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0(토)
아침 일찍 일어나 경주를 떠나려고 숙소를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아본 경주의 주택들. 참으로 아름답다. 버스 터미널로 간 나는 안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직장 후배로부터 전날 전화를 받았다. 내가 이 곳에 와있으니 핑계김에 안동 여행도 해볼겸 오고싶다고 했다. 우리는 안동에서 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두 시간이 걸린 12시가 조금 안되어 내가 먼저 안동에 도착했고 뒤이어 후배 의준이가 도착했다.
안동은 간고등어로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대량생산을 하다 보니 가는 곳마다 안동 간고등어를 맛볼 수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림 없었다. 바다와는 거리가 엄청 떨어진 안동에서 고등어가 유명한 이유에 대하여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과거 상인들이 동해로부터 고등어를 사들여 이곳 안동까지 옮겨 오자면 상하지 않을 대책부터 세워야 했는데 고등어는 특히나 지방이 많아 쉬이 상하는 생선이었다. 현지에서 고등어를 사자마자 큰 그릇에 물과 대량의 소금을 풀어 고등어를 담가 두었다가 꺼내 말린 뒤 이동한다. 안동에 도착하면 이미 상하기 시작하ㅡㄴ데 이것을 다시 짜디짠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말려 이 것을 팔았다고한다. 고등어는 상하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맛을 낸다. 결국 이곳 안동고등어는 상하기 시작하는 생선인 것이다.
안동 관광지도에 추천하는 이 집(양반밥상)을 택시타고 가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동 간고등어 정식 2인분을 시켰다. 인도 최고의 호텔인 타즈마할 호텔에 가서 식당에 앉았더니 스넥 한접시를 내려 놓고는 당연하다는듯 술메뉴판을 놓고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지 식전에 앉동소주 약간과 안주거리부터 내왔다. 양반밥상 맞나보군.
뒤이어 나온 정식. 고등어는 구이와 조림 두가지가 모두 나왔다. 겡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는 선입감을 깨 준 곳이다.
식후에 자리를 옮겨 찾아간 곳은 안동 북쪽에 자리잡은 도산서원.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을 길러내던 유서깊은 역사와 학문의 전당이다. 입구부터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이 곳으로는 아니 안동 내의 어디를 가든 버스편이 매우 적어 도산서원, 봉정사를 들러 안동 하회마을로 들어가려던 당초 계획에서 봉정사를 포기했다. 막차인 6시 10분 차를 타고 하회마을로 들어갔다. 도착하는 순간 감격했다. 초가와 대문 그리고 용마루로 얹은 짚의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풀냄새만이 이 마을을 뒤덮 있었다.
얼마만에 맡는 푸근함과 정겨움인가.
이 곳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정서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감격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을 감상하며 어느 집에 묵을까를 물색해 보았다.
많은 초가들이 민박을 위해 상업적으로 지어진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초가는 배제했다. 한 와가에 들러 보았다. 자그마한 방 하나에 4만원이면 나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정해놓고는 그 댁 어르신께는 더 둘러보고 다시 오게되면 그 때 뵈리라고 약속하고 떠났지만 정말로 나를 감격시킨 집이 있었다. 첨엔 드라마 토지를 촬영한 집이라는 간판문구에 식상한 느낌이었지만 막상 드러가보고 사랑채 툇마루와 그 바로 옆으로 딸린 큰 마루공간 그리고 두개가 미닫이로 열리는 한지창문이 나를 감격시켰다.
이 댁에는 할머니 한 분이 집을 지키고 계셨다. 아래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랑채는 큰 마루로 통하고 다시 바깥쪽 툇마루와 통했다. 바깥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어 눈을 즐겁게 하고 이웃집의 초가지붕이 정겹다. 게다가 마루를 둘러싼 벽은 전부 여닫이 창문으로 되어 있어 전부다 열면 사방이 트였다. 내가 이상으로 꿈꾸던 집이다. 우리는 이 방이 원래 8만원짜리인데 손님도 없는데다 두사람만 왔으니 5만원에 자라고 하시니 감격이었다. 방 안에는 할머니께서 우리가 부탁드린대로 안동찜닭을 주문하시는 모습. 우리는 씻고 안동짐닭을 하는 23호 민박집으로 갔다.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 본 모습
방에서 내다 보이는 큰 마루와 화단
할머님이 기거하시는 안채
밖에서 본 사랑채 마루
대문을 막 들어섰을때 왼쪽방향의 앞뜰이다. 사랑채는 아래 사진의 우측 전방에 있었다.
