가 가는대로 원숭이들은 반대편으로 피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우리가 일부러 자신들을 쫓아 가는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옆으로 새면 될걸 스스로 쫓기던 원숭이들이 위협을 느낀건지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지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했다. "얌마! 가는 길이 같은건데 왜 지레 난리야 임마!" 했더니 위협의 강도를 높인다. 디르브서(사실은 겁이 나서) 다시 화살촉같은 뙤약볕이 장악한 길로 다시 나왔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감이 안잡힝 정도로 길에선 아무것도 안보였다.

 

자그마한 호수가 나오자 두 갈래로 길이 갈라졌다. 왠지 직진하는게 노력을 덜 기울일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직진하면 석가모니의 탄생 유적지가 나오고 호수를 끼고 오른쪽 길로 빠지면 사찰지역이었다.

 

더위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수준인데다 습도도 지독하게 높고 햇볕은 뼉다구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벗겨질까 걱정될 정도로 강렬했다. 왠만하면 살짝 바르던 선크림을 아예 떡칠하듯 발랐다.

 

곰파가 하나 나왔다.

 

안에서 예불 드리는 소리가 특이했다.

 

스님 한 사람이 혼자서 저음의 북을 두드리며 올리는 예불은 은은하게 퍼져 듣는이로 하여금 평화로움을 느끼게 했다.

 

곰파를 지나면 석가모니 탄생지에 세워진 마야데비 사원이 있었다. 입장료는 50루피. 들어가자마자 나무그늘 아래서 단체사진 한 장 찍고 뙤약볕에 노출된 길을 걸어오느라 혹사시킨 몸을 잠시 쉬었다.

 

사원의 모습은 건축상 그닥 볼 것도 없는데다 칠까지 벗겨지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이 곳 룸비니는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중 하나로 기언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이 이 곳을 참배하고 돌기둥을 세웠다. '대당서역기'를 쓴 당나라의 현장법사(삼장법사)도 서기 249년 손오공, 저팔계와 사오정을 대동하고 이 곳을 찾아와 참배했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후에 인도와 네팔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으나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휴러에 의해 아쇼카 왕의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석가모니의 탄생 위치에 마커스톤이 있고

 

바로 위에는 사리가지를 든 여왕이 싣다르타를 낳는 장면이 형상화되어 있다.

 

 

 

셋이서 기념 촬영도 한 컷.

 

 

아쇼카 왕의 돌기둥

 

푸스카리니 연못

 

푸스카리니 연못 바로 옆에 위치한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에는 여러명이 소년수행자(아마도)로부터 설법을 듣고 있는지(아마도) 소년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있었다. 

 

살인적인 햇볕을 피해 나도 앉았다. 앉고 보니 바로 앞에 엄마를 다라온 아이가 있었는데 어찌나 귀엽고 예쁘게 생겼던지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인지 귀티까지 흐른다.

 

나는 이 아이를 향해 연거푸 두 번이나 셔터를 누르고 나서 또 다시 찍으려 하자

 

이 번에는 돌아 앉아 미소까지 지으며 포즈까지 취해준다. 사진을 한 번 더 찍었더니 "Thank You" 하며 다시 제 엄마 쪽으로 돌아앉아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아유 세상에 모가 요런게 다 있냐.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건 완전 녹을 지경이었다.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에게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사람들에게 뭔가 이야기하던 소년을 가리키며 그 소년이 누군지를 물었다. 이 곳 Priest 를 지내던 분의 손자라고 한다. 득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인지를 물어 보려고 했다가 말았다. 너무 고급 단어들이 동원되어야 하는 까닭에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를 몰라 궁금증 해소를 포기했다. ㅠㅠ 소년수행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디에서 왔는지, 너희 나라의 사찰은 들러 보았는지 등을 관심있게 물어더니 우리에게 참배 방법을 일러 주었다. 나도, 뜀도령도, 찬바람도 모두가 불교신자는 아니었다. 뜀도령과 찬바람은 집안이나 뭔가에 관련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소년수행자가 일러주는대로 참배를 했다. 약간의 헌금까지 내고 나자 소년수행자는 우리에게 금실과 홍실로 엮여진 끈을 손목에 묶어 주었다. 무언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인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우리 셋은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 날까지 그 끈이 마음에 들어 액세서리처럼 손목에 지니고 다녔다. 뜀도령은 불교신자인 어머니에게 석가탄생지인 룸비니에 가서 참배까지 했다고 말씀 드리고 수행자로부터 받은 이 끈도 어머니에게 보여 드릴 때까지는 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다고 개과천선할 뜀도령도 아닐텐데... 심난하다. 이거 효자야 아님 사기꾼야? ㅡ,.ㅡ;

