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코간의 음반 한 장
며칠전 회현동 지하상가의 한 오디오 가게에 들렀다가 검은 재킷의 음반 하나가 눈에 들어와 나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의 구소련 멜로디아(Melodya) 음원으로 출반한 독일 오이로디스크(Eurodisc)의 두장 짜리 음반. 결국 구입했다.
폴더의 형태로 되어 있고 회색빛 레이블의 스테레오 음반인데 거의 새 것 같은 재킷과 이너 슬리브도 그렇지만 음반을 꺼내보니 약간의 먼지가 낀 것 빼고는 완전히 민트급이라 두 손에 받아 들기에 족히 감격스럽다.
앞면 사진은 컬러로 밋밋한 느낌이지만 연주중인 코간의 모습을 담은 뒷면은 흑백 사진의 매력이 제대로 담겨 강렬하게 느껴지는데다 역동적인 운지와 활놀림이 느껴지는 이 사진은 보는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코간에 열광하는 나로서야 말할 것도 없고. 곡 구성은 모차르트, 비제, 베토벤, 사라사테, 드보르자크, 드뷔시, 풀랑 등의 협주곡과 소품들.
첫 번째 면을 턴테이블에 올려 놓고 플레이를 시켜 보았다.
음악 시작 전 잡음하나 없는 깨끗한 마찰음의 증폭이 푸근하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이 흘러 나온다. 넘치는 정열과 분출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현을 타고 쏟아내는 그의 사운드는 역시 여전하다. 그의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갖게되는 이러한 느낌은 이 곡에서도 여지없지만 곡 자체가 아름다운 모차르트 5번이고 보면 특히나 감동적이고 특히 3악장이 압권이다.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굵고 거친 음이 선율을 따라 에너지를 쏟아내는 거침없는 연주에 듣고 있는 나를 완전히 압도한다. 거친 연주가 경악스럽게 요동치는 때는 현의 신경질이라는 생각마저 들면서도 아름다움에 전율하게 만든다.
비제 카르멘 환상곡. 현과 활이 만나 긴장을 일으키며 내는 마찰음은 듣고 있노라면 닭살이 쭈악 몸전체를 덮어감이 느껴지고 입에서는 악소리가 나온다. 피치카토는 뚱기는게 아니라 거의 사정없이 걷어차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힘을 쏟는다.
긴스버그와 함께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만일 피아노의 반주가 박하우스처럼 강렬했다면 어떤 연주가 되었을까. 두 명의 뱃사공이 치고받고 싸워 난장판이 된 형국이 되었을 것 같다. 코간의 연주를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듯한 느낌. 반주에 힘을 얻기라도 한듯 연주는 맹렬하다. 그런가 하면 한순간 한순간 피아노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소리를 죽일땐 의외의 우아함이 보인다.
사라사테의 Zepateado. 이 역시 듣고 있다 보면 기절초풍이다. 스케이트를 타고 전속력으로 내닫다 말고 표면을 긁는 날로부터 흩날리는 얼음파편과 마찰음이 연상된다.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 코간답지 않은 섬세함과 우아함. 곡자체의 분위기 때문인가. 그러나 정열과 힘은 한움큼 머금고 있다. 뒤로 갈수록 머금고 있던 에너지를 쏟아낼 때는 거의 폭발적이다.
그 외에도 드뷔시와 풀랑 등의 연주가 소품으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나의 귀를 잠시도 돌릴 여가가 없이 두 장의 음반을 단숨에 듣게 만든 이 음반의 마력은 실로 대단하다. 혹자는 어느 녹음 속에서 미세한 코간의 운지소리를 듣고 놀라며 이렇게 연주중에 에너지를 불태우던 그였기에 요절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되새길수록 와 닿은 표현이 아니었나싶다. 일청을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