우리는 23호 민박집으로 갔다.
이 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묵을 집 할머님과 동서지간이었다. 할머님은 18세에 시집 오셔서 20세에 손없이 혼자 되셨다는 가슴아픈 사연도 듣게 되었다.의준이와 나는 이 곳에 앉아 찜닭이 나오길 기다렸다.
배도 고프고 적잖이 늦은시간이라 푸짐하게 나온 찜닭은 족히 감격스러웠다. 우리는 이 곳에서 한참 담소를 나누며 맥주 안주삼아 천천히 찜닭을 즐겼다. 식당에서 먹는 맛과는 댈바가 아니었다. 신선한 공기와 오랜 향기를 지닌 집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사실 탁배기나 소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이 댁에 탁배기는 없고 소주는 냉장이 되지 않은 것밖에 없어 할 수 없이 맥주를 마셨다. 격이 좀 안맞아도 할 수 없다) 천천히 즐기다 보니 어느새 거의 다먹고 밥 한공기까지 다먹었다. 찜닭 2만원에 공기밥과 맥주값,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서 마실 맥주까지 4만 5천원에 넘쳐나는 행복을 샀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고택 마루의 창문을 있는대로 열어 사방을 틔워놓고 남은 찜닭을 싸와 맥주를 계속 마셨다. 해외 배낭여행 나가서 느끼는 행복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금년이 가기 전에 다시 오리라 맘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2009. 7. 21(일)
아침일찍 일어나 마을 전부 휘젓고 다니며 보고는 다시 23호집에서 안동 간고등어 백반을 먹었다. 1인당 8천원이었던 것 같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유성룡의 고택을 들러 보았다.
마루 앞쪽의 손잡이와 안쪽의 현판이 인상적이다.
벽돌로 보수한 굴뚝은 왠지 좀... 거스그...
유성용의 고택을 나와 바로 건너편이 있는 이 곳은 어디라고 했더라...? 수리중이라 개방을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웠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대문 아래 뚫린 개구멍을 통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서 간신히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새로 보수한 흔적이 역력해 매우 깨끗하다.
이어서 가 본 곳은 북촌댁이었다. 몇 년 전 영국여왕이 방문했다가 이 곳에 묵으며 생일상까지 받고 감격했던 바로 그 집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집은 숙박비가 무조건 1인당 10만원이라고 한다. 사람이 많으면 숙박비 부담이 줄어드는 다른 곳에 비하면 이 곳은 역으로 사람이 많을수록 부담스러운 집이다. 문을 두드리니 "누구시오?"라는 까칠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휙 날라왔다. "개방 시간이 아직 안되었나요?" 했더니 10시부터 개방이란다. 9시 50분차 타고 나가야 하는디... 게다가 주인아저씨는 투숙객들에게 집안 내력과 곳곳에 대한 소개를 하는 중이라 바쁜 터였다. 이 안동에서도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지을 당시부터 잘 지어진 곳이란 말에 꼭 들러보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아쉽다. 하긴 다시 올 핑곙거리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사실 북촌댁도 내부를 보고싶었고 오후 세시에 있는 탈춤 공연도 보고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고속버스(서울은 그래도 그나마 자주 있는 편이지만 의준이가 돌아갈 청주행 버스는 하루에 단 댓편정도 뿐인데다 이 곳 하회마을로부터 안동시내로 나가는 차편 역시 5회밖에 엇으니 맞추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을 무척 즐기는 나로선 안동같은 시골에서의 운신이 무척 고달프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구석구석을 다 본 후에야 우리는 이 마을을 빠져 나왔다. 의준이와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11시 10분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천년고도인 경주와 양반의 도시 안동을 둘러보고 새삼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금 되새기며 세계화도 좋지만 좀더 한국적인 모습을 갖추고 보존하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에서의 성공의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하회마을이여 그대가 내 가슴에 들어왔으니 나도 그대를 두고두고 다시 찾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