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여행/군바리시절

후보생의 추억(입대하던날)

코렐리 2008. 5. 29. 14:12
어리버리 더벅머리를 한채 입대 하루 전 진해로 내려갔지만 그나마 장교로 입대한다는 사실때문인지 그리 크게 두렵다거나 심란하진 않았다. 게다가 나는 서울에서 필기, 면접, 체력검사, 신체검사, 신원조회 등을 하며 알게 된 친구들과 전날 함께 내려 가서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해병에는 나와 순영이 그리고 호수가 있었고, 해군에는 우진이, 영호, 익수 등이 있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군대간다고 여기저기 인사다니다 보니 생기는 교통비조의 용돈이 모이고 모여 그때까지 만져보지 못한 큰 돈(아마도 대졸신입사원 1개월 봉급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을 이미 쥐고 있었다.
기차에서 처음 내렸을 때는 온천지가 하얀것이 벚꽃세상이었다.
가진 돈도 있겠다 횟집 가서 회와 소주를 실컷 먹고 마셨다.
이건 입대하느라 심란한게 아니라 낼부턴 못먹으니까 후회하기 전에 실컷 먹자였다.
어둠이 깔린 뒤 횟집에서 나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로수로 길게 심어 놓은 벚나무의 가지는 길게 드리워져 길건너편 벚나무의 가지와 만나 터널을 이루고 있었던데다 가로등이 만발한 벚꽃 바로 위에서 빛을 내려 쏘는데 그곳은 별천지였다.
그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해 꼬옥 다시 한 번 가리라 다짐도 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실천을 못했다.

다음날 오후 진해 해군교육사령부 육정문 안에는 여자친구나 가족들이 정문 안으로 함께 들어가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군악대의 연주가 저음을 깔며 연주하고 있었고 잠시 후 입영장정의 입소를 알리며 자기들에게 안심하고 맡겨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입영장정 아닌 사람들은 나가달란 소리였다.
아마도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 것이 "석별의 정이"었던 것 같은데...
궁상맞은 음악에 감정이 고조되서인지 저쪽에서는 여인네가 입영장정의 품에 안겨 섧게섧게 울고 있었다.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게 신파극(?)에 박수를 보내줬다.
신파극은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우리 외에도 힐끔힐끔 훔쳐보며 헬렐레 하는 애들이 많았다.
난 입대 전까지 만나던 여친하고 헤어진지 몇 개월 된상태라 한 편 부럽기도 했다.

우린 강당으로 안내되어 그 곳에서 해군과 해병을 나누어 방배정 등의 절차를 밟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 건물의 위치는 생각이 나지만 건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고 전투수영장 위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김명규 선배와 하용문 선배의 정복입은 모습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바깥에서 하사관 복장을 봐도 멋있는 해병 정복을 장교가 입은 것은 처음 보았고 나도 임관 후엔 저 옷을 입을 수 있겠지 하는 뿌듯함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해군 복장이 더 멋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후회를 하기도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직 지급물자가 도착하지 않아서인가 이틀정도를 입고 간 사복 그대로 생활했다.

처음으로 천지관에서 영내 저녁식사를 했다.
대학교 1,2학년때 위병훈련과 전방체험경계근무를 가 본 기억에 군대밥은 더럽게 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관후보생의 식사라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주계에는 잡일하는 사병들만 있었고 민간인들(군무원들이었을까?)이 직접 조리를 하고 있었다.
역시 장교로 입대하니 이런 대접도 받는군 하는....

밥먹고 나서 천지관을 나와 슬슬 걸어 충용관으로 가는데 해군 구대장 하나가(OCS79차 해군소위였는데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고 구대장 중에서는 가장 착하게 생겼지만 멍청하게 생기기도 한...) 나의 뒤통수에다 대고
"귀관! 걷나? 걸어?"
라며 뛸 것을 종용했다.
이미 3보 이상은 무조건 구보로 다니라는 안내를 들은 직후였다.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한 나는 미소까지 지으며 달리면서 여유 있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멍청하게 생긴 그 해군 구대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난 그게 더 재미가 잇었다.

내무실에 처음 배정받아 들어갔을 때는 4인실이었다.
나, (최)성식이, (오)세봉이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또한명이 누구였더라... 임시배정이라 워낙 잠깐 같이 있어놔서... 그 뒤 피복을 지급받은 후 재배정을 받았기에 가물가물하다.

좌우당간 첫날 식사후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팔각모를 쓴 김명규 선배가 들어왔다.
스스로가 아직 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경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해야되는거 아닌가 생각했다가 기냥말았다.
김명규 선배의 질문이 있었다.
"귀관들은 상관을 보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차렷! 경례!" 할만큼 기압이 들어갈 기회는 아직 없었다.
나는 무심결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김명규 선배가 나가고 나서 룸메이트들에게 내가 말했다.
"존대말도 써주고 요즘군대 좋아졌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네요. 그쵸?"
모두들 동의했다.

그러나 다음날부턴 반말이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귀잡고 오리걸음에 쪼그려뛰기... 등등...
그때 권영성 선배의 소름끼치는 멘트가 기억난다.
"이새끼들 작업복만 입어봐! 아직 민간인 복장이라 많이 참는데 피복 지급받고 나면 그때부턴 죽을 각오들해!"

아니나 다를까
민간인 복장에 굴렀을때는 그냥 놀이요 게임이었다.
긴장과 괴로움의 14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인생 꼬였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심란함이여....

처음 목욕탕에 들어간 그날 졸나 먼지 뒤집어 쓰고 게다가 매일 춥게 자다가 뜨끈한 목용탕에 들어갔을땐 정말 기분이 좋았다.
권영성선배 왈 "노래할까?"
기압든 이구동성 "예"
"뭐할래?"
잠잠하던 차에 누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울고싶어라"
모두가 와하하 웃었다.
어이가 없었던 김영성 선배도 이 때는 "그래 좋다 하나 둘 셋 넷!" 시작구호를 외쳐주었다.
"울고싶어라....."
막상 부르기 시작하니 왜그리도 처량하던지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순간 당황하며 얼굴을 물에 담가 눈물을 감추려 했는데 대부분 울고들 있었다.
지나고 나니 추억이지 당시엔 악몽이었다. ㅡ,.ㅡ;