 

소년수행자의 눈은 충혈되어 있고 촛점은 살짝 없는듯했다. 말할 때도 왠지 정신은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내가 봐서는 종교적 무아경에 있는 것 같다. 아래 사진 좌로부터 뜀도령, 소년수행자 그리고 찬바람.

 

이상한 일이다. 추위와 더위에 강하기로는 나만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덥다는 소리는 거의 안하는 편이다. 어지간한 더위에 더워 더워 소리를 연발하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간다. 그런다고 더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만 더 쌓일텐데 왜 굳이 더위에게 패배하는지 모르겠단 소리를 하곤 했는데 여기선 그게 아니다. 여름에 룸비니 안가본 사람은 더위에 대해 논하지 마셈. 우리는 더위에 있는대로 지쳐 일단 숙소로 정해둔 대성석가사를 향해 다시 걸었다. 사찰구역에 처음 들어온 우리는 첫 갈래길이 나왔을 때 우리는 훌륭한 길을 선택했었다. 유적지로부터 나온 우리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유적지에서 나오자마자 세갈래 길이 있었는데 우측길은 절대로 아니고 우리가 왔던 직진길과 왼쪽길이 있었다. 고민이 되었다. 왼쪽길로 가면 맞을 것 같기는 한데 왠지 헤맬 것 같았고 왔던길을 되짚어 가자니 도는 길일 것 같았다. 마침 불어볼 사람도 없었다. 결국 안전빵으로 왔던 길을 되짚었다. 그게 미련한 짓이었다.

 

우리는 빼에엥 돌아 꺼지지 않는 불로 알려진 평화의 불에 도착하자 차라리 왼쪽 길로 왔으면 훨씬 빨리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략 어이없음. 평화의 불 전면으로는 운하가 놓여있다.

 

오른쪽으로는 큰 종과 사리탑이 보이는데 네팔 비구니 사원이 아닐까 싶다. 그 뒤쪽으로는 미얀마 사원, 스리랑카 사원, 인도사원, 태국사원이 자리잡고 있지만 현재의 이 더위와 뙤약볕은 우리의 호기심을 무력화 시키기에 충분했다. 봐도 낼 일찌기 보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평화의 불과 운하를 중심으로 왼편은 마낭사원, 카르마카규사원, 한국사원, 중국사원, 베트남사원, 프랑스사원, 일본사원, 독일사원이 있었다. 우리는 대성석가사가 언제라도 개방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섯시가 다 되어가는 마당에 혹시 문닫는 시간으라도 있을까 겁부터 집어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하의 왼쪽으로 보이는 늪지대가 보이고

 

운하는 세월아 네월아 정비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곳에서 노동자들으 하는양을 잠시 앉아 쉬며 보다가 이내 일어나 지도에 그려진대로 왼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길을 걸었다. 더워서 그랬을까. 거리가 만만치 않다.

 

도착했을 땐 흘러내린 땀이 떡이 되었다. 6호실 도미토리를 배정받아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시설이 감격할 정도는 아니어도 깨끗한 편이었다. 이 곳이 대성석가사 사무실이었고 왼편으로는 채마밭이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채마밭을 가꾸고 있었다. 우리는 스님에게 인사를 했고 이 것 저것 속세인들의 여행정보를 챙겨 주시는 자상함이 있었다. 이 곳에서의 숙박일정을 물어 보시길래 낼 아침 당장 떠날 참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 곳까지 와서 바로 떠나면 장거리 오고 감이 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지만 우리는 이미 더위에 질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 도착과 동시에 내일 카투만두로 떠나는 교통편부터 수배해 주기를 네팔인 사무장님에게 부탁했다.

  

기다리던 저녁공양시간이었다. 다른 사찰에는 없는 사찰숙박체험 시설이 있어 이 곳엔 서양인들은 물론 많은 일본인들도 숙박을 하고 있었고 이 사찰 건너편엔 중국사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마저도 이 곳에 머물고 있었다. 파란 옷을 입은 언니도 중국인이었다.

 

 쌀밥과 야채국 그리고 열무김치와 그중에도 특히나 반가운 고추장이 있어 한국식 달밧이라고 하면 꼭 맞을 음식이었다. 모두가 맛있게 먹는다. 식당 안에는 그냥 먹는 사람, 개신교식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먹는 사람, 떠들며 먹는 사람, 조용히 먹는 사람, 쑤셔 넣는 사람, 젊잖게 먹는 사람... 가지가지다. 어딜가나 말문 트기를 좋아하는 나는 우리 옆자리에 일단의 여행자아가씨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정보를 얻었다.

 

우리는 식사후 저녁 7시가 되자 예불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스님 혼자서 예불을 올리고 서양인 한 명과 일본인 한명이 예불에 응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방석을 원하는 위치에 깔고 앉아 예불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진다. 스님은 떠나기 전에 신축중인 사찰의 꼭데기까지 올라가 경치를 조망해 보라며 안으로 들어가셨다. 놀라운 것은 이 사찰의 예불은 물론 사찰관리감독과 공사감독까지 혼자서 도맡아 하고 계시는 자그마한 스님이 채마밭까지 가꾸시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성석가사의 본당이 될 건물이 뼈대와 외벽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 고게기까지 올라가 보았다.

 

아래의 사진은 우리가 묵고있는 순례자숙사.

 

오른쪽 에 있는 사원은 지도상에 나온 대로라면 카르마카구사원과 마낭사원이다.

 

건너편으로는 중국사원이 있어 찬바람과 나는 함께 가보기로 했다. 가서 보니 중국인 스님 한 분과 아까 식당에서 본 중국인 여행자 두사람이 중국사찰 앞 계단에 앉아 담소중이었다. 들어가도 될지를 스님에게 물었다. 사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라 참배는 불가능하니 내일 아침 다섯시 이후에 오라고 한다. 자금성처럼 생긴 이사찰은 자금성을 축소한 모델이라고도 한다. 구름과 석양이 아름답게 깔렸다. 순례자 숙사로 돌아온 우리는 그새 줄줄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 샤워를 한 번 더했다. 평원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해도해도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단 한점도 없었다. 같은 방에 묵던 일본인이 바깥에 반딧불이 많아 볼만하다고 했는데 귀차니즘에 이미 경도된 우리는 그걸 보러 나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숙사 잠자리마다 설치된 개인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에 들어 보았다.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전기가 부족해 거의 아홉시가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왔고 천정에 설치된 팬은 그제서야 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좀 살맛이 났다. 자다가 더워서 환장하다 깼다. 그새 전기가 나가 있어 팬이 작동을 멈춘 탓이었다. 엎지락 뒤치락 하다 보니 다시 전기가 들어왔고 간신히 다시 잠들었다. 이제까지 겪은 잠자리 중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 들른 것은 잘한 일이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라는 의미 외에도 이 곳에서 잠깐이있고 본 것도 많지 않았지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곳이다. 이따금 비명에 가까운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뚫고 적막을 깨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